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까지 동물원은 그저 동물을 가둬두고 구경하는 공간에 불과했다. 실제 BC 1300년 경 이집트에서 출현한 인류 최초의 동물원은 희귀한 동물을 단순히 가둔 뒤 왕과 귀족들이 관람하는 곳이었다. 18세기에 등장한 대중을 위한 동물원, 즉 서커스단에서는 동물을 노골적으로 학대하기까지 했다. 조련사가 휘두르는 채찍에 따라 곰은 공을 굴리고 코끼리는 앞발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1829년 문을 연 영국의 런던 동물원은 동물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됐다.
당시 동물학계가 뜻을 모아 설립한 이 동물원은 동물의 기관, 조직, 세포의 기능을 연구하는 동물생리학 발전을 설립 이유 가운데 하나로 천명했다. 동물생리학은 동물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면 진척이 안 되는 학문이다. 런던 동물원의 설립은 동물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공개적 선언이었던 셈이다.
동물을 인간적으로 대하려는 노력은 1970년대 시작된 생태주의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인조 바위와 콘크리트 바닥이 난무하던 이전의 사육장 대신 실제 서식지역의 기후와 흡사한 생활조건이 동물들에게 주어졌다. 실제 미국 우드랜드 동물원은 1977년부터 동물원 전체를 툰드라, 타이가, 산악지대, 온대 강우 림, 온대 낙엽수림, 사막, 열대 강우림 등 10개 지구로 구분해 조성했다.
캐나다 토론토 동물원은 동물원 안에 초지, 숲 등을 만들어 각 동물이 자신의 습성에 맞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뉴멕시코 주에 있는 살아 있는 사막의 동식물 공원에서는 멕시코 국경 주변의 건조한 고원과 초지를 모래 언덕, 석회암 언덕, 냇물 유역 등으로 나눠 동물들이 각자 여건에 따라 살 수 있게 했다. 동물에게 자연의 향기를 제공하는 또 다른 노력은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이다. 자연을 닮은 서식환경을 조성해 줄 뿐만 아니라 동물원의 안락함 때문에 나태해진 행동방식을 바꾸는데 목적이 있다.
지난 2003년부터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을 실행중인 서울대공원에서는 다양한 조치들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린의 목 길이에 맞도록 먹이통의 위치를 높여준 것이다. 일견 단순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린의 습성을 정확히 인식한 것 이다. 기린에게 다른 동물처럼 바닥에 먹이를 주면 앞 다리를 불편하게 구부리거나 극단적으로 고개를 숙여 먹이를 먹어야 한다. 자연계에서라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미어캣 무리 위로 이따금씩 모형 비행기를 날려 주는 일도 이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본래 남아프리카의 건조한 평원에서 사는 미어캣은 독수리와 같은 포식자의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 초병을 세우는 습성이 있는데, 이런 습성은 쓰지 않으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사육사들이 날린 모형 비행기는 미어캣이 야성의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하는 효과를 만든다.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은 번식에 실패했던 동물이 새끼를 낳게 하기도 한다. 지난 2006년 새끼를 낳은 수달이 대표적이다. 수달은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굴을 파 보금자리를 만들지만 이전까지는 이 같은 습성을 반영한 보금자리를 제공하지 못해 번식에 실패했다.
그런데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이 추진되면서 수달에게 굴이 파진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자 번식이 이뤄졌다. 자연의 분위기가 안긴 심리적 안정이 새끼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글_이정호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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