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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 속에 숨겨진 일상생활 속의 과학기술

과학기술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탄생시켰다. 각종 가전제품, 항공기, 컴퓨터, 휴대폰 등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이처럼 문명의 이기들에만 구현돼 있지 않다.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셔츠, 젓가락, 방문 등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에도 숨어 있다. 생각해보자. 왜 셔츠의 단추는 항상 오른쪽, 단추 구멍은 왼쪽에 있을까. 이것이 과학적 사고와 분석의 결과라면 믿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우주항공, 생명공학, 정보기술(IT) 등 전문적 산업과 그 산업의 제품을 떠올린다. 반면 과학기술이 적용돼 있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용품을 연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항공기, 우주선, 컴퓨터는 누구나 과학기술의 산물로 인정해도 볼펜, 스테이플러, 젓가락을 놓고 과학기술을 논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볼펜은 중력의 원리를 적용해 펜 끝에서 잉크가 나오도록 설계돼 있으며, 스테이플러는 시소·손톱깎이·가위·병따개 와 마찬가지로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지레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젓가락의 경우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게 돼 있는데, 이는 무게중심을 뒤쪽으로 놓이도록 해 작은 힘으로도 젓가락질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젓가락 끝부분에 줄무늬 모양의 홈을 파 놓은 것은 음식물과의 마찰력을 높여 손쉽게 음식을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들의 개발자를 과학자라고 칭하기는 어렵더라도 과학기술의 원리에 대한 이해와 고민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개발되지 못했을 제품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첨단제품뿐만 아니라 생활 주변의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에도 숨쉬고 있다. 옷을 입거나 밥을 먹고 방문을 여는 등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조차 우리는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 단지 이들이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과학기술적 가치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일상성은 그만큼 우리의 삶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친근 성과도 일맥상통한다. 활용 빈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항공기가 없는 세상보다 손톱깎이가 없는 세상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가정과 회사, 길거리에서 만나는 일상적 제품 속에는 어떠한 과학기술적 원리들이 숨겨져 있으며 이들로 인해 우리는 어떤 이로움을 누리고 있을까.

가전제품에 녹아든 과학기술의 원리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과학기술들의 대부분은 가전제품에 의해서다. 가전제품은 종류를 불문하고 고도의 이론에 기반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전자레인지는 극초단파의 물 분자 진동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 분자와 동일한 진동수를 가진 극초단파를 음식물에 발사하면 음식에 함유된 물 분자가 공명을 일으켜 진동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열이 발생하는 것.

전자레인지가 오븐처럼 직접 열에너지를 가하지 않고도 음식을 데울 수 있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 단지 전자레인지는 작동 원리가 물 분자의 진동에 있기 때문에 수분이 전혀 없는 음식은 요리할 수 없다.

대표적 백색가전인 냉장고는 액체를 기체로 기화시킬 때 주변의 열을 흡수하는 흡열반응에 의해 냉각효과를 얻는다. 이 흡열 반응의 유도물질, 즉 냉매로 부탄, 이소부탄 등이 쓰이며 이들이 배관 속을 지나면서 냉장고 내부의 열기를 빼앗는다.

특히 냉장고는 기화된 냉매를 다시 액화시켜 재활용하는데, 이때에는 열이 방출되는 발열반응이 나타난다. 냉장고의 뒷면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열기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다.

흡열반응을 이용한 또 다른 가전기기로 에어컨이 있으며, 선풍기 역시 냉매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바람을 통해 피부의 땀을 증발시켜 시원함을 준다는 점에서 기본 원리는 같다.

