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본군은 이미 태평양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영토를 장악, 보복 공격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미군의 묘책이 펼쳐지게 된다.
영화‘진주만’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미 육군의 B-25 폭격기가 항공모함에서 발진,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진주만이라는 영화는 그리 수준급의 리얼리티를 추구한 작품은 아니다. 초점이 주인공들 사이의 러브 스토리에 맞추어져 있다. 이 때문에 관객의 상당수는 이 장면 역시 픽션일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항공모함에서 육군 폭격기가 이륙해 일본 본토를 공습했다는, 다소 말도 안 돼 보일 것 같은 이 작전은 엄연한 실화다.
미국의 보복 공격 열망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본토가 전쟁터가 됐고,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에 직접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분노한 미국 국민들은 그에 머무르지 않고 가해국인 일본 본토에 하루빨리 보복을 하고 싶어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 1월 4일의 회의에서 일본 본토를 공습할 방안이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1942년 초의 상황에서 일본 본토에 대한 보복 공습을 펼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무리가 따랐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진주만 공습 이후 본토 면적의 수 십 배가 넘는 거대한 영토를 식민지로 확보하게 됐다는 것.
동쪽으로는 미드웨이 섬 바로 앞, 서쪽으로는 중국 영토 일부와 미얀마, 남쪽으로는 뉴기니, 북쪽으로는 알류산 열도에 이르는 광대한 태평양 바다와 섬, 그리고 육지가 모두 일본의 수중에 있었다. 그 경계선은 자그마치 지구 둘레의 반인 2만km.
또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 태평양 함대는 괴멸했다. 요즘처럼 대륙 간 폭격이 가능한 B-2 스텔스 폭격기나 ICBM도 없다. 가장 멀리 날아가는 항공기래야 항속거리 3,000km인 B-17이 전부였다. 미군 기지가 있는 하와이에서 일본 본토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훨씬 넘는데, 무슨 수로 일본 본토를 공습한다는 말인가.
항공모함 함재기들을 이용해 일본 본토를 공습하자는 방안도 나왔지만 함재기들의 항속거리는 육군 폭격기에 비해 더욱 짧았다. 이 때문에 항공모함 함재기로 일본 본토를 공습하려면 일본 본토에서 적어도 300km 거리까지는 접근해야 하지만 몇 척 남지 않은 금쪽같은 항공모함 전력을 투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이 정도 거리는 일본 폭격기의 행동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충분한 항속력을 갖춘 육군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싣고 간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 항공력이 미치지 않는 비교적 먼 바다에서 폭격기를 이륙, 일본 본토를 공습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폭격기가 항공모함에 다시 착함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일단 폭탄을 투하하고 나면 중국으로 날아가 그곳의 미군기지에 착륙하도록 계획을 짰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였지만 이것에 기초해 실시된 것이 바로 1942년 4월 18일 두리틀 폭격대의 일본 본토 공습이다.
파격적인 인선과 작전계획
사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육군 폭격기로 어딘가의 목표를 공격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안전하게 공격하기 위해 연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실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이 위험하고 실험적인 작전에는 그에 걸맞는 지휘관과 대원들이 필요한 법. 이 작전의 지휘관으로 지원한 인물은 당시 45세였던 미 육군 중령 제임스 두리틀이었다.
아마추어 권투 챔피언, MIT 항공공학 강사, 항공기 최고속도 및 항속거리 세계 신기록 보유자 등 화려한 이력의 두리틀 중령은 미 육군 항공병과를 무(無)에서부터 일으켜 세운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34세 때 군에서 제대해 민간인이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인 1940년 다시 소집됐고, 이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 그 외에 미 육군 제17폭격비행단에서 이 임무를 수행할 승무원들을 선발했다. 작전이 너무나 위험한 만큼 승무원들은 전원 지원제로 충당됐다.
한편 임무를 맡을 항공기도 문제였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일본 본토를 공습하고 중국의 미군기지까지 가려면 약 3,900km의 거리를 날아야 한다. 게다가 이번 임무는 항공모함에서 시작되는 만큼 100m의 활주거리 밖에 없는 상태에서 이륙을 해야 한다.
이에 따라 이런 조건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명된 B-25 쌍발폭격기를 임무에 사용하고, 더욱 확실하고 안전한 임무수행을 위해 엄청난 개조가 가해졌다.
기관총, 무전기 등 폭격 임무 수행에 직접적인 필요가 없는 장비들은 중량 경감과 항속거리 증대를 위해 모두 제거해 버렸다. 심지어는 정밀 폭격에 반드시 필요한 노든 폭격조준기도 제거했다. 이는 항공기의 무게를 줄임은 물론 아날로그 방식의 탄도계산기까지 갖춘 이 장비가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시된 것은 일본 본토를 공격했다는 상징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폭격의 정확성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연료탱크는 3개를 증설, 원래 2,500ℓ이던 이 항공기의 연료 용량을 4,300ℓ로 늘렸다.
전례가 없던 항공모함에서의 육군 폭격기 이륙을 위해 승무원들의 훈련도 착착 진행돼 갔다. 마침내 개조된 B-25 폭격기 16대(당시의 항공모함에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수치)와 훈련을 마친 승무원 80명이 1942년 4월 1일 미 항공모함 호넷에 승함한다.
호넷은 제18기동부대를 이끌고 이튿날인 4월 2일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했고, 4월 13일에는 공중엄호를 제공해 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이하 제16기동부대와 상봉, 일본 본토로 향했다. 일본 본토가 700km 거리 내로 들어오는 4월 19일 아침에 항공기를 출격시킬 예정이었다.
