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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정치,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예술과 정치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의외로 가까운 사이다.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 모든 예술 분야가 정치와 무관하지 않으며, 정치적 권력 안에서 상호교류하며 발달했기 때문이다. 현대로 오면서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더욱 긴밀하게, 그리고 내밀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지난 20세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었던 냉전시대에는 미국이 막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전 세계의 예술계를 좌우하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을 통해 성장,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30여 년 간을 풍미하게 된다.

‘예술은 정치와 한 배를 타고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감성적이고 순수하기 그지없을 것 같은 예술이 정치적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사실 모든 예술은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음악은 발생 초기부터 권력자들을 칭송하고 기념하기 위한 의식의 도구이자 봉사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무용은 제사장과 왕이 집전하는 종교적 제의에서 피지배층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물론 목적은 권력의 유지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카이사르 장군, 알렉산더 대왕 등 정복자를 모델로 한 그림이나 조각은 그들의 업적을 치하하고 피지배층의 충성심을 북돋기 위한 지도층의 계산이 깔려있다.

냉전과 추상표현주의

정치와 종교가 권력을 둘러싼 이란성 쌍둥이라면 종교 역시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을 곧잘 활용한다. 서구 중세 미술의 백미로 평가받는 성화(聖畵)가 그렇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에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가르침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된다. 교세 확장을 위해서는 속세의 평범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예수나 그의 말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결국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요 장면을 회화로 표현하자고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바로 성화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미술의 정치성은 르네상스 시대에서도 확인된다. 미술사에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몇 안 되는 작가로 꼽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주인공. 궁중화가였던 그는 당시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이나 비참한 현실을 그리는 것보다 정치적 권력을 비유적으로 다룬 작품을 그려 성공한다.

20세기 들어 미술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유럽에 비해 여러모로 뒤쳐져 있었던 미국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계기로 경제적·문화적인 기반을 다지며 유럽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많은 유럽의 미술가들이 안전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미국에서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출발한 표현주의를 근거로 한 이 미술사조는 지금까지 가장 미국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피카소가 입체파를 이끌었던 것과 달리 추상표현주의는 한 사람의 특정 화가가 아니라 뉴욕 근처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만났던 화가들에 의해 형성된다.
이전의 미술과 다른 점은 보이는 특정 대상을 묘사하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즉 내면세계 혹은 자아(ego)에 대한 관심을 캔버스에 옮긴다는 것. 물론 작가 개인의 내면세계와 관심이 작품의 시작이지만 근원은 고대 신화 혹은 종교 등 사색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추구했다.

형태적인 면에서 추상표현주의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멕시코 벽화 등에서 영향을 받는다. 정신적 체험이나 가시적 세계를 초월한 환상, 그리고 시대에 대한 분석과 풍자라는 점에서 입체주의 및 초현실주의와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이와 함께 원시적인 생동감, 그리고 힘의 분출 등에 대한 묘사는 원시미술에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그 동안 세계 미술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뉴욕을 단번에 예술의 중심지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 미술은 풍경화, 특히 미국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게 거의 대부분이었다. 황량한 거리에 인기척 없는 스산한 건물을 묘사한 그림이나 외딴집을 그려 썰렁한 분위기가 나는 작품이 많았던 것.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강조하고, 붓으로 그리는 대신 물감을 반복해 뿌리며 작품을 완성하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등 즉흥적 행위, 그리고 이젤 회화를 거부해 상하좌우 동등한 전면균질(all over painting) 회화를 지향했다.

미국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해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정치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즉 미국이 추상표현주의를 냉전의 도구로 이용한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고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는 현실주의 작품들이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은 어떠한 구속도 없는 상태에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추상표현주의를 서방세계의 상징으로 내세워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 1950년대 말이 되면 미국 정부는 추상표현주의를 국위 선양을 위한 수출 품목으로 인식, 전 세계에 부지런히 홍보한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폴록

추상표현주의 작가 중 미술품 경매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주역은 플록, 쿠닝, 그리고 로스코 3인이다. 이들 중에서도 폴록은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불린다.

