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은 각국의 과학기술이 격돌한 장이기도 했다. 경기복은 물론 손에 들거나 발에 착용했던 모든 장비들이 철저한 과학기술적 분석을 거쳐 탄생한 산물이었던 것.
더 빨리, 더 멀리, 더 환상적 기술을 구사했던 선수들의 이면에는 항상 과학기술이 버티고 있었다.
0.046초.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우리나라의 이상화 선수와 2위를 차지한 독일 예니 볼프 선수와의 기록 차이다. 그야말로 눈을 한번 깜빡이기에도 모자란 짧은 시간에 의해 순위가 갈린 것.
모태범 선수도 남자 1,000m 경기에서는 미국의 샤니 데이비스 선수보다 0.18초 뒤져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500m에서는 나가시마 게이치로 선수를 0.16초 차이로 제치고 시상대의 정상에 올랐다. 남자 쇼트트랙 성시백 선수의 경우 1,500m 준결승에서 3위로 들어와 결승 진출에 실패했는데, 2위와의 차이는 단 0.006초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이렇듯 매순간이 찰나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스키, 봅슬레이, 루지등 대부분의 종목에서 육안으로는 구분조차 불가능한 100분의 1초, 1,000분의 1초 차이로 승부가 결정 났다.
이처럼 100분의 1초는 메달의 색깔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이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 쇼트트랙 선수들이 발을 내미는 것이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앞차기를 하듯 발을 차는 것도 이 같은 100분의 1초를 단축하기 위한 시도다. 동계올림픽에서는 올해 처음 등장한 발차기 기법은 약 0.03~0.04초 의 기록단축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각국은 올림픽 이전부터 선수들의 기록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기 위한 비책 찾기에 매진한다. 이번 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다수 국가들이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선수들을 훈련시켰고, 경기복·스케이트·스키·썰매 등의 장비를 업그레이드했다.
밴쿠버에 전문 엔지니어를 파견해 경기 당일 최적의 상태로 장비를 세팅하고 과학기술 적 분석을 통해 선수의 역량이 100% 발휘될 수 있도록 조언하기도 했다.
3인 3색의 스케이트 날
동계올림픽은 크게 얼음 위에서 치르는 빙상 경기와 눈 위에서 치르는 설상경기로 나뉜다. 이중 우리나라의 메달은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피겨스케이팅 등 빙상에서 쏟아졌다. 경기기간 중에도 많이 언급됐듯 이 세 종목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장비인 스케이트의 날에 바로 과학기술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세 종목의 스케이트 날은 생김새부터 다르다. 먼저 속도가 생명인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의 스케이트 날은 두께가 1.0~1.2㎜로 4~5㎜인 피겨용에 비해 굵기가 얇다. 얼음을 강하게 누르면 순간적으로 열이 발생해 물이 되는데, 날의 두께가 얇을수록 얼음에 가해지는 압력도 높아져 손쉽게 수막이 형성되며 빠르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두 종목의 스케이트 날은 얼음과 닿는 면도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다. 얼음과의 접촉면적을 넓혀 다리에서 나온 힘을 최대한 전달하기 위함이다. 반면 피겨용 날의 밑면은 중앙에 반원형 홈이 파여 있다. 정면에 서 확대해 보면 교량에서 보는 아치 형상이다. 이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높이 점프해야 하는 피겨 경기의 특성에 맞춰 날의 양 쪽 끝부분으로 얼음을 찍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직선주로가 많은 스피드 스케이팅은 날이 일직선에 가깝지만 111.12m 의 트랙 중 곡선주로의 비중이 절반에 달하는 쇼트트랙은 코너링에서 이점을 갖도록 양쪽 모두 날이 왼쪽으로 미세하게 휘어져 있다.
또한 스피드스케이팅은 날의 뒷부분이 부츠와 분리되는 일명 '클랩 스케이트'를 신는다. 이 스케이트는 뒷발을 들어도 한동안 날이 빙판에 닿아 있어 더 오랜 시간 힘이 가해지는 효과를 제공한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 네덜란드 선수들이 처음 신고 나와 5개의 금메달을 휩쓴 뒤 지금은 모든 선수들이 착용 하고 있다.
이처럼 기능과 모양이 다른 만큼 날의 관리법 역시 다른 게 당연하다. 종목별 특성은 물론 경기 당일의 빙질에 따라 날 관리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는 것. 우리나라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팀이 이번 대회에 처음으로 날 관리를 전담할 관리사를 밴쿠버에 대동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대회에서 남녀 500m 금메달을 동시 석권한 최초의 국가가 된 데는 이 같은 노력이 숨어있는 것이다.
