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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살균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

[MEDICINE] THE NEXT PHAGE

항생제가 듣지 않는 박테리아 감염은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살균(殺菌) 바이러스로 막으면 된다. 동유럽 의사들은 오래 전부터 실험실에서 배양한 살균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로 수백만 명을 치료해 왔다.

박테리오파지는 지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바이러스 중 하나. 한 방울의 물속에도 5,000만 마리나 살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1940년대 페니실린이 대중화되면서 박테리오파지 요법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하지만 지금 의사들은 다시금 박테리오파지를 찾고 있다.

박테리아 VS 바이러스

박테리아는 단세포 단위로 활동하는 미생물을 총칭하는 말이다. 우 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세균(細菌)이 곧 박테리아다. 핵막,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하등 생물이지만 일정한 환경만 주어지면 복제를 통해 번식을 한다. 음식 물을 발효시키거나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긍정적 역할도 하지만 문 제는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 물론 하나이기는 하지만 세포로 돼 있기 때문에 항생제로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항생 제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바이러스는 DNA나 RNA 같은 유전자, 그리고 단백질로만 구성 돼 있다. 생명체로서의 최소 요건은 갖추고 있지만 이를 생명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생화학 물질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이어 지고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세포를 숙주로 한다는 점에서 병원성 박테 리아를 죽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의 크기는 박테리아의 500~600분의 1 정도. 박테리아가 수박이라면 바이러스는 좁쌀만 하다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유전자를 숙주세포에 침투시켜 복제시 킨다. 물론 이 같은 바이러스의 복제 과정에서 숙주세포는 괴멸하게 된다.

살균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

텍사스 주 루보크에 사는 로이 브릴론의 넓적다리에 거미가 문 것 같 은 붉은 반점이 처음 생겼을 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 만 박테리아 감염에 의한 반점은 여러 주가 흐르면서 점점 커졌다. 2004년 12월이 되자 이 반점은 거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악화됐다.

브릴론의 치료를 맡은 랜디 월코트는 박테리아 감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항생제는 모두 사용해 봤다. 하지만 브릴론의 병변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은퇴한 건물 페인트공인 62세의 브릴론은 그 것 때문에 사다리도 올라갈 수 없어 일도 할 수 없게 됐다. 마치 박테리아가 브릴론의 몸을 안으로부터 파먹는 것 같았다. 사실은 실제로도 그랬다. 연쇄상구균이나 포도상구균 같은 박테리 아는 살기 위해 연한 인체조직을 먹어치운다. 따라서 붉은 반점 테 두리가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는 것이다. 상처의 고통이 너무 심해 모 르핀을 처방해야 할 정도였다.

브릴론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 모르핀 두 알을 먹으라는 처방 을 받았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침에 세알, 낮에 세알을 먹어야 했 어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를 갈아야 할 정도였 죠.” 루보크 남서부에 있는 환부치료센터의 센터장 월코트는 브릴론 처럼 항생제에 내성을 보이는 박테리아 감염 환자들의 전형적인 예 후를 잘 알고 있다. 바로 괴저였다. 괴저란 몸의 한 부분이 썩어 생리 적 기능을 잃게 되는 병인데, 이런 경우 사지를 잘라야 한다. 미국에 서는 매년 10만 명이 이 같은 괴저로 목숨을 잃고 있다.

“괴저는 불치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상처를 도 려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야만적인 방법이지요.” 월코트의 말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대안을 찾았다. 환부치료센터의 클리닉에서 하 루 10시간의 근무를 마친 후에도 밤늦게까지 의학지를 뒤져가며 최 신 치료방법을 찾았다. 이 지독한 박테리아 감염을 치료할 방법이라 면 무엇이라도 찾아내기 위해서다.

3주 후 브릴론이 후속 치료를 받기 위해 클리닉을 찾았을 때 월코 트는 한 손에 점적기(dropper), 그리고 또 한 손에는 물 약병을 들고 나타났다. 물 약병에는 수상한 연못물 같은 용액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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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물 약병 속에 든 용액이 월코트가 찾아낸 대안이었다.

