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내년 하반기에 이르면 현존하는 100여개 업체 중 단 10% 정도만 살아남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각 기업은 쌍방향 통신서비스, 해외시장 개척 등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각적 전략 및 전술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생사의 기로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운전자들의 필수품
운전자들에게 전국의 도로가 표시된 지도책은 자동차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 딸려오는 이 지도책은 장거리 여행, 출장 등 생소한 지역을 찾아가야 할 때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유일한 도우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도로 옆에 자동차를 주차시켜 놓고 지도책을 뒤적이는 운전자를 발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세상이 됐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첫사랑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희귀하다. 아예 지도책을 갖고 다니지 않는 운전자도 부지기수다.
이렇게 지도책을 퇴출시키고 그 빈자리를 채운 장본인은 바로 내비게이션이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불과 4~5초 내에 가장 가깝고 정확한 길을 찾아 음성으로 알려줘 지도책의 도움을 받을 일이 없어진 것.
게다가 내비게이션은 각종 단속 카메라의 위치와 주유소·음식점·관광지 등 주변 편의시설 정보를 제공하고 지상파 DMB, 영화, MP3까지 즐길 수 있다.
내비게이션 산업은 이 같은 탁월한 편의성과 효용성에 기반, 매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해왔다.
특히 지난 2004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차량의 앞 유리에 부착하는 중저가 포터블 내비게이션 단말기(PND)의 잇단 출현은 본격적인 시장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사용자의 가격 부담이 낮아지면서 고급 승용차의 전유물로 치부됐던 내비게이션이 모든 운전자들을 위한 제품으로 대중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 팅크웨어, 엑스로드 등 관련업체들에 따르면 국내 내비게이션 시장은 지난 2004년 연간 20만대 규모에 불과했지만 PND의 상용화가 본격화된 2005년에는 약 70만대로 25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PND의 약진이 이어져 2006년과 2007년 2년간 300여종 이상의 신규 모델이 출시되며 각각 120만대, 140만대가 판매돼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어갔다.
■ 축제는 끝났다
올 상반기만 해도 이 같은 성장세가 지속될 것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시장 규모는 180만~200만대로 예견됐으며, 오는 2010년에는 국내에서 운행중인 자동차의 50%에 내비게이션이 장착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 수년간 10만~20만원대 저가형 제품과 자동차의 대시보드에 내장하는 매립형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업체들의 시장 진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나 삼성전자, LG전자, SK에너지, TG삼보 등 대기업의 참여가 잇따른 것도 이러한 성장세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 내비게이션 산업은 연초의 예상과는 달리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있다. 미국 발(發)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로 하반기 들어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각 기업들의 채산성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100여개에 이르는 군소업체의 난립, 가격인하를 축으로 하는 출혈경쟁 등 기존 고질병이 더해져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업계 전문가들은 올해 시장 규모가 전년 수준인 140만~150만대에 머물 것이며, 내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점치고 있다.
특히 수익성 악화가 이른 시일 내에 해소되지 않을 경우 내년 중 대다수 업체들이 부도, 폐업, M&A의 칼바람을 맞아 퇴출되고 경쟁력을 갖춘 소수기업 위주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국내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팅크웨어의 박상덕 홍보팀장은 “100여개의 내비게이션 업체 중 올해 신제품을 출시한 곳은 40여개도 안될 만큼 이미 경기침체의 여파가 가시화되고 있다”며 “내년 하반기쯤 업체 간 명암이 갈려 선두기업과 일부 저가모델 메이커만 살아남는 형태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오토넷의 오윤근 과장도 “국내 내비게이션 시장은 상위 5~6개사가 전체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형태”라며 “중소 후발업체 대부분은 수익성 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생사의 기로에 설 공산이 크다”고 밝혔다.
■ 텔레매틱스 기기로의 진화
현재 업계에서 예상하는 최종 생존자는 적게는 5개사, 많게는 10개사 정도다. 전체 중 무려 90%의 업체가 1년 내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퇴출이 예상되는 업체들은 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내비게이션 매출 비중이 높지 않은 몇몇 중견기업들도 사업부 매각을 통해 사업 중단을 선언할 개연성을 배재할 수 없다.
이에 따라 각 기업들은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을 앞두고 작금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전술을 마련, 전사적 차원의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다.
각사가 세운 전략·전술의 핵심은 경쟁력 강화라는 하나의 모토로 귀결된다. 모든 제조업종과 마찬가지로 내비게이션 또한 타사와 차별화된 기술력과 서비스로 고객에게 어필하는 것이 위기 탈출의 첩경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이들은 내년 이후를 대비해 어떤 차별화를 꾀하고 있을까. 차별화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은 쌍방향 통신기술과의 접목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내비게이션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와이브로(WiBro),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 등 초고속 무선통신기술을 적용시켜 내비게이션에 무선 인터넷 접속과 무선 데이터 송수신 능력을 부여하는 것.
이렇게 되면 사용자는 단말기를 차량에서 떼어내 PC와 연결해야하는 불편함 없이 언제 어디서나 전자지도의 업데이트가 가능해진다.
각종 동영상과 MP3 파일의 다운로드, 이메일, 정보검색 등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인터넷TV, 인터넷전화는 물론 집안의 조명과 난방을 원격 제어하는 등 인포테인먼트와 홈오토메이션이 융합된 진정한 텔레매틱스 기기로의 진화를 모색할 수도 있다.
