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증은 때로 전염병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르다. 전염병은 감염증에서도 전염력이 강해 소수의 병원체로도 쉽게 감염되는 질병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전염병은 사회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기까지 했다.
백신과 항생제라는 무기를 얻은 인간은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둘 간의 시소게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가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의 진원지인 북미는 물론 국내에서도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마스크, 손 세정제 등 위생용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 백신과 항생제를 만드는 기업의 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의 이면에는 자신도 신종 인플루엔자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살펴볼 때 이번 신종 인플루엔자를 두고 '강하다'거나 '무섭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다소 미약해 보인다. 만일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중세 문명, 그리고 인디언 문명을 차례로 강타한 전염병이 오늘날 재차 닥친다면 그야말로 사람들은 지구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세계를 휩쓸고 역사를 바꾼 여러 가지 전염병의 실체와 거기에 맞선 인간의 대응, 하지만 그 같은 인간의 대응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변이와 진화를 거듭해온 전염병에 대해 알아 보자.
막강한 파괴력 가진 전염병
불교에서는 흔히 사람이 겪는 5가지 괴로움을 이야기하는데, 이 중에는 생로병사(生老 病死)도 포함돼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그것.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도 병들었을 때의 괴로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가모니가 질병을 인생의 괴로움으로 집어넣은 것은 질병이 석가모니가 살던 시절, 아니 선사시대부터 인간을 지독하게 괴롭혀 온 문제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중에는 미생물과는 상관없는 질병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전염병, 즉 타인에게 전염되는 질병은 모두 미생물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다.
전염병의 정의는 대략 다음과 같다. 원충, 진균, 세균, 바이러스 등의 병원체가 이에 감염된 인간이나 동물로부터 직접적으로 면역이 없는 또 다른 인체나 동물에 침입해 증식함으로써 일어나는 질병이다.
물론 모기·파리와 같은 매개동물이나 음식물·수건·혈액 등과 같은 비동물성 매개체에 의해 간접적으로 면역이 없는 인체나 동물에 침입해 증식하는 것도 전염병이다.
이 같은 병원체 중에서도 세균은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로서 이것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생명체든지 생존하고 번식하려면 외부에서 물질을 끌어와야 한다. 그것은 세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세균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다른 생명체, 즉 숙주에 침입해 그 생명체의 구성 물질을 이용해 증식한다.
물론 세균은 해당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면역체계의 방해를 받아 증식에 실패하고 전멸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 생명체의 생리기능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적절히 증식하는, 즉 공생 형태를 취하는 세균도 있다. 인간의 대장 속에 사는 대장균이 대표적이다.
보통 이런 것은 병원체로 보지 않는다. 병원체로 보는 것은 생존과 증식 과정에서 숙주의 생리기능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물론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세균뿐만이 아니다. 기생충에 해당되는 원충, 그리고 세포에 기생해 공격하는 바이러스도 있다.
이 같은 병원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포함한 다른 생명체들을 끊임없이 공격해 가며 진화해왔다. 그 중에는 다른 생명체의 면역체계에 걸러져 나간 것도 있고, 다른 생명체 내에서 폭발적으로 증식해 생리기능 장애를 일으킨 것도 있다.
대부분의 병원체는 숙주의 생리기능 장애를 적당한 선에서 자른다. 이것이 지나쳐 숙주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병원체의 생존과 증식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체의 전파력이 워낙 뛰어나 새로운 숙주를 빨리 찾을 수 있다면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병원체의 착취가 너무 심해 숙주가 죽어버려도 새 숙주를 찾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원체는 가장 구조가 간단한 생명체인 만큼 이렇게 전파력과 기생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변이되고 진화한다. 바로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콜레라, 독감, 티푸스, 천연두 등 막강한 전염력과 파괴력을 가진 전염병들이 등장했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 즉 이들 병원체와 동일한 크기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 것은 17세기였다. 그 이전까지 인간은 전염병의 창궐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역사에 남겨진 전염병의 상흔
전염병이 인간사회에 남긴 상흔은 선사시대 원시인의 유골 분석을 통해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전염병이 본격적으로 인류의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인 농업시대로의 진입 때부터였다.