이 짙은 색 용액에는 박 테리아를 죽이는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가 들어 있었다. 박테리오파지는 지난 1915년 영국의 프 레데릭 트워트, 그리고 1917년 프랑스의 펠 릭스 데렐이 각각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데 렐이 박테리오파지라는 용어를 도입했는데, 이는 ‘박테리아를 잡아먹는 것’이라는 의미 를 갖고 있다.

즉 이 바이러스가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월코트는 치료에 들어가기 전 치료내용 을 설명해 주었다. 동유럽의 의사들은 1920 년대부터 박테리오파지를 사용해 연쇄상구 균과 결핵은 물론 브릴론의 상처 같이 기존 항생제로는 듣지 않는 박테리아 감염을 치료 해 왔다는 것. 사실 미국의 제약회사에서도 1940년대 초반까지는 박테리오파지 요법에 필요한 약 을 팔았다.

하지만 사용이 간편하고, 효과가 뛰어나며, 게다가 돈도 많이 벌어다주는 항생제 페니실린이 등장하면서 박테리오파지 요법 은 종적을 감추게 됐다. 물론 박테리오파지 요법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월코트는 경고했 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는 인체에 해가 없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이 었다. 브릴론을 납득시키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미 국 식품의약국(FDA)의 입장은 달랐다. FDA는 1963년부터 미국에서 팔리는 모든 의약품에 엄격한 인증 절차를 적용해왔다.

따라서 월코트는 다른 방법이 듣지 않는 환자에 게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텍사스 주의 규 제위원회에 신청했다. 그리고는 그루지야에 문의해 박테리오파지를 구입했다. 현재 미국의 약국에서는 이를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루지야에서 박테리오파지는 안약만큼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의약품이다. 그는 수백 종류의 박테리오파지가 든 물 약병을 개당 2 달러씩 주고 3개를 샀다.

월코트가 환부에 노란 용액을 몇 방울 떨어뜨리자 브릴론이 물었다. “그게 뭐죠?” 용액이 환부에 닿았지만 통증 같은 것은 없었다. 처음 며칠간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브릴론은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1주일 이 지나자 염증이 점점 가시면서 뻘겋던 살색이 분홍색으로 누그러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강한 피부가 생겨나면서 염증이 매일같이 줄어들었다. 결국 3주일도 못돼 환부는 완치됐다. 브릴론은 월코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그랬 어요. 누가 이 사실을 믿겠어요.”

돌연변이 위험에 따른 규제

브릴론의 치료 상황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 다. 월코트는 최악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 10명에게도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처방했고, 그 중 상당수가 완치됐다. 박테리오파지가 이들에게 효과가 있다면 항생제가 듣지 않는 수 백만 명의 미국 박테리아 감염환자들에게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 고 월코트는 생각했다. 그의 환자들이 훌륭하게 완치됐으니까 말이 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과연 FDA를 납득시킬 수 있느냐 하 는 것.

박테리오파지는 비교적 인체에 무해한 편이다. 이들은 지구에 사 는 생명체 중 가장 흔한 축에 속한다. 흙, 음료수, 하수도 등 어디에 서나 볼 수 있다. 인체 내에도 수십억 마리나 살고 있다. 하지만 인체 세포는 공격하지 않으며, 오직 박테리아만 공격한다.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시급히 도입해야 합니다. 확실히 효능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완벽히 자연의 이치에 맞는 치료법입니다.”

