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큰 밑그림은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과학과 비즈니스를 연계, 글로벌 성장거점을 마련한다는 것이지만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핵심 추진 과제인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과 2대의 대형 가속기 건설에서부터 과학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또한 과학과 비즈니스를 연계한다는 개념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제기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섣부른 융합 추진은 두 분야 모두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유치를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경쟁도 심화돼 실현 여부에 대한 회의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태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밑그림
지난해 11월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은 굵직한 과학기술 공약으로 국제비즈니스벨트 조성사업을 제시했다.
이른바 ‘한국판 실리콘 밸리’를 육성하겠다는 것인데, 일부에서는 이를 이명박 정부의 핵심적 과학기술정책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실제 사업 초반에는 상당한 탄력이 붙었다. 대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 국가경쟁력특별위원회 내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태스크포스 팀이 구성될 정도였던 것.
하지만 과학계의 의견이 집약되지 못하면서 이 사업은 한 동안 공중에 뜬 상태가 됐다. 그 만큼 말도 많고 걸림돌 역시 많다는 것.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정부는 지난 9월에야 기획연구에 착수, 내년 2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최종 확정한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밑그림은 대략 이런 것이다. 우선 국제적인 기초과학연구와 교육이 행해지고, 여기에 세계적인 과학자 네트워크를 접목해 초일류 과학지식 창출 및 교류가 이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상된 것이 가칭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ABSI)의 설립이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젊은 인재들을 유치해 지식기반사회의 토대를 구축해 나간다는 것.
또한 기초과학연구의 지식자본이 기업으로 확산돼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창조적 상품과 산업 창출로 일자리를 만들어낸다는 목적도 있다.
여기에는 기술이전협력기구를 통해 지식자본을 기술사업화로 연계, 중소기업 및 벤처기업이 최적의 비즈니스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이는 물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전체적인 밑그림이다. 하지만 과학계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 및 2대의 대형 가속기 건설이 가장 큰 관심일 수밖에 없다.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에 따른 문제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의 대략적인 윤곽은 지난달 18일 서울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기획연구 1차 공청회’에서 나왔다.
기획연구를 담당한 현재호 (주)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 대표에 따르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들어서게 될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은 60만평 이상의 부지에 50개의 연구팀, 즉 3,000명의 연구원이 연구할 수 있는 규모로 조성된다. 이는 KAIST나 포항공대보다 훨씬 큰 것이다.
연구팀은 연간 30억~100억 원을 지원 받아 수학·물리·화학·생물·의생명·융합 등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를 하게 된다.
특히 연구조직은 선진국형 시스템으로 운용된다. 해외전문가를 포함한 연구원 외부 인력이 함께 협력연구를 하고, 구체적인 연구 주제와 연구비 분배는 연구팀 리더에게 권한을 줘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다는 것.
또한 연구 주제의 시의성이 사라지면 연구팀을 없애는 등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게 조직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현재호 대표는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을 일본의 이화학연구소(RIKEN)나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에 비견했다.
어쨌든 정부가 구상하는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을 위해서는 이를 위한 환경 조성이 선행돼야 한다.
기획연구 안(案)은 외국인 전용 임대주택이나 외국어 소통이 가능한 진료기관, 그리고 외국인학교 지원 등 국제적인 정주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미술관, 박물관 등 문화예술시설 건립도 포함돼 있다. 사실 이 같은 청사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송도 신도시처럼 수도권도 아닌 도시에 외국의 고급 연구 인력이 얼마나 매력을 느낄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 자체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과학자도 있다. 김정구 서울대 물리학 교수는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에서 연구하려고 하는 과제들은 이미 국내 연구소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이 많다”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왜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특히 김하석 서울대 대학원장은 지난 10월 20일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주최의 토론회에서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우선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하자는 논의는 수십 년 전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를 설립하자고 했던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물리센터 설립이 지지부진하자 이후 고등과학원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수리과학연구원을 만들었다며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도 이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는 것인 만큼 몇 년 지나면 많은 연구소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목소리를 종합하면 굳이 새로운 연구소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
다시 말해 기존 연구소에 새로운 운영 시스템을 도입하면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형 가속기 건설을 둘러싼 논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건설이 논의돼 온 방사광가속기와 중이온가속기 등 2대의 대형 가속기는 과학자 및 연구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일종의 당근으로 볼 수 있다.
방사광가속기는 기존 광원의 100만배 이상 강한 빛을 만들어내 원자, 분자 수준의 근원적 구조를 규명할 수 있는 장치다.
이미 포항공대에 방사광가속기가 있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방사광가속기의 성능이 월등함은 물론이다. 방사광가속기는 생명과학, 나노테크놀로지와 관련된 물리·소재·반도체학의 핵심적인 장치로 꼽힌다.
중이온가속기는 수소에서부터 우라늄에 이르기까지 모든 원자를 이온 상태로 만들어 전기 에너지로 가속하다 대상 물질에 충돌시켜 물질의 성질을 바꾸는 장치다.