이때부터 인류는 채집이나 수렵보다는 농업이라는 수단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분명 농사는 채집이나 수렵보다 식량 생산성이 월등한 행위였다. 이로 인해 생겨난 잉여생산물은 필연적으로 인구의 증가와 집중을 불러오게 됐다. 즉 농업을 통해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병원체의 입장에서 보기에 도시는 자신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인간이라는 숙주가 비교적 과밀한 밀도로 몰려 있기 때문에 이들 숙주를 공격하고, 다른 숙주로 옮겨가기가 쉬웠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식량, 배설물, 쓰레기 등은 기가 막힌 아지트 구실을 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미생물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고대의 도시에 현대적인 위생개념이나 위생시설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알아서 멍석을 깔아 주니 고대의 도시에서 그야말로 심심하면 전염병이 창궐했던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성경의 출애굽기를 보면 여호와가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공격해서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을 해방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재앙 중에는 개구리·파리·메뚜기·이 등의 해충, 그리고 전염병과 독한 종기 등 인간이 걸리는 질병이 들어 있다.
신화이긴 하지만 이를 볼 때 고대의 도시가 질병관리 및 예방 면에서 상당히 취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원리로 전염병이 생기는지 알 턱이 없던 고대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받아들인 것도 당연해 보인다.
여담이지만 전염병과 초자연적인 힘을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은 과학시대인 현대에도 상당히 뿌리 깊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전염병 가운데 상당수는 전 세계에 걸쳐 전파되는 팬데믹, 즉 범(凡)유행을 여러 차례 일으킬 만큼 전염력이 강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전염병들이 과거에 맹위를 떨쳤던 것일까.
● 아테네의 패전 초래한 역병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원류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을 꼽는데,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전염병은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테네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끌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싸움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BC 430년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발병한 아테네 역병이 바로 그것.
이 역병은 BC 429년, 그리고 BC 427년에 걸쳐 2번 더 유행했는데, 이 역병으로 당시 아테네 군인과 민간인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환자는 고열 , 장기의 충혈, 염증, 흉통, 구토, 궤양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살아남아도 손가락이나 발가락 절단, 기억상실 등의 후유증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초기 아테네의 전력은 스파르타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이 역병의 창궐로 인해 전력이 크게 약해진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패전하게 된다. 전염병이 전쟁의 향방까지 바꾸어버린 대표적인 사례다.
아테네 역병이 정확히 어떤 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환자의 증상을 묘사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기록이나 최근 이루어진 희생자 유골에 대한 정밀조사에 따르면 장티푸스라는 설이 유력하다
● 로마 붕괴 불러온 전염병
사상 최강의 대제국이었던 로마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이설이 분분하다. 물론 한두 가지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엮여 로마가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제국 말기에 창궐했던 각종 전염병이다.
서기 2세기부터 로마는 각종 전염병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는 로마가 가장도 시화되고 국제화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전염병의 유입과 전파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졌다는 것. 역설이지만 제국의 힘이 강해질수록 전염병이 퍼질 조건도 따라서 좋아졌던 셈이다.
그 중 대표적인 전염병은 서기 165~180년 사이에 유행한 이른바 안토니우스 역병이었다. 이 역병은 근동인 시리아에 주둔했던 로마 군인들이 귀국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정체는 당시의 기록을 참조해 보건대 아시아와의 무역, 그리고 흉노족 등을 매개로 전파된 천연두로 짐작된다.
이 역병이 한창 유행하던 15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는 무려 500만 명이 죽었다. 당시 세계 인구가 오늘날 미국 인구에도 못 미치는 2억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서기 251~266년에는 성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또다시 로마를 강타했다. 심할 때는 하루에 로마에서만 5,000명이 죽기도 했다.
이 같은 전염병의 창궐은 로마의 사회체계를 붕괴시켜 나갔고, 동서 로마의 분리와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안토니우스 역병도 541년부터 750년 사이에 유행했던 유스티아누스 역병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이집트에서 전파된 유스티아누스 역병은 콘스탄티노플에 상륙, 한창 때는 하루에 1만명을 죽이기도 하는 등 맹위를 떨쳤다. 이후로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라인 강 유역, 영국, 덴마크 등을 휩쓴 유스티아누스 역병으로 인해 이 시기 유럽 인구는 문자 그대로 반토막이 났다.
