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는 수개월 이상 무중력의 밀폐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들에게 음식은 곧 생명이자 힘겨운 임무를 버텨낼 유일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본격적인 유인 우주탐사 시대에 맞춰 우주인의 건강과 입맛을 모두 사로잡을 우주식품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큰소리 한번 치지 않고 부락민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영도력의 비밀이 뭡 네까?'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 북한군 장교인 동치성이 동막골 촌장에게 이렇게 묻는다. 촌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다. '뭐를 많이 먹여야지…'
이 장면은 인간의 삶에 먹을거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특히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에게 음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넘어섰다.
섭식행위 자체가 곧 삶의 기쁨이자 활력소인 것. 인간생활의 3대 기본요소인 의·식·주와 3대 욕구인 식욕·성욕· 배설욕에 유일하게 음식만이 공통적으로 포함돼 있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이는 지구 밖에서 생활해야 하는 우주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니 생소한 무중력 환경에서,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 장기간 머물러야 하는 만큼 음식이 갖는 가치는 지구에서보다 월등히 크다.
우주인들이 육체적·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임무수행 능력을 유지하는데 음식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최근 세계 각국이 유인 우주탐사 계획을 경쟁적으로 발표하면서 이 같은 우주식품 개발은 우주과학의 한 분야로 인정받으며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튜브에 담은 사과소스가 우주식품의 효시
인류가 우주식품의 개발에 처음 나선 것은 50여 년 전이다.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이 1961년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한 이래 미국과 러시아가 유인 우주탐사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우주인 전용 식품의 개발 필요성이 제기된 것.
미 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최초의 우주식품은 치약과 유사한 알루미늄 튜브에 담은 사과소스였다. 지난 1962년 머큐리호를 타고 지구궤도를 돌았던 존 글랜이 제1호 소비자.
러시아의 자료가 공개돼 있지 않아 이를 우주식품의 효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식품학자들은 이를 우주식품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963년까지 진행된 머큐리 프로젝트에서 활용된 우주식품은 총 3종이다. 한 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의 압축 고형식품, 물을 넣어서 불려먹는 동결건조 분말식품, 튜브에 담은 반(半) 액체식품이 그것.
단지 이때는 우주비행 시간이 34시간 정도에 불과해 우주식품도 식사라기보다는 신진대사에 필요한 영양분의 공급에 초점이 맞춰졌다.
식사 개념의 우주식품은 1965년 개시된 제미니 프로젝트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칠면조고기·닭고기·소고기·스튜·치킨크림 스프·밥·빵 등이 공급됐는데, 하루 2,500 ㎉를 기준으로 3끼 식단을 4일 주기로 순환 제공했다.
이후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을 일궈낸 아폴로 프로젝트에 이르러 우주식품에 혁신적 변화가 나타난다. ‘스푼 볼(spoon bowl)’이라는 플라스틱 용기가 도입돼 스푼 으로 음식을 떠먹을 수 있게 된 것.
이에 따라 우주인들은 포장용기를 입에 문 채 짜먹어야 하는 이전의 우주식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시각적·후각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때는 또 처음으로 통조림 식품, 방사선 처리 식품, 바(bar) 형태의 식품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 1981년 개발된 우주왕복선 역시 우주식품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다. 처음으로 식판이 도입된 것. 이로 인해 하나의 식품을 개봉하면 다 먹을 때까지 다른 식품을 먹을 수 없었던 불편함이 사라졌다. 특히 이때부터 우주식품을 별도로 개발하지 않고 이미 상용화된 식품을 활용하는 연구가 본격화되며 우주식품의 발전 토대가 마련됐다.
칼슘은 UP, 염분과 철분은 DOWN
현재까지 개발된 우주식품은 약 350종에 달한다. 실제 NASA의 우주식품 목록을 보면 웬만한 레스토랑 메뉴판이 무색할 정도다. 해산물, 축산물, 농산물을 막론하고 없는 것이 없다. 피자, 스파게티 등의 분식과 주스, 커피, 홍차 등 음료에 더해 아이스크림, 껌, 사탕 등 주전부리까지 제공된다.