하이테크의 집약체, 컬링
동계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경기를 꼽으라면 단연 컬링을 들 수 있다. 컬링은 길이 45.7m의 직선 빙판 트랙에서 원형의 돌덩어리를 미끄러뜨리며 던져 직경 3.6m의 원 안에 넣는 경기. 두 팀이 각각 컬링스톤이라고 불리는 돌덩어리를 8개씩 던져 원의 한 가운 데 가깝게 위치시킨 팀이 승리하게 된다.
경기 중 심각한 표정으로 컬링스톤을 던지는 모습이나 컬링스톤의 진행방향 앞에서 빗자루 질을 하듯 열심히 얼음을 문지르는 선수들의 면면이 일견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컬링은 단순히 정확하게 컬링스톤을 던지는 경기가 아니다. 컬링스톤과 빙판의 마찰력에 기반하고 있는 고도의 과학적 경기며, 선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과학기술이 깃들여 있다.
실제 컬링 선수들은 경기 중 크게 2가지 기술을 사용한다. 중량 17~20㎏의 컬링스톤을 던질 때 회전을 주는 것과 빗자루 질이 그것이다. 이중 컬링스톤의 회전은 진로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다. 회전을 주면 컬링스톤의 양쪽에 기압차이가 발생, 축구의 바나나킥처럼 직선으로 나가지 않고 미세하게 휘어져 들어가는 것. 이를 통해 진로를 막고 있는 상대편 컬링스톤을 피해 원 안에 안착시키거나 원 안에 있던 상대편 컬링스톤을 정확한 각도로 타격해 밀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시계 방향의 회전은 우측, 반시계 방향은 좌측으로 휜다. 그리고 3~4회의 회전이 가장 강력한 휨 효과를 낼 수 있다. 빗자루 질의 경우 컬링스톤의 진행거리를 늘리는 역할을 한다. 비질을 하면 빙판에 열이 발생, 수막이 형성돼 컬링스톤이 더 잘 미끄러지는 것. 비질의 강도에 의해 최대 5m 정도의 거리 향상이 나타난다. 또한 강한 비질은 컬링스톤의 휘어짐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다.
이에 따라 각국은 빗자루에 에르고미터라는 측정기를 부착, 비질의 강도와 횟수에 따른 효과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실전에 적용하고 있다. 또한 레이저 속도측정기를 활용해 선수들이 항상 동일한 힘으로 컬링스톤을 던지도록 훈련시킨다. 주최국인 캐나다는 아예 앨버타 대학 생물역학자들에게 전문 분석을 의뢰하기도 했다.
사실 컬링스톤도 평범한 돌이 아니다. 선수용 컬링스톤의 소재는 리베카이트라는 검은색 화강암으로 소수의 광산지대에서만 채굴된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채굴이 중단된 스코틀랜드의 한 채석장에서 나온 리베카이트를 최상품으로 친다.
희귀한 돌이기 때문에 완제품 컬링스톤의 가격은 개당 1,500달러를 호가한다. 빗자루 또한 손잡이는 탄소섬유, 헤드는 합성소재로 제작해 비질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경기복은 또 다른 장비
지난달 14일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 결선.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 선수가 6분14초60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은메달을 차지한 우리나라의 이승훈 선수 보다 2.35초나 앞선 기록이었다.
이에 대해 현지 언론은 크라머 선수의 폭풍 같은 질주에 새로운 경기복이 상당한 몫을 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네덜란드 대표 팀은 나이키의 스위프트 경기복을 착용했는데, 이번 대회에는 TU 델프트 공과대학의 난도 타이머 박사팀이 개발한 새로운 경기복을 입고 나온 것이다.
네덜란드가 보안상 2014년까지 경기복에 접목된 기술을 공개치 않기로 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공기저항 극소화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경기복은 이제 단순한 유니폼이 아니다. 경기력과 직결된 또 다른 장비다. 이 때문에 한 국가의 경기복도 디자인은 같아 보이 지만 종목별 특성에 맞도록 소재, 구조, 디자인에 큰 차이가 있다.
일례로 빙상선수의 경기복은 표면에 골프공과 같은 홈이 파여 있다. 이 홈은 선수가 나아갈 때 몸을 스치는 공기를 분산시켜 뒤쪽 에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공기 소용돌이가 발생하면 선수의 몸을 잡아 끌어 속도 저하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또한 공기저항 최소화를 위해 허리를 굽히고 주행하는 스피드스케이팅의 경기복은 아 예 허리를 굽힌 상태의 신체구조에 맞춰 재단 이 돼 있다. 게다가 우레탄 라미네이트 등의 소재를 사용, 허리가 들리지 않게 잡아준다.