또한 한 사람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 다니지도 않는 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박테리아의 면역력을 무력화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 박테리아가 박테리오파지에 대해 면역력을 확보하려 고 하면 오히려 화를 당한다는 것이다. 박테리오파지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숙주가 되는 박테리아를 효 과적으로 죽일 수 있도록 상대방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한다.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항생제에 내성을 쌓는 박테리아의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박테리아를 잡기 위해 더욱 강력한 신약을 개 발할 필요성도 없앤다. 하지만 다분히 역설적인 문제가 있다. 박테리오파지는 상황에 맞 게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는 능력 때문에 유용한데, 바로 이 점 때문 에 미국의 규제 당국은 박테리오파지를 쉽사리 승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박테리오파지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체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보고는 없었다. 하지만 인체 내에 정상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박테리 오파지가 다른 박테리오파지와 유전자를 교환해 외래 단백질을 생 산, 전혀 새로운 종으로 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FDA의 대변인 카렌 릴리는 인간 치료용으로 사용되는 박테리오파지를 생물학 제품으로 분류해 규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바이러스가 임상실험에서 심각한 돌연변이나 변화를 일으킨다 면 환자에게 아무 해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실험은 중지돼야 한다는 뜻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캘리포니아 대학의 미생물학자 폴 술람 은 바이러스가 다른 바이러스와 유전자를 교환했을 때 어떤 방식으 로 돌연변이가 일어날 지 장담할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대형 제약회사들은 박테리오파지 약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술람은 이렇게 말한다. “FDA의 입장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박테리오파지는 큰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죠. 바이러스가 유 전 소재를 교환할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됩니다.”







인스턴트식품에 분사되는 박테리오파지는 식품첨가물로 분류된다. 하지만 환자에게 투여하는 박테리오파지는 의약품으로 분류돼 FDA의 규제를 받는다.

박테리오파지 연구의 본산



FDA의 입장에서 보면 월코트가 환자의 다 리에 투여한 용액은 증명되지 않은 새로운 약품이었다. 하지만 그루지야에 있는 박테 리오파지 연구소 게오르그 엘리아바의 과학 자들에게는 마치 아스피린과도 같이 믿음직 한 것이다. 이 연구소가 설립된 1923년 이래 과학자들 은 수백 만 명의 환자들을 박테리오파지 요법 으로 완치시켰으며, 임상에서의 효과를 입증 하는 100편 이상의 연구논문 초록을 국제학회 에 제출했다. 월코트는 게오르그 엘리아바를 박테리오 파지 연구의 본산으로 칭했다.

항생제가 듣지 않는 박테리아 감염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의 성지나 다름이 없다 는 얘기다. 하지만 이곳은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갈만한 곳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월코트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이곳 의 4층 건물은 방치된 정신병자 요양소에 더 가까워 보였다. 벽에는 페인트가 칠해져 있지 않았고, 방은 어두웠으며, 장비는 박물관에서 가져온 것 같았다.

월코트는 “연구소의 상태는 더 이상 안 좋을 수 없 었다”면서 “하지만 과학의 힘은 놀라웠다”고 말했다. 월코트는 5일간 이곳의 연구원들을 따라다니며 박테리오파지 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연구소에는 대형 냄비처럼 생 긴 3m 높이의 발효조가 있었는데 그 것으로 매년 수백만 번 사용할 수 있는 양의 박테리오파지를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황량한 실내장식을 제외하고 월코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환 자의 상태에 맞는 맞춤형 처방을 위해 지극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 었다. 박테리아의 종류에 따라 사용하는 박테리오파지도 달라야 한 다.

일부 환부에는 수백 가지의 박테리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의 사들은 우선 환부의 조직 샘플을 배양해 어떤 박테리아가 있는지 조 사한다. 그 다음에는 연구소에 있는 수천 종류의 박테리오파지 중 환부에 맞는 박테리오파지를 골라내 섞은 다음 배양한다. 이 과정에는 최대 4일이 걸린다. 그리고 치료는 환부에 직접 박테리오파지 용액을 바 르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루 24시간씩 2주면 끝난다. 이런 과정은 얼핏 불편해보이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환자는 거의 없다. 결과가 매우 놀랍기 때문이다.