하지만 우주식품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주라는 극한의 환경에 맞춰 일반 식품과는 차원이 다른 극도로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은 1년간의 장기 상온저장성이다. 우주식품의 최대 소비처인 국제우주정거장(ISS)에는 전력부족을 이유로 냉장고 및 냉동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다수 우주식품은 고온가압 살균, 방사선 조사(照査) 멸균을 거쳐 미생물과 효소의 숫자를 최소화한다. 제조방법별로 허용기준이 다르지만 최대 1g당 2만 마리 이하로 엄격히 제한된다.
우주식품은 중량의 최소화도 필수다. ISS로 1kg의 물건을 보내는 데 5,000만원이라는 거금이 드는 탓이다. 현존 우주식품의 약 60%가 수분 함량 5% 이하의 동결 건조식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식품 섭취 과정에서 부스러기가 생겨서도 안 된다. 이것이 우주선이나 ISS 내부를 떠다니다가 기계장치를 고장 내거나 우주인의 눈과 코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루양념 가운데 후추는 기름, 소금은 물에 녹인 상태로 포장돼 있다. 덧붙여 영양성, 포장 안전성, 취식 편의성 등도 모두 우주식품의 필수조건에 해당한다.
특히 우주에서는 영양소의 일일 섭취 권장량도 지구와 다르다. 우주식품은 이를 반영해야 한다. 일례로 염분은 기존보다 섭취량이 제한된다. 무중력 환경에서는 골밀도가 월평균 1~2%나 감소하는데 과도한 염분은 골다공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혈구 생산에 관여하는 철분도 하루 섭취량이 10mg 미만이어야 한다. 적혈구의 생산이 활발하지 않은 무중력 상태에서 철분을 다량 섭취하면 체내에 쌓여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칼슘과 비타민D는 뼈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 지구에서보다 더 많은 양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한식의 우주화를 위한 첫 단추 꿰
이 같은 우주식품 중에는 전통 한식도 있다. 우주식품은 자체 유인우주선과 발사장을 보유하지 않은 이상 NASA, 러시아 항공우주국, 그리고 러시아 생의학연구소 (IBMP) 가운데 한 곳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0종의 한식 우주식품에 대해 IBMP의 인증을 획득했다.
이는 한국식품연구원과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박사의 ISS 방문에 맞춰 2006년부터 2년간 국내 유수의 식음료 기업들과 함께 개발한 결실이다.
이 가운데 식품연구원은 대상과 볶음김치·고추장·된장국, 오뚜기와 밥, 한국인삼공사와 홍삼차, 그리고 보성군과 녹차를 공동 개발했다. 모두 6종을 만든 것이다. 원자력연구소의 경우 부설기관인 정읍 방사선과학연구소 주관으로 CJ와 김치, 농심과 라면, 이롬과 생식바, 그리고 동원과 수정과를 개발했다.
양 기관의 가장 큰 차이는 살균 방식. 식품연구원은 고온 살균을, 원자력연구소는 방사선 조사 멸균을 선택했다. 전자는 김치 유산균 등 몸에 이로운 미생물을 적게나마 살려낼 수 있다는 점, 후자는 미생물을 완전히 제거해 세균 번식 가능성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게 메리트다.
살균 방식은 달라도 두 기관의 우주식품 10종은 모두 100여일에 걸친 IBMP의 엄격한 심사를 한 번에 통과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8일 4kg의 한식 우주식품이 이소연 박사와 함께 ISS로 보내지면서 한식의 세계화를 넘어 한식의 우주화를 위한 첫 단추를 끼웠다.
식품연구원의 우주식품 개발 책임자인 김성수 박사는 “IBMP 역사상 인증 신청된 우주식품 모두가 단 한번에 모든 기준을 통과한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는 국내 식음료 기술력이 이미 세계적 수준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의 이주운 박사도 “러시아 측 과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반 매장에 진열된 컵라면, 초코바, 즉석국 등 인스턴트 식품을 보고 조금만 개량하면 곧바로 우주식품으로 활용 가능한 수준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은 쉽지 않았다. 경험이 전무해 연구개발을 위한 정보 확보가 필수적이었지만 우호적일 줄 알았던 러시아를 포함, 누구도 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 연구팀은 2단계 우회공략을 선택했다. 과거 러시아의 우주식품 개발을 담당했던 카자흐스탄 아카데미와 공동연구를 통해 기술과 정보를 획득한 것. 이렇게 실력을 쌓은 후에야 러시아와 직접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국제우주정거장에 김치 냄새? 외신 화들짝
이번 우주식품 개발 과정에서는 한 가지 해프닝도 있었다. 한식 우주식품이 IBMP의 인증을 받자 외신들의 우려 섞인 보도가 잇따른 것. 특히 김치에 대해서 그랬다.