유스티아누스 역병의 주된 증상은 발열, 림프선 종창, 환각 증세 등이다. 발병 후 5일 정도가 지나면 감염자의 절반 이상이 죽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유스티아누스 역병의 정체는 선페스트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로마가 전염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무너지면서 유럽에서 황제 1인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력을 발휘하던 제국시대는 끝이 났다. 대신 각 지방의 영주가 지방자치를 하며 유사시에만 군주를 도와주는 중세 봉건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 중세시대를 끝장낸 페스트
일반인들, 특히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부동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전염병이 바로 페스트다. 그도 그럴 것이 페스트는 무려 7,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명실 공히 사상 최악의 전염병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문호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라는 제목의 소설도 냈을까.
페스트는 페스트균이 일으키며, 쥐벼룩에 의해 매개되는 전염병이다. 원래는 쥐와 같은 설치류의 질병이었지만 인간에게도 전염성을 띠게 됐다. 감염 부위에 따라 선페스트·폐페스트·패혈성 페스트로 나뉘는데, 각각 림프절 종창·폐의 페스트균 감염·혈액의 페스트균 감염 등이 특징이다.
발병 빈도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선페스트 증세는 맨 처음 떨림이 나타나고 뒤이어 구토, 두통, 현기증 등이 나타난다. 빛을 견딜 수 없게 되고, 등과 사지에는 통증이 생긴다. 수면부족, 감정의 둔화, 섬망 등도 나타난다.
섬망은 혼돈과 비슷하지만 과다행동과 생생한 환각, 그리고 초조함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과다행동이란 안절부절 못하고, 잠을 안자며, 소리 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선페스트는 또한 40℃ 이상의 고열과 쇠약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보통 변비증상이 나타나는데, 설사증상을 보이면 사망이 염려되는 심각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폐페스트의 증상은 기관지 폐렴과 동일한데, 폐부종이 나타난 지 약 3~4일 후 사망한다. 그리고 패혈성 페스트는 쇠약과 뇌손상이 특징으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사망한다.
중국과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페스트는 1347년 킵차크칸국 군대가 크림반도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의 시체를 도시 속으로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전파됐다. 킵차크칸국은 칭기스칸의 장남인 조치에게 내려진 몽골제국 서방의 영지다.
당시 킵차크 군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페스트로 죽은 시신을 끌어 모았다. 그런 다음 흉측하게 썩은 시신을 돌 대신 노포에 담아 적진을 향해 날렸다.
킵차크 군이 시신을 날려 보낸 것은 단지 유럽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사건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시신을 쏘아 보낸 킵차크 군도 알지 못했고, 시신 공격을 받은 유럽인들도 알지 못했다.
사실 페스트는 유목 민족들에게 무서운 질병은 아니었다. 그들은 들쥐의 먹이, 즉 페스트의 매개체였던 쌀 등의 곡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들쥐는 몽골식 주거용 천막인 겔의 두꺼운 펠트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 봤자 들쥐가 먹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겔을 지키는 개들에게 잡아먹힐 뿐이었다.
하지만 농경 정착 민족에게는 허술하게 지어놓은 목제 창고가 많았다. 곳곳에 곡식이 널려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 안에도 곡식이 있었다. 당연히 쥐가 들끓었다. 결과적으로 유목 민족과 농경 정착 민족의 주거 환경 차이가 실로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실제 킵차크 군이 시신을 쏘아 보낸 이후 불과 6년간 유럽 전역에서 2,000만~3,000만명이 페스트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페스트는 이후에도 18세기까지 유럽을 주기적으로 강타, 100여 회의 크고 작은 유행을 일으켰다. 영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1361년부터 1480년 사이에 2~5년 주기로 페스트가 창궐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1665~1666년의 페스트 대(大)창궐 때는 런던 인구의 20%인 10만 명이 죽었다.