월코트의 말이다. “귀에 만성 염 증을 앓고 있던 여자가 마지막 선택으로 박테리오파지 클리닉에 찾 아왔어요.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받자마자 1주도 못돼 그 여자는 완 치됐습니다.” 실제 게오르그 엘리아바 연구소와 기타 동유럽 국가들의 실험결 과를 토대로 지난 수십 년간 발표된 연구논문에 따르면 박테리오파 지 요법이 황색 포도상구균이나 대장균 등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박 테리아를 상대로 80~90%의 성공률을 보였다. 반면 항생제는 이 같은 병원성 박테리아들이 진화했을 때 효능 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난 2005년 6월 일선에서 쓰이는 항생제 이 미페넴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가 뉴욕 시립병원의 환자 50명 이상 을 감염시켰다.

혈액을 통해 침투한 이 박테리아는 감염자 중 47% 를 죽였다. 이처럼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이 날로 높아만 가고 있는 상황에 서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이제 더 이상 동유럽 연구자들만의 전유물 이 될 수는 없었다. 실제 영국의 생명공학회사 바이오컨트롤은 지난해 박테리오파지의 최초 제2단계 임상실험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실험에 쓰인 박테리오파지는 폐와 귀를 심각하게 감염시키고 항생제 내성 까지 높은 녹농균을 막아냈다.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에 감염된 환자들 가운데 박테리 오파지 요법을 받은 사람은 증상이 50%나 감소된 것. 반면 박테리오 파지 요법을 받지 않은 환자의 경우 증상의 20%만 개선되는데 그쳤 다. 이 같은 바이오컨트롤의 실험결과를 본 메릴랜드 대학의 생화학 자 댄 넬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매년 치료할 수 없는 박테리아 감염으로 수백 명의 환자가 죽는 것을 보았던 월코트는 이 같은 유용한 바이러스를 미국에서도 빨리 구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시급히 도입해야 합 니다.

확실히 효능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완벽히 자연의 이치에 맞 는 치료법입니다. 아이들의 목구멍에 박테리오파지를 뿌리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규제를 피한 우회적 이용

사실대로 말하자면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이미 미국에서도 쓰이고 있다. 당국의 규제로 식품 제조업자들은 델리미트나 콜소 같은 인 스턴트식품이 박테리아로 오염되지 않도록 박테리오파지를 쓰고 있는 것. 하지만 의사들은 심한 연쇄상구균 감염을 일으킨 환자에게 박테 리오파지 요법을 처방할 수 없다. FDA의 규제 때문이다. 한마디로 용도가 다르다는 것. 인스턴트식품에 분사되는 박테리오파지는 식품첨가물로 분류된다. 하지 만 환자에게 투여하는 박테리오파지는 의약품 으로 분류되는 것. 지난 2006년 생명공학 기업인 인트라리틱 스는 식품첨가물에 대한 FDA의 규제가 느슨한 점을 이용, 식중독 원인균인 리스테리아 박테 리아를 죽이는 박테리오파지 스프레이의 판매 승인을 얻어냈다. 이 회사는 인체에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박테리오파지 치료법도 개발 중인 데, 그 중 한 가지는 월코트 덕분에 임상실험까 지 실시하게 됐다. 월코트는 유럽에서 돌아온 지 3개월이 지나 텍사스에서 열린 박테리오파 지 학회에서 인트라리틱스의 최고경영자 존 바 자나를 만났다.

두 사람은 박테리오파지 요법의 후진국인 미국 실정에 대해 여러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 누었다. 학회가 마무리될 쯤 이들은 FDA가 박 테리오파지의 임상실험을 허가하게 할 계획을 생각해냈다. 인트라리틱스가 박테리오파지를 공급하고, 월코트는 환자을 임상실험에 투입하 는 것. FDA는 결국 임상실험을 허가했다. 단 인트라리틱스가 충분한 사 전연구를 끝낸 8종류의 박테리오파지에 한해서였다. 월코트는 신속히 정맥성 하퇴궤양을 앓고 있는 39명의 환자를 선 발했다. 정맥성 하퇴궤양이란 다리정맥에 피가 몰리기만 하고 잘 돌 지 않아 정강이 아래나 안쪽의 피부가 헐며 패어들어 가는 것. 이 경 우에는 박테리아 감염을 막아야 궤양 면을 아물게 할 수 있다. 월코트는 2년간의 임상실험에 착수했는데, 이는 미국에서 실시 된 최초의 박테리오파지 임상실험이었다. 매주 환자들은 클리닉에 와서 휴대형 초음파기기를 통해 박테리 오파지 치료를 받았다. 휴대형 초음파기기는 동유럽에서 박테리오 파지 요법에 쓰던 수액 백(IV bag)의 최첨단 버전이다.