실제 로이터 통신과 AFP 통신, 미국 ABC, 영국 BBC, 일본 NHK 등이 외국인들에게는 역하게 느껴질 수 있는 김치 냄새가 국제우주정거장에 퍼져나가게 됐다는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완전 멸균되지 않고 1g당 10₄정도의 미생물이 살아 있는 볶음김치의 안전성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같은 지적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국내 연구팀은 이를 한식 우주식품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우주식품은 비단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하고 맛, 냄새 등 모든 측면에서 세계인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실제 김 박사는 “한식은 발효식품이 많아 건강에 매우 좋지만 맛과 발효취가 외국인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라며 “김치의 냄새를 줄이거나 고추장의 매운맛을 경감해 외국인의 입맛을 충족시킨다면 세계적인 우주식품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아예 외국인의 거부감이 없는 식품을 선택, 우주식품화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아직 인증을 받지는 않았지만 김 박사는 이 신념에 따라 관련기업들과 함께 지난해 이미 10종의 우주식품을 추가 개발해 낸 상태다. 불고기, 비빔밥용 밥과 나물류, 삼계탕, 잡채, 호박죽, 카레, 요구르트, 식혜가 그 주인공. 또한 올해 중 쌀국수, 너비아니, 백김치 등의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의 이 박사 역시 비빔밥, 불고기, 미역국, 오디주스 등 추가로 4종의 우주식품 개발을 완료하고 이달 중 IBMP의 인증을 추진할 방침이다. 특히 우주탐사 분야의 신흥강국인 인도, 중국과의 공동연구도 수행 중이다. 인도와는 뼈 없는 닭갈비, 중국과는 불고기와 돼지갈비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식품연구원의 김 박사는 “우주식품은 우주에서뿐만 아니라 비상식량, 전투식량, 긴급구호식품 등 지구에서도 다양한 활용성을 갖고 있다”며 “특히 우주식품으로 인증을 받으면 막대한 홍보효과를 누리게 돼 해당식품의 수출 증대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우주인이 화성에서 먹는 비빔밥 식품연구원과 원자력연구소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한식 우주식품 기술은 3 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 유인탐사를 위한 사전 모의실험인 ‘마스-500(Mars-500)’ 프로젝트에 한식 우주식품이 공급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마스-500 프로젝트는 화성탐사선과 동일한 구조물에 6명의 우주인들이 들어가 520일간 폐쇄된 상태로 거주하는 실험이다.
화성까지 가는데 240일, 화성에서의 임무수행 40일, 귀환 240일을 합친 520일간 우주인들이 우주식품 및 선내에서 자체조달 가능한 식품만으로 견딜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것.
식품연구원의 김 박사팀은 김치, 고추장, 불고기, 잡채, 비빔밥, 호박죽, 식혜 등 10종을 공급할 계획이다. 또한 정읍방사선 과학연구소의 이 박사팀은 개발완료 된 8 종 가운데 라면과 생식바를 제외한 6종을 보낼 예정이다.
이에 따라 두 연구팀은 현재 이 16종의 우주식품을 화성탐사용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기존 우주 식품은 국제우주정거장 공급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 임무기간이 2년에 가까운 화성탐사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품연구원의 김 박사는 “화성 유인탐사용 우주식품은 최소 2~3년의 저장기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훨씬 강화된 기준이 적용된다”며 “올해 중 시제품을 공급해 기준을 통과하면 내년 3월경 프로젝트에 실제 투입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실험에서 한식이 우주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경우 실제 화성 유인탐사선에 실리게 되는 영광을 안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우주인이 화성에서 비빔밥을 먹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화성 유인탐사는 달 착륙 이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인류 최고의 사건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러시아가 미국보다 먼저 화성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한식 우주식품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하게 된다. 현재 러시아는 2025년, 미국은 2037년경 화성 유인탐사를 계획하고 있어 가능성이 꽤 높은 편이다.
강재윤 기자 hama9806@sed.co.kr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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