신물질 개발, 동위원소 생성, 방사선치료 연구 등에 활용될 수 있다. 방사광가속기 건설에는 6년간 4,350억 원, 중이온가속기 건설에는 5년간 4,600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과학자들에게 있어 2대의 대형 가속기 건설은 상당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 목을 빼고 기다리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구체적인 논의는 겉돌고 있다. 투자 대비 효율성, 목적과 수단이 조화를 이루는지 여부에 대한 검증 없이 그저 ‘과학이 중요하다’ 식의 당위성을 내세우는 게 고작이라는 얘기다.
실제 지난달 18일 열린 1차 공청회에서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같은 대형 가속기가 있어야 중요한 연구자들이 몰려오는 만큼 우리도 유럽입자물리연구소처럼 국제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는 수준의 이야기만 나왔다.
하지만 건설되기까지 14년, 그리고 100억 달러가 투입된 거대강입자가속기를 모델로 한다면 2대의 대형 가속기 건설은 이번 정부에서 첫 삽을 뜨기도 어렵다.
특히 일부 과학자들은 연구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진짜 긴요한 실험장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금동화 원장은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대형 실험장비가 필수적이지만 왜 하필 가속기여야 하느냐”며 “미래의 연구과제를 환경문제에 맞출 것인지, 아니면 우주의 원리 규명에 맞출 것인지를 먼저 논의한 다음 필요한 실험장비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정구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단순히 남을 따라하는 정도의 가속기를 건설한다면 외국의 과학자나 연구자가 굳이 우리나라에 오겠느냐”고 반문한다.
가속기를 건설하려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거나 적어도 특정 성능에서 외국의 가속기보다 경쟁력이 높아야 여기에서 나오는 연구결과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 제대로 할 것 아니면 안 하니만 못하다는 얘기다.
물론 찬성론도 있다. 백융기 연세대 생명시스템학과 교수는 “4~5년만 지나면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단백질을 대량으로 분석하고 기능을 규명하는 연구가 물밀 듯 밀려올 것”이라면서 “하지만 국내 시설은 그 같이 폭발적 수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즈니스 개념과 입지 둘러싼 갈등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 설립과 2대의 대형 가속기 건설로 문제가 한정된다면 그나마 덜 복잡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비즈니스 개념이 더해지고, 지방자치단체 사이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가열되면서 더욱 꼬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선근 대전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덕특구는 실패한 모델”이라며 “산업계가 주도하는 과학이어야 성공한다”고 강조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 국가경쟁력특별위원회에 참여했었던 손영복 ㈜PLA 고문 역시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아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을 디자인할 때 사업화가 함께 디자인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과학기술을 사업화해서 국부 창출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대덕특구나 산학연 연계를 강조한 클러스터 등 기존 정책 사업과 어떻게 차별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방향제시가 없는 상태다.
이미 인프라가 갖춰진 대덕특구 등을 놔두고 새로운 벨트를 지을 경우 낭비와 부작용도 속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사업의 개념이 구체화되더라도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는 지역 간 유치 경쟁이 바로 그것.
사실상 많은 사람들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대덕특구 및 충북 오송 생명과학단지를 잇는 지역에 입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전 지역에서는 아예 “대전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포항공대 내에 방사광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는 포항의 유치 열기도 뜨겁다. 첨단 방사광가속기가 다른 지역에 지어질 경우 포항에 있는 방사광가속기가 효용을 잃게 될 것이라게 명분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후광을 기대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포항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가속기 건설 입지 선정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대한 안이 모두 확정되는 내년 3월로 예정돼 있다.
하지만 입지와 사업 내용은 동떨어질 수 없는 문제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유치할만한 연구소나 기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부지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건설비용도 큰 차이가 난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추구하는 목표는 일개 도시가 아닌 벨트여서 몇몇 지역을 연결하는 규모의 사업이 돼야 한다.
더구나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안착되면 이후 수도권, 강원권, 호남권 등 광역 경제권마다 분야별 벨트를 구축한다는 목표까지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입지 선정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김현수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도 결국 하나의 신도시인 만큼 무엇보다 건설 비용의 산출이 전제돼야 한다”면서 “토지는 국가가 무상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토지를 수용해야 할 경우라면 건설 비용은 5배 이상으로 늘어난다”고 지적한다.
활용할만한 입지와 관련된 비용을 따져보지 않고 사업계획을 확정짓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장열 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부장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라는 공약은 지난 참여정부에서 각광받은 과학기술 부총리와 혁신본부제도를 깔아뭉갠 새 정권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라면서 “그래서 내용이 급조됐고 선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사업이라는 시각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과학계는 주어진 선물을 그대로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은 분위기다.
물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과 관련된 논의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제대로 정착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5년이라는 대통령 임기보다 몇 배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김희원 한국일보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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