서부 와이오밍 주 출신인 그는 1947년부터 캔버스라는 화면에 붓 대신 물감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높이 4m가 넘는 거대한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던지고, 튕기면서 화면을 채워갔다. 평온한 풍경을 그리는 게 미술의 전부로 알고 있었던 미국에서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 정부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터라 이해가 어려워도 처음 접한 그의 행동은 곧 충격을 넘어 감탄으로 승화됐다.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업을 ‘움직임의 기록’ 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화면 위의 자국은 화가가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며 팔을 흔들고 손목을 돌리는 등 즉흥적 움직임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뿌려대기 시작한 그는 1948년 1월 처음으로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다.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놓고 그 주변이나 위를 걸어 다니면서 물감을 뿌려대는 작업 모습만으로도 독창성을 확보한 셈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의미하는 여러 색상의 물감을 뒤섞어 무아지경에 이르기까지 일거수일투족의 궤적을 보여주는 영역까지 예술화했던 것이 바로 폴록식의 추상표현주의인 셈이다.

그의 작품은 짧은 시간에 세계 미술계를 강타했다.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지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등장하듯이 폴록의 명성이 커지면서 추종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폴록은 물감 뿌리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감을 뿜어내고 캔버스 위를 물감을 바른 자전거로 통과하기도 했다. 또한 물감 주머니에 총을 쏴 캔버스에 터뜨리거나 알몸의 여체에 물감을 칠하고 천에다가 찍어내는 등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다.

이 같은 성향은 유럽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공통점이 있지만 원초적인 신화와 개인적인 사색을 버무렸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즉 추상표현주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 이 때문에 당시 비평가인 해롤드 로젠버그는 폴록의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쿠닝과 로스코

폴록이 행위를 기억으로 남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연상시키는 여인의 모습을 폭력적으로 그린 한 작가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윌렘 드 쿠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간 쿠닝은 1948년 뉴욕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다. 바로 오만하면서도 비참하고 저속한 모습의 여인을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한 ‘여인’ 연작이다.

초기 비평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폴록의 작품은 구상보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내면세계를 그린 것이라는 둥 온갖 해석이 가능했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우스꽝스러운 여인의 모습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쿠닝은 입·어깨·가슴·엉덩이·다리 등 여성의 신체 일부를 극대화하거나 괴기스럽게 그린 작품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변이와 변형을 표현했다. 비정상적으로 묘사된 신체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려 했던 것.

폴록의 그림은 마치 나뭇가지가 무성한 밀림 속의 한 부분을 표현해 놓은 느낌이 들 정도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점이 핵심이라면 쿠닝은 인체나 풍경의 형태를 자신의 감성으로 해석해 내는 자발성이 포인트다.

얼마가지 않아 쿠닝의 작품 세계도 평단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현대미술의 큰 줄기를 이루기 시작한다. 실제 그는 폴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추상표현주의는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오기도 했지만 종교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현대적 종교화 작가로 불리는 로스코가 이 분야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폴록이 물감을 뿌리고, 쿠닝이 여인의 모습을 기괴하게 그리고 있던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로스코는 두 세 개의 직사각형에 너울거리는 색채를 담아내는 초상화를 선보였다.
언뜻 봐서는 캔버스를 직사각형으로 구분해 각기 다른 색상을 덧칠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는 그의 작품을 보고 평론가들은 성모마리아 상으로, 때로는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수태고지의 현장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로스코의 작품은 대부분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보이지만 직사각형 간의 색상과 비중을 적절하게 맞추고 있어 미묘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유대인이었던 로스코는 그림을 통해 집단 민족주의적 살인과 세계 멸망의 위협에 시달리던 인류가 어떤 의미를 추구했는가에 대해 종교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를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구분하는 것은 내면세계로 침잠해 사색한 과정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로스코의 그림은 장엄하고 환상적인 요소가 뚜렷하다. 1970년 그가 자살하기 전에 그렸던 작품은 검은색으로 표면을 짙게 채색, 보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게 했다.

추상적인 숭고성 강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주관적인 세계를 초월해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의미에 도달하는데 주력했다. 추상표현주의는 형태를 파괴하며 추상적인 숭고성을 강조해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자극한다.

추상표현주의는 또한 합리성과 논리로 무장한 서구에 동양의 무념무상 정신을 혼합한 최초의 미술사조이기도 하다.
‘미국 추상미술가’ 그룹에 속했던 젊은 화가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의 공백, 그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나오는 동양적 예술은 변함없는 인간의 주제고, 시대를 초월한 원리며, 보편적 양식이다.”

미국 정부에 의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기도 했지만 추상표현주의는 당시 극단주의적인 미술이었다. 또한 무방비 상태의 무조건적인 행위로 어떤 모험과 좌절도 회피하지 않은 채 그 과정과 행위에 몰두한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모험정신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공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장선화 서울경제 기자 indi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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