캐나다 대표 팀은 몸을 더 강하게 붙들 수 있도록 경기복에 X자형 밴드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대다수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한 직후 곧바로 상의의 지퍼를 내리고서야 허리를 편하게 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 아닌 T팬티 논란으로 화제가 된 일본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복 역시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제작사인 미즈노는 T팬티형 덧감의 실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이 경기복이 4년여에 걸친 연구의 결과며, 공기역학적 성능을 높이고 선수의 피로도를 낮춰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비밀병기라고 자화자찬한 미즈노의 주장에 비해 일본 선수들의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과학기술 알아야 메달 보여
과학기술은 썰매경기에도 어김없이 숨어 있다. 반원형 얼음트랙에서 플레이하는 이들 경기 역시 일반 빙상경기와 마찬가지로 스피드가 생명이다. 그래서 각 활주용 썰매들은 공기 역학적 특성을 고려해 설계돼 있다. 썰매의 날 관리도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특히 야외 에서 벌어지는 경기인 만큼 날씨와 기온에 따른 빙질의 변화가 심해 썰매의 날은 스케이트 의 날보다 관리가 한층 까다롭다.
이 같은 이유로 각국 선수단은 경기장의 날씨를 분석하고 그에 맞춰 장비를 세팅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가장 기본은 기온이 떨어져 빙질이 딱딱해지면 날을 좀 더 날카롭게 갈아 수막 형성을 돕고, 반대의 상황에선 상대적으로 두꺼운 날로 경기에 나서는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영국은 한층 정밀한 분석을 시도했다. 지난 2008년 스켈레톤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자이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크리스탄 브럼레이를 현지에 파견, 빙질 분석을 맡긴 것.
브럼레이는 대회기간 동안 얼음의 밀도, 비중 등을 측정하는 액체비중계를 들고 트랙의 경도를 측정, 선수단에 최적의 날 관리 비법을 전달했다. 이 덕분에 영국의 에이미 윌리엄스 선수는 금메달을 땄다. 금메달 1개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는 영국이 동계올림픽 개인종목에서 30년 만에 처음 획득한 금메달이다.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미국 스켈레톤 선수들의 경우 뉴욕대학 티모시 웨이 박사 팀이 개발한 스켈레톤 시뮬레이터로 자세를 교정하기도 했다. 이 장비는 썰매의 위치와 선수의 자세에 따른 바람의 저항성을 분석해줘 트랙의 위치에 따라 선수가 취해야할 가장 적합한 자세를 연마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외에도 빙상경기에서 빙질이 중요한 만큼 설상경기에서는 설질이 승리의 핵이다. 눈 의 온도, 습도에 의해 스키의 속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설질에 따라 유연한 스키를 신을지, 탄력 있는 스키를 신을지가 결정 된다. 또한 스키 및 스노보드에 어떤 종류의 왁스를 칠할지도 정해진다. 이 모든 조건을 최적화시키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최대 10초 이상의 기록을 단축할 수 있다.
캐나다 스키 대표 팀은 신소재인 테플론으로 제작한 스키와 스노보드를 들고 나와 프리스타일 스키와 스노보드에서만 금메달 2개 와 은메달 2개를 획득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과학기술의 활약이 비단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동계와 하계를 막론하고 모든 스포츠 경기에서 과학기술은 이미 메달 획득에 필요충분조건이 됐다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 한다. 이를 감안하면 과학기술 강국이 곧 스포츠 강국이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닌 셈이다.
캐나다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종합 1위를 목표로 지난 2005년 1억1,800만 달러 규모의 '시상대 점령(Own the Podium)'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기술들이 새로 개발됐고 실전에 접목됐다. 시상대 점령 프로그램과 관련한 비밀 5가지를 알아본다. 1. 지난해 캐나다의 봅슬레이 대표 팀은 항공우주학자인 봄바디아 박사가 개발한 새로운 썰매를 테스트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결국 대표 팀은 예전 썰매를 가지고 대회에 참가했다. 2. 연구자들은 열감지카메라와 동작 분석 장치를 가지고 컬링 경기를 위한 최선의 컬링스톤 투구 자세, 공략 각도, 회전률, 빗자루 질 기술 등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팀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강력한 비질이 생각만큼 얼음을 많이 녹이지 못하며, 대신 작은 얼음 알갱이들을 다량 만들어내 컬링스톤의 거리향상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3. 한 연구팀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의 코너링 연습을 위해 일명 '선수 발사장치'를 만들었다. 새총처럼 선수들을 쏘는 이 장치를 활용하면 직선주로를 달리며 미리 속도를 높여야 하는 불편함 없이 곧바로 코너링 연습이 가능하다. 4. 스키, 스노보드 등 설상경기 선수들을 위해 스키와 스노보드의 그라인딩 방법과 왁싱 기법의 개발을 총괄 주도한 곳은 캐나다 연구팀이 아닌 영국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연구팀이었다. 5. 캐나다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와 크로스컨트리 선수들은 주행기술 연마를 위해 코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캘거리 대학에 설치된 대형 트레드밀 위에서 훈련을 했다. |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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