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13개 연구기관은 기초과학을 다룬다는 이유로 교육과학기술부, 나머지 13개 연구기관은 돈 버는 기술을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지식경제부에 편재돼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이끌어 온 연구기관들은 이처럼 뿔뿔이 흩어져 주무부처의 변방에 머물고 있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는 위기국면에 처한 연구기관들의 확실한 자리매김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을 가다’라는 시리즈를 마련, 운영해 오고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이끌어가는 연구기관들의 목표, 전략, 활동, 그리고 성과를 알려 과학기술 입국의 꿈과 취지를 되살리고자 한다.
-편집자 註
수출 대한민국 뒷받침하는 든든한 후원군
암행어사의 상징은 마패다. 하지만 암행어사는 역마 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인 마패 외에도 몇 가지 상징을 더 가지고 있다. 바로 놋쇠로 만든 자(尺)인 유척(鍮尺)이다.
유척은 조선시대 도량형 제도상 척도의 표준. 지방 수령이 전정, 군정, 환곡 등을 규정대로 관리하는지 살필 때 사용한 것이다. 즉 군포를 받을 때 다른 자를 이용해 백성을 속이는지 살펴보는데 이용한 것.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마패보다 훨씬 중요한 암행어사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사실 국가가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암행어사에 게 유척을 내린 것은 그만큼 측정표준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공정한 측정표준이야말로 사회정의를 재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특히 측정표준은 산업발전에도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자동차 수출을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는 엄청난 정밀도를 요구하는 기계 산업의 꽃이다. 수만 개의 부품 들이 정밀하면서도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자동차의 성능이나 안전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정밀도는 바로 한 나라의 측정표준 능력에서 비롯된다. 최근 환경오염에 대한 선진 각국의 규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어느 정도의 오염물질이 포함돼 있느냐가 수출을 좌우한다. 그런데 수출국의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수치를 수입국에서 믿지 못한다면 수입국은 자기 나라, 또는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의 계측기로 다시 측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동차를 수출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이 늘어나고, 이는 곧 가격의 상승과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한 나라의 측정표준 능력은 수출을 확대하느냐, 감소시키느냐의 핵심적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측정표준 능력은 경제발전의 토대며, 한 나라의 과학 기술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지난 1975년 설립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한마디로 수출 대한민국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후원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얼핏 듣기에 표준측정이라는 말은 쉬워 보인다. 한 나라의 측정표준기관에서 표준을 지정해 통용시키고, 이에 따라 측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세계 각국의 측정표준기관들은 길이·시 간·힘·질량·광도 등 각종 분야의 표준을 측정하고, 그 결과물을 상호 비교한다.
예를 들어 측정표준 분야에서 1m의 거리는 빛이 진공상태에서 2억9,979 만2,458분의 1초만큼 진행한 길이를 말한다. 세계 각국의 측정표준기관들은 연구개발을 통해 이 같은 1m 의 길이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같은 능력을 가진 측정표준기관들은 서로의 측정치를 비교해 누가 더 정밀하게 측정했는지 비교하고, 오차율이 적은 측정표준기관들끼리는 측정 능력에 대해 상호 인증을 하게 된다. 이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수년 전 국내 굴지의 한 조선업체는 해저유전을 시추하는 대형 해상플랜트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일반적으로 해상플랜트 건설에 사용되는 측정 장비는 단순히 강판의 두께를 측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용접부위를 측정하는 비파괴 검사장비 등 첨단 측정 장비들이 사용된다.
하지만 발주사로부터 해상플랜트 건설에 사용되는 각종 측정 장비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내 조선업체가 사용하는 측정 장비의 신뢰성이 국제 측정표준기관이 인증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 즉 측정 장비 자체에 결함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측정표준기관의 인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
국내 조선업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국립표준연구소(NIST)에 측정 장비를 모두 보내 인증을 받아야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NIST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증과정에 최소 2개 월 이상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는 해상플랜트 설비의 인도기일이 지연돼 수백억 원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내 조선업체는 표준과학연구원에 지원을 요청했고, 표준과학연구원은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해 냈다. 이는 표준과학연구원이 국제도량형위원회(CIPM)의 회원기관일 뿐만 아니라 NIST 와는 표준측정에 대한 상호인증 계약이 체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즉 표준과학연구원이 측정 장비에 대해 적정하다는 평가를 내리면 NIST도 동일한 인정을 해 준다는 것.
결국 국내 조선업체는 표준과학연구원을 통해 해상플랜트 건설에 사용되는 각종 측정 장비의 인증을 받아 인도기일 지연에 따른 위약금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6위권의 표준측정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데, 이를 오는 2020년까지 5위권으로 끌어올 리는게 표준과학연구원의 목표다.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표준측정 분야에는 물리학·수학·화학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첨단을 달려야만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더욱이 미국·영국·일본 등 선진국 측정표준기관들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기초과학 분야의 탄탄한 업적을 토대로 측정표준 능력을 쌓아놓은 상태다.
34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표준 과학연구원으로써는 말 그대로 압축 성장을 한 셈이다. 사실 표준과학연구원은 측정표준 기술을 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서 파생된 기술을 응용하는 연구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나노미터 단위의 물질 을 측정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그만한 정밀도의 부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100% 국내 기술로 개발한 대한민국 표준시계 ‘KRISS-1’은 기존의 세슘원자시계보다 10배 이상 정밀도가 향상된 것으로 국내의 표준시는 물론 국제 표준시를 생성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또한 지난해 표준 과학연구원의 대표적 기술이전 성과가 된 촉각센서를 이용한 휴대폰용 마우스 및 터치스크린 기술도 힘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센서기술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CARS 레이저 현미경 기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일반적으로 레이저 현미경은 살아있는 세포를 관찰할 수 있지만 형광물질의 투여가 필요하고 지속적인 관찰이 어렵다. 반면 CARS 레이저 현미경 기술을 이용 하면 형광물질 투여 없이 살아 있는 세포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이 기술은 살아있는 세포를 이용하는 새로운 세포기반 신약을 개발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처럼 표준과학연구원이 수행하고 있는 연구는 측정표준 기술의 개발에서부터 관련 기술의 응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표준과학연구원은 전국의 26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대상으로 매년 평가하는 연구 성과 평가에서 지난해까지 9년 동안 줄곧 우수등급을 받았다. 이는 본연의 측정표준 연구를 기초로 해 다양한 응용기술을 연구하는 기초체력이 튼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덕=강재윤기자 hama9806@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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