압력밥솥의 경우 고압환경에서는 온도의 상승이 빠르고 물의 끓는점이 높아진다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제품이다. 일반 밥솥과 달리 증기의 배출을 막아 내부압력을 높임으로써 신속한 온도상승을 유도하는 한편 훨씬 높은 온도에서 쌀을 익히게 하는 것. 압력밥솥이 일반 냄비나 전기밥솥에 비해 밥 짓는 속도가 월등히 빠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외에도 진공청소기는 팬을 분당 1만회 이상 고속 회전시켜 호스 내부를 진공상태로 만듦으로써 압력 차이에 의해 외부 공기가 빨려들어오도록 한 것이다. 또한 쌀통은 지구의 중력, 탈수기는 원심력, 세탁기는 세탁물들의 마찰력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 세탁기에는 어떤 과학기술이 적용돼 있을까. 지난 2001년 세계 최초로 무세제세탁기 ‘마이더스’를 출시한 대우일렉트로닉스에 따르면 세탁수의 전기분해가 핵심이다.

이를 통해 산성도(pH) 6.5~7.5인 수돗물을 pH 10~12의 알칼리 이온수로 변환시키는 것. 이 알칼리 이온수는 세정력과 계면활성능력이 뛰어나 물 자체가 세제의 역할을 수행한다.

주부들에게 최적화된 시스템 주방가구

주방은 주부들이 집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이 때문에 주방가구들은 세밀한 과학기술적 분석을 거쳐 주부들의 편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설계공법이 적용돼 있다. 주방가구의 배열순서가 대표적이다.

사실 개수대, 선반, 수납장, 가스레인지 등의 위치는 아무렇게나 선정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가정의 주방을 보면 개수대를 중심으로 양쪽 끝에 냉장고와 가스레인지가 배치돼 있는데, 이는 음식을 할 때 주부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최대한 짧고 효율적으로 해주기 위한 과학기술적 분석의 결과다.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손질한 뒤 가열하는 요리순서에 맞춰져 있는 것.

한샘, 에넥스 등 주방가구 업체들이 시스템 주방가구를 설계할 때 주로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에넥스의 한 관계자는 “주부들에게 최적의 동선을 제공하기 위해 한식의 조리 특성, 주부들의 요리 특성 등을 면밀히 분석한다”며 “그 결과 가장 바람직한 배열은 냉장고를 포함한 요리재료의 보관대, 설거지용 개수대, 식재료를 혼합· 조리하는 조리대, 가열 기구를 놓은 가열대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샘도 “-자형, ㄱ자형, ㄷ자형 등 부엌의 구조에 따라 최적의 동선은 다소 달라진다”며 “하지만 개수대가 중앙을 점하고 양측에 보관대와 가열대를 두는 기본 특성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주방가구의 높이 또한 국내 주부들의 평균 신장을 분석해 결정된다. 키에 비해 조리대가 높으면 편안한 손놀림이 어렵고, 너무 낮으면 허리통증을 유발하는 탓이다. 과거 85cm 이하이던 개수대의 높이가 최근 86~90cm로 높아진 것도 평균 신장 상승에 따른 변화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방용품에도 과학기술은 어김없이 숨어 있다. 일례로 프라이팬의 바닥을 보면 원형 주름이 있는데 이는 바닥면의 표면적을 넓혀 열전도율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또한 냄비·프라이팬·주전자 등의 바닥과 가스레인지의 불꽃 모양이 오직 원형밖에 없는 것도 과학기술적 이유가 있다. 원형만큼 고른 열전달이 가능하고 효율 높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고기 불판의 모양이 대부분 원형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오른손잡이 고객을 위한 과학기술적 배려

국토해양부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 국민의 88.3%가 오른손잡이다. 세계적으로도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비율은 9:1 정도로 오른손잡이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이 때문에 제조업체들은 오래전부터 제품의 구조나 디자인, 부속물의 위치 등을 정할 때 과학기술적 관점에서 주 고객층이 될 수밖에 없는 오른손잡이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설계를 채택해왔다.

와이셔츠의 단추와 단추 구멍의 위치가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정교한 손놀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단추를 잡고 구멍에 끼울 수 있도록 우측 옷섶에 단추, 좌측 옷섶에 단추 구멍을 만든 것.

또한 바지의 지퍼 덮개는 오른손잡이가 덮개를 젖히지 않고도 지퍼 고리를 잡을 수 있게 좌측에서 우측으로 덮여있다. 유선전 화기는 수화기를 좌측, 버튼을 우측에 배치해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르기 쉽게 했다.