이렇게 강력한 페스트는 당시 유럽의 사회적 상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자 귀족들의 부와 권력은 그만큼 줄어들었고, 농노들은 영지를 떠나 소작농·소지주·장인 등으로 변신하게 된다. 중세 봉건주의 경제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
또한 페스트를 퇴치하는 데 실패한 교회로부터 민심이 이반됨에 따라 중세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기독교의 위세도 흔들리게 됐다. 페스트는 중세시대의 몰락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 신대륙 점령한 유럽의 전염병
일반인들은 흔히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이 총칼로 인디언을 제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디언 제압에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바로 유럽인들이 가져간 전염병이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는 유럽에서 막대한 인명을 살상하던 인구 밀집성 병원체가 없었던 것.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1만 2,000년 전 지금의 베링해협이 있는 장소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던 육로인 베링기아 때문이다. 베링기아는 매우 추운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고, 따라서 이곳을 통해 병원체가 상당 부분 걸러졌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침입할 때까지는 유럽 대륙을 초토화시킨 것과 같은 전염병의 대유행을 거의 겪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15세기 들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의 전염병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 도입됐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난생 처음 보는 유럽의 전염병에 면역력이 있을 리 만무했고, 이에 따라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몰고 온 전염병에 무더기로 학살당했다.
이렇듯 본의 아니게 유럽인들의 신대륙 정복을 도와준 전염병은 천연두와 홍역, 그리고 인플루엔자 등의 바이러스성 질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두창, 또는 마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천연두는 고열과 발진, 그리고 전신에 수포가 나타난다.
설혹 생존하더라도 곰보자국 모양의 흉터가 남거나 실명할 수 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도 천연두에 걸려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홍역은 발진을 동반하고, 매우 심한 감기 증세와 유사하다. 일단 걸렸다가 살아남으면 평생 면역력을 지닌다.
현재 신종 인플루엔자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플루엔자 역시 호흡기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기도 상부, 기관지, 기관을 덮고 있는 섬모 상피세포를 공격해 감기와 비슷한 증세를 일으킨다.
특히 합병증을 일으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는 다양한 아종을 갖고 있으며, 이 가운데 한 종류에 대해 면역력이 있다고 해도 다른 종류에 대해서는 면역효과가 없다.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등 전염병은 이렇다 할 면역력이 없었던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16세기 카나리 군도의 전 인구가 천연두로 전멸했으며, 히스파뇰라에서는 원주민의 절반이 천연두로 죽었다.
천연두는 또한 멕시코와 페루 등 북미를 휩쓸며 수십만 명의 인디언들을 도륙했다. 심지어 오세아니아에서도 유럽인들과 함께 퍼져 식민통치 초기에 원주민 중 50%를 죽여 없앴다.
일부에서는 유럽인들의 신대륙 개척 당시 살고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 가운데 95%는 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에 의해 죽었다는 시각도 있다.
만약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유럽산 전염병에 면역력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오늘날과 같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인디언과 유럽인 사이의 기술 수준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인들이 전염병의 지원 없이 순수하게 무력만으로 인디언을 정복하기에는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적었기 때문이다.
실제 1518년 멕시코에 상륙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휘하의 부하는 고작 800명이었다. 또한 그들이 3년 후 인구 30만명의 도시 테노츠티틀란을 침공했을 때 전투가 아닌, 그들이 옮긴 천연두로 1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백신과 항생제 가진 인간의 반격
17세기 들어 네덜란드의 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미생물의 존재를 발견할 때까지 인류는 실로 오랜 세월 자신들을 괴롭혀왔던 전염병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대충 잡아 200만년으로 봐도 무려 199만9,600년 동안 전염병에 대한 정보부재 속에서 살아왔던 것.
아무튼 여러 가지 병원체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눈으로 보고 식별할 수 있게 되자 전염병 예방 및 치료 연구도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대한 유효한 반격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면역능력을 갖추기 위해 백신을 처음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든 사람은 19세기의 생물학자 파스퇴르다. 백신은 약화시키거나 죽인 미생물 또는 미생물이 생산한 독소액에 적당한 조작을 가한 약품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인류는 경험칙을 통해 백신의 존재 및 효과에 대해 알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백신을 발견하기 수백 년 전부터 아시아·인도·아랍에서는 천연두 환자의 고름, 즉 약화된 천연두 바이러스를 비감염자의 몸에 접촉시켜 천연두를 예방해 왔던 것. 천연두 환자의 고름에 접촉한 비감염자는 가벼운 천연두 증세를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생긴다.
물론 당시의 사람들이 이 같은 작용 이면의 과학적 메커니즘을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인두접종은 18세기 초 유럽에도 도입됐다. 인두접종이란 천연두 환자의 부스럼에서 나온 고름을 아직 감염이 되지 않은 사람의 팔에 낸 상처에 접촉시키는 것을 말한다.
