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C저널’로 불리는 세계적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사이언스(Science)·셀(Cell)은 과학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연구 논문을 싣고 싶어 하는 꿈의 저널이다. 이 가운데서도 셀은 생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저널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한국의 한 과학자가 단백질 복합체의 구조와 작용 메커니즘을 규명한 연구 성과로 한 달 새 연속 두 편(9월 7일, 9월 21일)의 논문을 이 학술지에 게재해 세계 과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패혈증을 유도하는 단백질 복합체 ‘TLR4-MD-2’와 ‘TLR1-TLR2’를 규명, 신약 개발의 가능성을 높인 이지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이름부터 생소하고 난해한 TLR4-MD-2와 TLR1-TLR2 단백질 복합체는 모두 패혈증과 관련돼 있다. 전자는 체내 독소와 결합해 패혈증을 일으키는 단백질 수용체, 그리고 후자는 박테리아에 의해 패혈증을 유발시키는 단백질이다.
패혈증은 세균이 혈액에 급속히 번식할 때 이에 맞서 특정 단백질이 면역세포 안에 지나칠 정도로 강한 면역 비상체제를 가동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과다면역 반응’이다. 치사율이 최고 40%에 달할 만큼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패혈증을 발생시키는 박테리아의 독소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백질 복합체의 3차원 분자구조와 작용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왔다.
이 교수는 “지난 1997년 세계 학계에서 ‘톨라이크 수용체(TLR)’ 단백질이 최초로 발견된 후 TLR 구조를 연구하는 일은 다수의 패혈증 치료제 및 항암제, 항염증제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분야로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세계 유수의 경쟁 연구그룹도 대부분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 집중돼 있다. 이들 세계 최고의 연구팀에 비해 연구 인력과 예산이 크게 부족한 이 교수팀은 독창적인 연구개발 방법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바로 ‘하이브리드 LRR 테크닉’이라는 연구법이다.
일단 단백질 복합체의 3차원 구조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을 결정체로 만들어 엑스선 빔을 쏜 뒤 튕겨 나오는 엑스선의 빛 정보를 해석해야 한다. 이 교수는 “약 3만종에 이르는 인간의 단백질들은 우리 얼굴처럼 종마다 생김새가 천차만별”이라며 “그 3차원 생김새를 알면 단백질의 생체 내 작용을 이해하고 치료 약물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3차원 분석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엑스선 빔을 쏘기 위해서는 먼저 면역 단백질을 단단한 결정체로 만들어야 하는데, 단백질이 너무 쉽게 부서지거나 끊어지기 일쑤였던 것. 특히 패혈증과 연관된 단백질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져 세계 주요 연구그룹들도 엑스선 분석에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하이브리드(융합)라는 용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교수팀의 새로운 연구법은 쉽게 결정체로 만들 수 있는 손쉬운 단백질 종과 분석대상 단백질을 서로 결합하는 식의 간단한 ‘발상의 전환’으로 이 같은 난제를 수월하게 극복했다.
패혈증 면역 단백질을 손쉽게 결정체가 되는 단백질에다 붙여 견고한 형태를 완성, 두 단백질의 3차원 구조 영상을 얻게 된 것.
이 교수는 “마침내 패혈증 면역 단백질이 말발굽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 최초로 규명됐다”며 “이는 TLR 단백질은 물론 다른 LRR 패밀리 단백질 연구에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약 개발에 획기적인 가능성을 열게 해 준 것”이라고 연구 성과를 평가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패혈증 단백질 복합체 TLR4-MD-2와 TLR1-TLR2를 완전 규명함으로써 이 교수는 국내 최초로 관련 논문을 셀지에 한 달 새 두 편이나 게재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됐다.
뿐만 아니라 올해의 KAIST인상(KAIST 주관) 미래를 만드는 우수과학자(교육과학기술부 주관) 올해의 과학인상(한국과학기자협회 주관) 등 국내 주요 과학계 포상을 휩쓸었다.
이 교수는 “새 연구법이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거나 성공하지 못했던 발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고분자인 단백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어떤 배열로 이어졌는지, 또 어느 부위가 오목하고 볼록한지 등을 알게 되면 온갖 질병과 면역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작동 스위치’가 어느 부위에 있는지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면서 “단백질 3차원 구조 연구는 앞으로도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재철 서울경제 기자 humming@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