이에 더해 자동차의 키 박스, 지하철의 개찰구, 자동판매기의 동전 주입구, 카메라의 셔터, 키보드의 엔터키 등이 하나 같이 우측에 위치해 있듯 우리 주변에는 인체공학적으로 오른손잡이 고객 중심의 디자인이 하나의 법칙처럼 고정화된 사례들이 무수히 많다.

너무도 당연시되거나 일상화돼 있어 오른손잡이들조차 평상시에는 그 편리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왼손잡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만큼 비과학적·비합리적인 것도 없을 테지만 말이다.

냉장고의 손잡이 위치 역시 오른손잡이 지향 디자인의 하나다. 실제 양문형 냉장고가 보급되기 전의 원도어 냉장고들은 손잡이가 모두 문의 좌측에 달려 있다. 오른손잡이들이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이용해 문을 연다는 점을 감안, 쉽게 힘을 줄 수 있게 좌측에서 우측으로 당기도록 한 것.

또한 좌측에 손잡이가 있으면 오른손으로 문을 연 후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곧바로 왼손을 이용해 물건을 꺼낼 수 있지만 손잡이가 우측에 있으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냉장고 외에 방문, 현관문 등의 손잡이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주변의 문들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없이 냉장고처럼 당겨야만 열리는 것은 좌측, 밀어서 여는 것은 우측 에 손잡이가 있을 것이다.

도로에서도 만나는 과학기술

도로에서도 어김없이 과학기술과 만난다. 일단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직접적 도움을 주는 도로 위의 차선에 과학기술이 담겨 있다.

차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낮이나 밤이나 변함없이 우수한 가시성을 제공하는 데 있다. 과연 차선은 어떻게 칠흑 같은 야간에도 눈에 잘 보이는 것일까. 언뜻 야광페인트나 형광페인트를 활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야간 환경에서 차선의 가시성을 제공해 주는 비밀은 글라스 비드라고 불리는 미세한 투명 유리구슬에 있다. 차선을 도색하는 광경을 잘 살펴보면 먼저 도료를 칠한 후 그 위에 백색의 가루를 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가루가 바로 글라스 비드다. 이렇게 도료 위에 뿌려진 글라스 비드가 자동차 전조등의 빛을 운전자에게 반사함으로써 야간이나 악천후 속에서도 차선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

국내 글라스 비드 선도업체인 신일에 따르면 글라스 비드의 제조에는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 입사된 빛을 광원 쪽으로 되돌려 보내는 재귀반사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평범한 유리구슬처럼 난반사를 일으킨다면 운전자의 차선 인식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고 오히려 다른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다.

신일의 한 관계자는 “글라스 비드의 직경은 대략 0.8~3.3mm”라며 “차선 도색용 페인트, 도로 표지판용 페인트, 도로 안내판용 테이프, 안전띠, 안전조끼 등 다양한 도로안전제품에 재귀반사 물질로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차선 중에는 졸음 운전자에게 경고음을 송출하는 똑똑한 놈들도 있다. 이른바 돌출식 차선이 그 주인공. 주로 도로의 중앙선이나 고속도로의 차선 및 갓길 경계선 등에 채용돼 있는데,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변경할 때 들리는 소음(?)의 근원이 이것이다.

이 돌출식 차선은 차선을 도색할 때 원형 또는 사각형의 돌출부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며 타이어가 차선을 밟게 되면 소음을 발생, 운전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원형은 날카로운 고음, 사각형은 둔탁한 저음이 들린다.

도로 자체에도 과학적 설계공법이 가미돼 있다. 원활하고 신속한 배수를 위한 반원형 설계가 그것이다. 실제 모든 자동차용 도로는 눈으로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중앙선 부분이 볼록하게 솟아있고 양쪽 끝으로 갈수록 높이가 낮아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비가 내려도 도로에 장시간 빗물이 고여 있지 않아 수막현상에 의한 미끄러짐 사고의 예방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하지만 그 효용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과학기술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를 보면 세상에 과학기술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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