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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운명 처한 암흑물질 연구자들

암흑물질은 우주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6배나 많지만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우주론의 난제 중 하나다. 공교롭게도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이 그늘진 운명을 맞고 있다. 혁신적이고 중요한 이론을 세계 최초로 발표하고도 세계 학계에서 잊혀 진 존재가 되었는가 하면 해외에서는 큰 관심을 받았음에도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단절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 한양대 자연과학부(물리학 전공) 신상진 교수와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이재원 박사는 1990년대 초반 새로운 암흑물질을 제안하는 보즈-아인슈타인 응축(BEC) 이론을 내놓아 암흑물질 연구의 중요한 분야를 개척했음에도 선취권을 다른 외국 학자들에게 빼앗겨 왔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또한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선기 교수는 주목받을 만한 암흑물질 관측실험을 하고도 연구비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됐다.

혁신적 이론 창안하고도 잊혀져

신상진 교수와 이재원 박사는 최근 해외 연구자들이 내놓은 논문을 통해 퍼지(fuzzy) 암흑물질, 척력(repulsive) 암흑물질, 스칼라장 암흑물질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암흑물질 연구 분야가 성장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름만 다를 뿐 자신들이 1990년대 초반에 연구했던 보즈-아인슈타인 응축(BEC) 모델에 바탕을 둔 이론들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 학계에서는 신 교수가 세계 최초로 ‘BEC 모델’을 창안했다는 사실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신 교수와 이 박사가 모델을 내놓고 다른 연구로 관심 분야를 옮겨간 사이 해외에서는 이 분야가 무럭무럭 성장해 일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신 교수의 BEC 암흑물질은 일반적으로 물리학자들이 암흑물질로 꼽아온 ‘윔프(WIMP; 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s)’나 ‘마초(MACHO; MAssive Compact Halo Object)’ 같은 물질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물질이다. 그리고 BEC 모델이란 극도로 가벼운 암흑물질이 보즈-아인슈타인 응축이라는 특별한 상태에 있어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가설이다.

물리학자들은 암흑물질의 후보로 중성자나 양성자가 고밀도로 밀집한 천체(마초)나 수소보다 훨씬 무거운 새로운 입자(윔프)를 꼽아왔으며, 현재 이를 한창 연구 중이다.

반면 BEC 물질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가볍다. 물질의 기본 입자 중 가장 가벼운, 그래서 상당기간 동안 질량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논란이 되었던 중성미자 질량의 1조분의 1의 1조분의 1밖에 안 된다. 다시 말해 10의 24제곱분의 1 전자볼트 밖에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이렇게 가벼운 입자들이 극도로 낮은 온도에서 보즈-아인슈타인 응축상태라는 하나의 양자상태에 몰려 있으면 마치 우주 전체의 암흑물질이 일사불란하게 발맞춰 행동할 수 있다.

이상하고 복잡해 보이기는 하지만(또한 아직 암흑물질의 주류는 아니다) 신 교수의 BEC 이론은 다른 암흑물질 후보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한계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잠재력이 크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유력한 암흑물질 후보로 꼽는 윔프는 현재 우주의 관측결과와 비교했을 때 거시적 수준에서는 잘 맞아떨어지지만 은하보다 작은 수준에서는 서로 상충된다. 즉 윔프 이론에 따르면 은하의 중심부로 갈수록 암흑물질이 기하급수적으로 밀집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중력렌즈현상을 통해 관측된 암흑물질은 은하 중심부뿐만 아니라 외곽에도 상당량이 분포한다.

또한 윔프의 존재를 가정해서 빅뱅 이후 별과 은하의 형성을 시뮬레이션 해보면 은하보다 아주 작은 왜소 은하들이 다수 생겨나는데, 실제 우리가 보는 우주에는 왜소 은하의 수가 극히 적다. 이와 달리 BEC 물질을 갖고 시뮬레이션을 해 보면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처럼 은하보다 작은 천체가 별로 생기지 않는다. 또한 물질의 특성상 은하 중심부에 지나치게 많은 암흑물질이 모이지 않는 사실도 설명이 된다. 한마디로 BEC 이론은 소규모에서 거대규모에 이르기까지 우리 우주의 실제 관측되는 모습과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신 교수는 BEC 모델을 1992년 처음 발표했고, 이후 이 박사는 1994년과 1996년 이 모델을 확장한 논문을 ‘피지컬 리뷰 D’에 발표했다. 이 박사는 “이 모델에 대해 당시 학계의 반응은 너무 싸늘해 크게 낙담했었다”고 말한다. 이후 이들은 다른 연구 분야로 옮겨갔다.