이 초음파기 기는 식염수에 탄 박테리오파지를 살포하는 동시에 죽어 검게 변한 조직을 제거, 박테리오파지가 환부 깊숙이 침투하게 한다. 다른 초기 임상실험과 마찬가지로 월코트의 임상실험 역시 뛰어 난 효능 대신 안전성을 먼저 평가받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 임상실험은 박테리오파지 요법의 장래에 청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 임상실험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 환자는 한 명도 없었 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의 효능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24주간의 제1단계 임상실험이 종료됐을 때 현저한 치료효과를 본 사람은 약 70% 정도였다. 이는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받지 않은 환자들의 치료율과 거의 비슷했다. 월코트도 이 같은 사태를 예상하 고 있었다. 그는 그루지야에서와는 달리 환자들의 상태에 딱 맞는 박

테리오파지를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효능이 떨어진 것이라고 설명 했다.

월코트는 여기서 벽에 부딪쳤다. FDA 직원들은 환자들에게 박 테리오파지를 사용하려면 박테리오파지를 종류별로 하나하나, 또는 박테리오파지의 혼합물을 일일이 따로따로 임상실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별개의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실험해 승인받을 때와 마 찬가지인 셈이다. 하지만 환자의 환부에는 서로 다른 수백 종류의 박테리아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런 경우를 일일이 다 맞춰 박테리오파지 혼합 물을 만들었다가는 수백만 달러의 임상실험 비용을 들여야 한다. 에버그린 주립대학의 박테리오파지 연구자인 베티 커터는 “미국 과 유럽이 박테리오파지를 보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살 일”이라며 “미국의 잘못된 규제 때문에 환자들이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제2단계 효능실험에서는 900만 달러를 들여 100~200명의 환자 에게 실험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서 몇 안 되는 종류의 박테 리오파지만을 실험한다면 제1단계 임상실험에서와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실험에 사용된 박테리오파지로는 막을 수 없 는 훨씬 다양한 종류의 박테리아에 감염된 환자들을 치료할 길이 막 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규제에 맞춰 실험을 하려면 바자나 가 가진 돈을 모두 실험비용으로 털어 넣어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텍사스에 있는 테그 대학 보건과학센터의 벤 버로우즈 같 은 박테리오파지 연구자들은 훨씬 긍정적이다. 언젠가는 기업에서 박테리오파지 생산을 시작할 것이며, 그 중 몇 가지가 인증을 받게 되면 FDA도 결국 규제를 완화하게 될 것이라 는 얘기다.

박테리오파지의 효소 이용

록펠러 대학의 생물학자 빈센트 피셰티는 숨을 고를 틈이 없었다. 그 는 현재의 건강관리체계에 항(抗) 박테리아 약품으로 막을 수 없는 큰 구멍이 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가 그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 고는 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지지하는 월코트 와 그의 동료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평화 중재자로 보였다. 이들의 의도는 좋지만 결과가 좋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 그는 록펠러 대학 맨해튼 캠퍼스가 굽어보이는 건물 6층의 연구 실을 안내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연 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박테리오파지에 기반한 요법을 연구하고 있 습니다.” 생물학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셰티에게 이는 중요한 차이다. 월코트는 박테리오파지 자 체를 박테리아와 싸우는 주요 무기로 보는데 반해 피셰티는 박테리 오파지를 더 나은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매개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규제 당국과 부 딪혀 고전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박테리오파지의 돌연변이 위험성 이 미국 제약회사의 투자를 이끌어내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상태라면 박테리오파지 요법의 비용만 엄청나게 상승할 뿐 이라는 것. 그래서 그는 대안을 연구 중이다.

