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과학기술자들은 척박한 연구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어려움에 부딪혀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 7대 과학기술 강국을 바라보는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과학기술이 예술보다 아름답고, 다시 태어나도 과학기술자의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후배 과학기술자들 역시 하루를 25시간으로 살 만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과학기술계는 학문간 통섭 및 커뮤니케이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도 학문간 경계가 존재하고, 과학기술자 사이의 소통도 원활치 못하다는 것. 이에 따라 파퓰러사이언스는 칭찬 릴레이 인터뷰인 '파퓰러사이언스 릴레이 인터뷰'를 마련, 학문간 통섭과 과학기술자간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를 꾀하고자 한다.
인간의 뇌는 태어날 때 400g, 성인이 돼서도 1.4kg에 불과하다. 크기 또한 축구공보다 작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들이 복잡다단하게 연결되면서 일종의 회로처럼 작동한다. 신경세포 1개당 평균 1,000개의 시냅스를 형성, 전체 회로구조가 무려 100조개에 이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무한한 가짓수의 다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이 시냅스 또한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 등에 의해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뇌의 작동기전을 파악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복잡한 문제다. 뇌를 인체 내의 소우주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이 같은 뇌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면 우울증, 공포, 스트레스, 통증 등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기억력의 통제도 가능해져 과거의 나쁜 기억을 지우거나 학습능력을 배가할 수도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경과학센터장인 신희섭 박사는 뇌 연구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자. 그는 이처럼 꿈같은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 1991년부터 지금까지 뇌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데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신 박사가 처음 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 시절이다. 당시 한 교수로부터 '인간 의식을 조절하는 뇌간 망양체의 매력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는 말을 듣고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학구열이 자극을 받은 것.
하지만 신 박사가 처음부터 뇌 연구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뇌 연구와 같은 기초의학자가 아닌 의사가 되고자 했다. 이랬던 그에게 졸업을 앞두고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신 박사는 "임상진료를 해 보니 환자들의 고통이 내 고통처럼 절절히 다가오지 않았다"며 "이것이 계기가 돼 치료하는 의사보다 연구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1978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슬로운-케터링 암연구소에서 면역학을 연구했고, 2년 후에는 코넬대 대학원에 진학해 유전학을 공부했다. 당시 힘겨운 유학생활 속에서도 신 박사의 연구 열정은 마치 주머니 속의 칼처럼 두드러졌다.
코넬대 지도교수가 '다른 사람의 3배를 한다'고 말할 만큼 밤낮없이 연구에 몰입, 단 2년 6개월여 만에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이 짧은 기간 동안 셀에 3편, 네이처에 2편의 논문을 게재하는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당시 MIT 생물학과 교수였던 데이비드 볼티모어 박사가 그를 MIT 교수로 초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올랐지만 뇌 연구에 대한 욕망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결국 그는 MIT 교수가 된지 6년 만인 지난 1991년 뇌 연구를 위해 포항공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 우리나라는 뇌 연구의 불모지였지만 오직 뇌를 연구하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MIT 교수직을 서슴없이 버린 것이다. 대학 졸업 후 17년간이나 엇갈렸던 신 박사와 뇌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하지만 국내의 뇌 연구 환경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뇌의 신비로움을 알면 알수록 학문적 배고픔은 배가된 반면 연구비는 턱없이 적었고, 기술력도 부족했다. 이때 신 박사는 정공법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지속적으로 뇌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 G7 프로젝트의 과제를 받아냈으며, 대학원생들을 세계 각지로 파견해 필요한 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스스로 뉴욕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에서 생쥐의 행동분석기법에 대해 연수과정을 밟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열정과 노력은 비로소 1997년 결실을 맺었다. PLC 베타1, PLC 베타4라는 유전자를 제거한 돌연변이 쥐를 활용, 이 두 유전자가 각각 간질과 운동마비 증상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내 네이처에 발표한 것.
신 박사는 "이 성과를 통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할 기술은 없고 필요하면 무엇이든 배우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연구팀이 뇌 연구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후 신 박사의 연구는 한층 탄력을 받아 불안증에 관여하는 알파1E 유전자와 R 타입 칼슘채널 규명, PLC 베타4의 생체리듬 조절 능력 규명, 통증억제 유전자인 T형 칼슘채널 발견 등 뇌와 신경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초의 연구 성과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특히 신 박사는 뇌 연구를 위해서는 유전자와 같은 분자단위부터 최종 행동에 이르는 모든 뇌 기능을 파악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분자에서 행동까지'를 연구팀의 모토로 삼아 세계 신경과학 연구를 이끄는 선도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신 박사를 놓고 노벨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국내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 박사는 또다시 범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다. 의사에서 기초과학자, MIT 교수에서 포항공대 교수를 선택한데 이어 2001년 여름 안정적인 포항공대 교수직마저 던지고 KIST의 연구원으로 옮긴 것.
신 박사는 이에 대해 "포항공대보다 KIST의 연구 환경이 나았고 연구시간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을 머쓱하게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신 박사가 지인들로부터 '왜?'라는 질문을 받았던 결정들은 모두 동일한 잣대에 의해 내려진 것이다. '연구에 무엇이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것. 그렇다면 이 같은 결정들에 대해 잠시라도 후회해 본적은 없었을까. 신 박사는 없다고 단언한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던 한번 결정한 것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신 박사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는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도 선택을 후회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하는 타입"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그것이 어떤 길이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다보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신 박사만의 연구철학은 '연구자의 일상을 즐기면서 완벽을 추구하자'다. 연구의 최종 결과물에 더해 매일 접하는 사소한 일상들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만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생각에서다.
신 박사는 마지막으로 고스톱의 치매예방 효과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사회적 융합은 뇌 건강에 매우 긍정적 역할을 한다" 며 "하지만 뇌는 많이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 전략을 세워가며 게임 자체를 즐긴다면 많은 도움이 되지만 돈 잃는 것에 연연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신 박사가 추천한 제3대 릴레이인터뷰 주자는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탄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전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이호왕 박사다.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