그러다 1998년부터 2000년대까지 해외 연구자들이 퍼지(fuzzy) 암흑물질, 척력 암흑물질, 스칼라장 암흑물질 등 BEC 모델에 뿌리를 둔 여러 가지 가설을 제안했다. 잠시 잊혀 진 이론이 재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연구 동향을 총괄하는 리뷰 논문에서도 신 교수나 이 박사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신 교수와 이 박사는 최근에야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다급히 리뷰 논문을 발표, 이 이론의 최초 제안자임을 적시하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이 박사는 “리뷰 논문을 통해 우리 연구의 선취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명백히 앞서 발표한 논문이 있는 만큼 이러한 사실을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세계 학계에서 보다 더 큰 입김을 행사하려 한다면 후속 연구를 통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연구비 중단에 따른 장벽

현재 물리학자들이 가장 그럴듯한 암흑물질 후보로 여기고 있는 윔프 연구에서도 자칫 이런 상황이 재연될 판이다. 획기적 아이디어로 윔프 검출에 뛰어든 서울대 김선기 교수팀이 정작 연구비 지원에서 장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윔프는 보통의 입자들과 약하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검출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웬만한 물질로는 검출하려 해도 윔프가 그냥 통과해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돌할 확률이 낮을 경우에는 경우의 수를 엄청나게 늘리는 것이 실험 물리학자들의 방식이다.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거대한 장비를 이용해 장기간 관측을 하는 방법을 써왔다. 윔프를 검출하는 실험 중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의 DAMA 실험과 미국의 CDMS 실험이다.

두 실험 모두 기본 원리는 윔프가 일반 입자들과 드물게 상호작용, 즉 충돌할 때 부딪힌 원자핵이 살짝 튕겨지면서 나오는 극도로 미미한 빛이나 열을 측정하는 것이다.

역시 다른 입자와 드물게 상호작용을 하는 중성미자가 일본의 카미오카 폐광을 개조한 실험 장비인 카미오칸데에서 관측되었듯이 극도로 미미한 신호를 잡아야 하는 DAMA와 CDMS 실험도 사방에서 날아오는 우주선(宇宙線) 신호로부터 방해받지 않기 위해 지하 수백m 깊이로 파고 들어갔다.

이탈리아와 미국의 실험 그룹은 상이한 디자인으로 수행된 실험을 통해 윔프가 존재할만한 범위를 내놓았지만 그 결과에 다소 차이가 있어 논란이 됐다.

김 교수팀은 한국암흑물질탐색(KIMS) 실험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윔프의 탐색 영역을 적시해냈다. 김 교수팀은 2000년부터 정부의 창의연구 지원을 받아 강원 양양의 지하 700m에 실험 장비를 설치하고 윔프 찾기에 나섰었다.

KIMS 실험은 주변의 방사선 신호와 윔프의 신호를 보다 효율적으로 구분해낼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이를 통해 보다 정밀한 관측이 가능했고, 세계적 저널인 ‘사이언스’도 지난해 7월 세계 연구자들의 암흑물질 연구관련 기사에서 KIMS 실험을 주목했다.

결국 김 교수팀은 지난해 8월 ‘피지컬 리뷰 레터’에 윔프의 검출 영역을 더욱 구체화한 실험결과를 발표했고, 올 2월에는 교육과학기술부(당시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재단이 선정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같은 성과들이 정부의 연구비 지원 계속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가 끝난 직후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많은 논문을 빨리 낼 수 없는 연구의 특성상 김 교수팀의 논문 수는 심사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급기야 창의연구 2단계 심사에서 연구지원 중단이 결정됐다.

학계에서는 “계량적이고 기계적인 기준만 따를 경우 정부의 연구비 지원에서 기초연구가 홀대받을 수밖에 없는 대표적 사례”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희원 한국일보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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