■ 차세대 쌍방향 통신 내비게이션
쌍방향 통신기술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경 KT가 아이머큐리, 아이니츠와 연계해 와이브로 내비게이션 2종(모델명 MD-5000, Kiwi PW300)을 선보인 이후부터다.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지만 최근 메이저급 업체에서도 쌍방향 내비게이션이 경직된 시장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특급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신제품 출시와 기술개발에 나서고 있어 내년을 기해 관련시장의 개화가 진행될 전망이다.
현재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SK네트웍스. SK네트웍스는 무선 인터넷이 차세대 모델의 핵심 기능이 될 것으로 판단, 무선 인터넷 풀 브라우징을 지원하는 신규 모델의 개발을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SK에너지(전자지도), SK텔레콤(와이브로), TU미디어(위성방송콘텐츠) 등 계열사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쌍방향 통신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 허브의 확대에도 매진할 계획이다.
디지털 허브는 SK주유소 내에서 무선 블루투스를 활용, 지도 업데이트와 각종 콘텐츠 다운로드를 무료 제공하는 서비스로 지난 7월 출시한 전용단말기 SM-8082가 5,000여대나 판매되는 등 고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디지털큐브가 내년 이후 출시되는 모든 모델에 무선 인터넷 통신기능을 기본 채택키로 결정했으며, 위치기반서비스(LBS) 전문기업 포인트아이는 모 업체를 통해 자사가 개발한 쌍방향 내비게이션용 소프트웨어 톡톡(TocToc)이 적용된 단말기 출시를 추진 중이다.
이외에도 팅크웨어, 현대오토넷 등의 업체들이 이미 기술개발에 들어갔거나 관련제품 출시를 검토 중에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쌍방향 제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인터넷 사용료 추가 부담과 광역시에 국한된 서비스 지역, 그리고 내비게이션 주 고객이 IT기술에 익숙지 않은 40~50대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 팅크웨어의 한 관계자는 “인프라 미비, 지도와의 비(非) 연동성 때문에 많은 업체들이 출시시기를 확정하지 않고 시장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출시 시점보다는 서비스 품질과 콘텐츠가 쌍방향 모델의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해외 진출 러시
내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업체들의 또 다른 비책은 해외 진출이다. 포화 상태인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하겠다는 것.
먼저 팅크웨어는 지난 2006년말 설립한 독일 현지법인 팅크나비를 구심점으로 세계 최대 내비게이션 시장인 유럽 공략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미 유럽 45개국, 20개 언어를 지원하는 유럽지향형 내비게이션 소프트웨어인 팅크나비 1.7의 개발을 완료했으며 이를 채용한 7인치급 모델 팅크나비 T7을 지난 7월 현지에 출시한바 있다. 팅크웨어는 내년 중 팅크나비 1.7의 업그레이드 버전도 유럽 전 지역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2005년부터 해외시장을 개척, 현재 약 25개국에 제품을 수출 중인 엑스로드는 자사의 전자지도 개발 능력을 발판으로 해외의 높은 문턱을 넘어선다는 복안이다.
이의 일환으로 미국, 일본에 이어 지난 9월 러시아 전자지도를 개발하고 러시아 내비게이션 업계의 선도 기업으로 부상하기 위해 다각적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유럽 전자지도의 구축에도 돌입했으며, 향후 아시아와 중남미 지역의 지도개발에도 나설 방침이다.
디지털큐브의 경우 내년 중순경 내비게이션을 포함한 컨버전스형 단말기 일체를 해외에 런칭하기로 결정하고 해외 소비자들에게 맞춤화된 신규 모델을 설계하고 있다.
이번이 첫 해외 진출인 디지털큐브는 톰톰, 가민 등 글로벌 기업이 장악한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최근 합병한 휴대폰 전문기업 텔슨의 강력한 해외 유통망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특히 오프라인 유통 비중이 높은 해외의 특성에 맞춰 현지 유통사와의 관계를 넓혀나가고 있다.
SK네트웍스는 중국 상해의 스피드메이트 점포 60개소를 활용한 중국 진출을 꾀하고 있다. SK네트웍스는 내년 상반기 중국형 모델을 현지에 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유럽시장 공략을 위한 기초 상품조사와 시장조사도 병행하고 있는 상태다.
이 같은 해외진출 붐과 관련해 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시장과는 다른 해외시장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략해야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분위기에 휩쓸린 무분별한 도전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와 해외의 내비게이션 시장은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디자인과 성능, 장착 형태 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PND와 매립형의 비중이 8:2로 PND가 월등한 강세를 보이는 반면 일본은 이와 정반대로 매립형이 70%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또한 7인치 제품이 대세인 우리와 달리 유럽지역은 아직도 3.5~4인치 모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비자의 요구도 일본은 엔터테인먼트, 유럽은 교통정보, 미국은 응급구조·안전·보안기능을 망라한 텔레매틱스 서비스가 주류를 이루는 등 각기 다르다.
엑스로드 마케팅 팀의 한 관계자는 “내년 시장은 업계구조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안이 매우 불투명한 실정”이라며 “하지만 안정적 제품생산, 지속적인 사후관리, 차별화된 기술력을 제시하는 기업들에게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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