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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에 도사린 연쇄 살인범

뉴워크에 있는 뉴저지 독극물센터의 뒷벽에는 진열장이 놓여있다. 개미 살충제, 부동액, 기타 주의해서 취급해야 하는 내용물을 담은 병이 진열돼 있는 것. 그리고 진열장 위로는 뉴저지 주의 전자지도가 걸려 있다. 전자지도에는 수십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나 있다.

그 점은 지난 24시간 동안 독극물 중독 신고가 들어온 장소다. 전자지도는 10분마다 갱신되는데, 직원들은 인구 밀도를 감안해 다음에는 어디에서 사건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의료 책임자인 스티븐 마커스는 “이 같은 전자화를 통해 예상치 못했던 사건 다발 장소를 미리 알아낼 수 있다”면서 “하지만 이것도 전문가가 수상한 사건 패턴을 알아차리는 능력에 견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실제 마커스는 독물학자들이 뉴저지의 가장 유명한 연쇄 살인범을 잡아낸 일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2003년 6월. 서머빌에 있는 서머셋 메디컬센터의 약사는 독극물센터에 전화를 걸어 방금 어떤 환자가 심부전 치료제인 디곡신 과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신고를 했다.

그 환자는 심장병 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 때문에 약사는 환자가 마신 한국식 영지버섯 차에 식물성 디곡신이 들어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한 것이다. 독극물센터 직원은 그 가능성을 배제했다.

하지만 잠시 후 서머셋 메디컬센터에서 또 다른 사람이 약물 과용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마커스의 회상이다. “그 때 우린 이런 말을 했어요. ‘대체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또 다른 약물 과용사건 들은 적 있나?’” 메디컬센터의 약사는 집중치료실(ICU)에서
예전에도 두 건의 인슐린 과용 사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집중치료실이란 일반적인 의료설비로는 관리할 수 없는 중증환자나 대수술을 받은 환자를 집중 치료하기 위한 곳이다. 약사는 인슐린 과용 사고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경찰에 알리라고 했어요. 병원 직원 속에 아마도 살인자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후로도 4개월 동안 5명의 환자가 의문사를 당했다. 그때서야 병원 당국은 찰스 쿨렌이라는 간호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쿨렌은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 병원에서 29명의 환자를 살해한 혐의가 드러나 유죄를 선고받았다.

로스앤젤리스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소속 법의학 간호사인 베아트리체 요커는 “불행하게도 찰스 쿨렌에게서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말한다. 요커와 동료들은 지난 1970년부터 2006년 사이 환자를 대상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른 의료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전체 기소 건수 90건 중 36건은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2,000명 이상의 살인과 관련된 54건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인디애나-퍼듀 대학의 범죄학자 케나 퀴넷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 해 동안 의료인들이 저지르는 연쇄살인의 희생자 수는 500~1,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퀴넷은 16년 동안이나 연쇄살인을 저지른 쿨렌 외에도 오랫동안 연쇄살인을 저지른 살인마로 마이클 스왱고를 꼽았다. 미국 내과 의사이던 그는 약 60명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데, 그 중 3건에 대해 지난 2000년 유죄 선고를 받았다.



디세일즈 대학의 법의학 심리학자이자 ‘의료계 연쇄 살인범의 마음 속’이라는 책의 저자인 캐서린 램스랜드는 이들 살인마들이 안락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 ‘검은 천사’는 그저 자신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녀는 “쿨렌이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의 살인 빈도는 분명히 높아졌다”면서 “다른 연쇄 살인범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살인을 통해 힘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쿨렌은 여러 병원에서 해고당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그는 인근의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쿨렌이 체포당했을 때 그의 사례는 관련 제도의 개선을 촉구하는 여론을 촉발시켰다. 병원이 주립의료위원회에 소속 의료인에 대한 징계 내용을 보고토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뉴저지 주 의회를 통과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주 상원의원인 존 코진(현 주지사)과 프랭크 로텐버그는 미국 보건청에 편지를 보내 이 같은 징계 정보가 의료인 자료은행에 제출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병원협회는 환자의 안전을 더욱 철저히 지키기 위한 지침 마련을 위해 대책본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후에도 이 대책본부는 어떤 지침도 내놓지 않고 있다. 미국 보건청 역시 계획은 세웠지만 실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병원 또는 환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양한 제안이 나왔다.

그 중에는 직원 수에 비해 너무 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병원을 알려주는 ‘사망 레이더’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치사율 높은 약품의 취급을 엄격히 관리하는 것 등이 있다. 하지만 요커는 잘 교육된 직원이야말로 가장 좋은 안전망이라고 말한다.

요커는 법의학 간호사들을 가르칠 때 현대의 병원도 범죄 현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퀴넷은 “연쇄살인범 중에는 담당 환자가 잘 죽어나가는 바람에 ‘닥터 킬러’라는 별명이 붙은 의사들도 많다”면서 “하지만 다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근무 시간에 이상하게 사람들이 잘 죽는 어떤 의사가 자신을 장난스럽게 ‘저승사자’라고 칭하는 것도 범행을 숨기기 위한 잔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검은 천사가 도사리고 있는 병원에 갈 때는 어떤 방법으로 내 몸을 지켜야 할까. 마커스는 이렇게 말한다.

“편집증 환자처럼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 내게 약을 먹으라고 하면 그 약의 이름과 용도를 꼭 확인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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