대안이란 박테리오파지를 정제 해 리신(lysin)이라는 효소를 얻는 것이다. 리신은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분해해 죽이는 물질, 즉 용해 효소다. 그는 연구원들을 시켜 박테리아를 죽이 는 바이러스가 있는 곳이라면 늪이나 강 등 어 디라도 가서 채집하게 했다. 그는 박쥐가 싼 창틀의 똥까지 비닐 백에 보관해 박테리오파지를 추출하려고 했다. 리신이 박테리오파지의 유효성분임을 관찰한 피셰티는 박테리 오파지에서 리신을 추출, 안정적인 항 박테리아 약품을 만들려 하고 있다.

성공한다면 박테리오파지의 항 박테리아 효과를 이용해 환자들 의 병을 고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월코트가 맞서 싸우는 비합리적 규제도 피해갈 수 있게 된다. 이전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올 수 있는 것. 박테리아의 진화에 맞서려면 박테리오파지도 스스로를 변화시켜 야 한다. 하지만 리신은 한 번에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 는 물질이다. 이 때문에 그루지야의 과학자들이 가진 수천 종류의 박 테리오파지 혼합물에 대해 일일이 FDA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하지만 FDA에서 리신을 박테리 오파지보다 선호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리신은 연쇄상구 균이나 포도상구균 같은 그람양성 인 박테리아에만 효과가 있고, 대장 균이나 살모넬라균 같은 그람음성 박 테리아의 외벽은 파괴할 수 없다. 그람양성 박테리아는 그람염색법에 의 해 자주색으로 변하는 박테리아를 말하는데, 약제에 예민하고 독소는 가열하면 쉽게 파괴된다. 그 람음성 박테리아는 그람염색법에 의해 적색으로 변하는 박테리아로 내성이 강하며, 독소를 가열해도 파괴가 어렵다. 리신의 이 같은 한계는 두 종류의 박테리아에 모두 대응할 수 있 는 박테리오파지에 비교된다. 더구나 박테리오파지 요법과는 달리 리신은 아직 임상실험도 거치지 않았다. 배양접시 상에서 아무리 좋 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병원에서까지 좋은 결과를 도출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맞춤형 박테리오파지 혼합물

FDA가 의약품 승인 절차를 바꾸지 않는 한 미국 내에서 박테리오파 지 요법은 널리 보급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루보크에 사는 로이 브릴론의 상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월코트가 그루지야에서 사온 박테리오파지로 그의 다리 상처를 낫게는 했지만 브릴론은 다리정맥의 혈액 흐름을 조절하는 판막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계속 그런 상처가 생길 것이다. 환부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정맥혈이 역류하면 다리 어디에선가 다시 터질 수 있다는 것. 월코트에 따르면 브릴론에게 필요한 것은 환부에 집락을 이루고 있는 박테리아에 딱 맞게 만들어진 맞춤형 박테리오파지 혼합물이 다. 집락이란 박테리아의 번식으로 인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커진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항생제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박 테리아가 항생제에 내성이 없는 경우에는 유효하다. 하지만 항생제 에 내성이 있는 박테리아라면 환부가 사슴 눈 만하게 부어오른다. 브 릴론은 마치 화상 환자처럼 다리를 붕대로 꽁꽁 동여매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붕대가 느슨해지면 다리가 부어오르고, 예전 같은 상처가 또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장애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이 고통 을 해결하고 인근에 사는 손자 4명과 낚시도 하고 놀러 다니기를 바 란다. 그리고 그것을 해줄 사람은 월코트와 그의 박테리오파지 요법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월코트는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기에 힘든 것이 지요. 하지만 그는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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