18세기 말에는 천연두와 근친관계지만 증세가 덜한 우두를 앓아도 천연두에 면역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두 고름을 대신 접종하게 된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같은 전통 백신의 과학적 원리를 밝힘으로써 광견병, 인플루엔자, 독감, 콜레라 등 다른 질병도 예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세균학자 플레밍에 의해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고 세균을 죽이는 물질, 즉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후로도 여러 가지 항생제가 발견돼 전염병과 싸우는 인류에게 큰 힘이 됐다.
현대의 인구증가 역시 전염병과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전염병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사라져 갔지만 현대에는 백신과 항생제의 발견으로 전염병을 방어, 전반적으로 평균수명과 생존율을 높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과학적 진보로 인해 최근 전염병의 위세는 크게 약해졌으며, 특히 과거와 같이 해당지역의 인구 절반 가까이가 죽어버리는 강력한 위력의 전염병은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됐다.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하던 천연두는 지난 1979년 이후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천연두 바이러스도 이제 극소수의 연구소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는 상태다. 만약 이들 연구소에서 천연두 바이러스를 완전 폐기한다면 천연두는 인간의 손으로 멸종된 최초의 병원체가 될 것이다.
인간과 전염병 사이의 시소게임
하지만 전염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가장 간단한 생명체인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이한다. 그리고 기존에는 인간이 갈 수 없었던 곳에 있던 새로운 질병이 인간들에게 전파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 문명의 부작용으로 생긴 전염병도 있다.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변이를 하는 전염병으로는 최근 문제되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대표적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수많은 종류가 있으며, 현재 신종 인플루엔자의 병원체인 H1N1 바이러스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인간에게 전염성을 갖도록 변이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다.
인간의 활동이 늘면서 접하게 된 대표적 전염병으로는 에이즈(AIDS)가 있다. 인간의 면역체계를 무력화시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전염병은 현재의 의료 수준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에이즈의 병원체인 HIV 바이러스는 중앙아프리카의 녹색 원숭이로부터 인간에게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명의 부작용으로 생긴 전염병으로는 광우병이 있다. 역시 완치가 불가능하며, 발병하면 거의 100% 사망에 이른다. 이 질병이 인간에까지 전파된 원인으로는 지나치게 효율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소의 고기를 갈아 살아있는 소의 사료로 쓰는 사육방식이 지목된다.
소에게 풀을 먹이지 않고 다른 소의 고기를 먹인 결과 광우병의 병원체인 프리온이 마구잡이로 퍼졌다는 것이다. 프리온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는 이론상의 감염원으로 단백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프리온은 포유류에서 몇 종의 질환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질환 중에는 흔히 광우병이라고 부르는 소해면상뇌증과 사람에게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등이 있다.
문명은 인간에게 병원체와 싸울 힘도 주었지만 동시에 병원체를 세계 곳곳으로 퍼뜨릴 기회도 확산시켰다. 유럽의 전염병은 유럽인들이 만든 범선을 타고 신대륙을 정복했고, 아프리카의 에이즈는 인간들이 만든 항공기를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 문명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밀집된 전염병의 온상, 즉 거대도시를 만들어냈다. 전 세계의 도시화 비율은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2050년에는 세계 인구의 75%가 도시에 살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런데 인구증가, 자원부족, 환경오염 등으로 이들 도시 인구 중 상당수가 적절한 의료 및 위생 혜택을 볼 수 없는 슬럼 상태의 생활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존의 백신이나 항생제가 듣지 않으며, 막강한 전염력과 살상력을 갖춘 킬러 바이러스가 갑자기 출몰할 경우 인류 전체가 대학살을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과거에도 인간 집단은 거의 예외 없이 인구과잉→ 식량부족→ 식량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이주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그리고 이 같은 이주는 원주민과의 갈등을 격화시켜 전쟁 발발→ 전시의 열악한 위생 상황으로 인한 전염병 창궐→ 인구 감소라는 악순환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밟게 했다.
인류와 병원체는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시소게임을 해왔으며, 지금은 인류가 잠시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제 또다시 병원체 쪽으로 시소가 기울지 모른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 같은 시소게임은 둘 중 하나가 지구라는 무대에서 퇴장하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글_이동훈 과학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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