예정보다 앞당겨진 출격시간
하지만 이들 미군 기동부대는 4월 18일 오전에 일본 군함 제23 니토마루와 조우하게 된다. 미군은 이 함선을 즉각 격침시켜 버렸지만 항공모함 호넷의 함장은 이 전투로 인해 미군 함대의 위치가 이미 일본군에 폭로됐고, 이대로 가다간 적의 공격에 휘말려 작전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갑판 위에서 출격을 기다리고 있던 16대의 B-25를 즉시 출격시킬 것을 명했다. 예정일보다 하루가 빠른 출격이었고, 일본 본토까지의 거리는 1,200km가 넘게 남아있었다.
사실 일본도 니토마루가 침몰 전 보내온 보고를 통해 미 기동부대의 접근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이 항공모함에서 육군 폭격기를 발진시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미 기동부대가 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예정보다 더 먼 거리에서 출격하게 됐기 때문에 중국의 미군기지에 안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인 두리틀 중령의 기체를 선두로 B-25기는 모두 이함, 일본 본토를 향해 날아갔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비행이었다.
각각의 폭격기는 1톤씩의 폭탄을 적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16대 중 10대는 도쿄, 2대는 요코하마, 나머지 4대는 1대씩 나뉘어져 요코스카, 나고야, 고베, 오사카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들의 공습 목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군사 및 산업시설이었으며 일본 천황의 궁전, 민간인 거주지역 등은 폭격 금지 대상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미국은 군주국가인 일본을 대표하는 천황 및 그 일가족이 죽어버리면 종전 협상은 물론 전후 처리가 상당히 곤란해질 것으로 판단, 천황 일가는 가급적 폭격 목표에서 배제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레이더를 피해 초(超) 저공으로 날아 이륙 후 6시간 만에 일본 본토 상공에 도착, 폭탄을 풀어놓았다. 미국이 이런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본토를 공격할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한 일본에게 이것은 실로 완벽한 기습이었다.
두리틀 폭격대는 일본 본토 상공에서 소수의 일본 항공기와 마주치기도 했다. 또한 뒤늦게 사태를 알아챈 일본군이 두리틀 폭격대에 대공포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단 1대의 B-25도 격추당하지 않았다. 기습이 너무나 완벽한 탓에 일본 민간인들은 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이 상황을 실전이 아닌 훈련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기가 걷힌 후 드러난 폭격의 성과는 너무나도 형편없었다. 이날 미군의 공습으로 전사한 일본인은 불과 50명. 부상자도 400명에 불과했다. 진주만 공습의 보복 치고는 매우 부실한 전과였다.
폭탄을 쏟아놓고 중국으로 날아가던 B-25 폭격기들은 공중에서 연료가 고갈돼 추락하고 만다. 승무원들은 추락 전 모두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10명의 승무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탈출에 성공,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분노한 일본군은 분풀이로 25만명의 중국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단 1대에 불과하지만 무사히 지상에 안착하는데 성공한 B-25도 있었다. 이 폭격기는 중국대신 보다 가까운 소련으로의 비행을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4km 떨어진 소련 공군기지에 착륙했다.
하지만 당시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 일본의 적국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항공기와 승무원들을 미군에 반환하지 않다가 14개월이 지난 후 승무원들만 이란을 통해 반환했다.
무사히 본국으로 탈출하지 못한 10명 중 2명은 항공기가 중국에 추락할 때 사망했고, 나머지 8명은 모두 일본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죄목은 무고한 일본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것인데,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다.
실제 이들 중 3명은 그해 10월 사형당했으며, 1명은 영양실조로 옥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은 종신형으로 감형돼 종전이 될 때까지 끊임없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들 미군 포로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본군 장교 4명은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전쟁 범죄자로 몰려 5~9년간의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일본 본토를 처음으로 공습하고 돌아온 두리틀 폭격대원들은 미국의 영웅이 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지휘관 두리틀 중령에게 미국 최고 훈장인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하고, 준장으로 특진시켰다. 나머지 대원들에게도 전공에 따라 은성훈장, 우수비행 십자훈장, 전상장 등을 수여하는 등 대대적인 포상을 베풀었다.
총 80명이었던 두리틀 폭격대원들은 이후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전사하기도 하고 전후 노환으로 사망하기도 해 2008년 현재는 10여명만이 살아남아 있다.
기공법의 승리
두리틀 폭격대의 공습이 일본에 미친 물리적 피해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공습이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전해준 메시지는 명백했다. 즉 일본 본토 역시 기습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미국의 항공모함이었기 때문에 이에 자극받은 일본은 이후 미 항모부대를 찾아내 괴멸시키는 것에 혈안이 됐다. 같은 해 5월 인류 최초의 항공모함 대 항공모함 전투가 벌어진 산호해 전투, 6월 미드웨이 전투는 바로 이 같은 일본의 전략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미드웨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미 항공모함 부대를 괴멸시키기는커녕 자국의 항공모함 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패전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손자병법에 ‘무릇 전쟁은 정공법으로 상대하고, 기공법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전쟁을 하려면 상대방과 비슷한 힘과 머릿수도 있어야겠지만 방심하는 상대의 급소에 일격을 가해 쓰러뜨릴 줄 아는 꾀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상상도 할 수 없던 기상천외한 방법을 사용한 두리틀 폭격대의 일본 본토 공습은 그런 의미에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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