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바늘구멍 사진기와 비슷한 원리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세기경 천막생활을 하던 아랍인들이 천막에 뚫린 구멍 사이로 들어온 빛이 맞은 편 벽에 거꾸로 비치는 것을 보고 어두운 방, 즉 암실을 만들어 일식을 관찰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벽에 비치는 영상을 밑그림을 그리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갈수록 소형화돼 오늘날의 카메라가 됐는데, 최근에는 필름 없이 사진을 찍고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자료제공: 한국산업기술진흥원 기술과 미래
오늘날 사진기, 즉 카메라는 수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제품 가운데 하나다. 특히 최근에는 필름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됐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휴대폰에도 카메라 기능이 내장돼 있다.
예전에 주류를 이루던 필름 카메라는 이제 퇴조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카메라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름 카메라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과 비교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은 사물에 반사돼 나오는 빛의 파장 가운데 가시광선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카메라는 렌즈를 통해 들어온 모든 파장의 빛을 수용하게 돼 있다. 다만 필름은 사람의 눈과 비슷하게 가시광선 영역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사람의 눈은 홍채의 크기를 통해 빛의 양을 조절한다면 카메라는 조리개의 크기로 조절한다. 조리개는 6각 혹은 8각 모양으로 생겼으며, 조절할 때마다 크기가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그래서 조리개가 많이 열려 빛이 많이 들어오면 사진이 하얗게 뜨고, 반대로 빛이 적게 들어오면 영상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사람의 눈에는 수정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카메라의 블록렌즈와 같이 빛을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수정체는 두께 조절이 가능해 빛을 정확하게 모아주는데, 만일 수정체에 문제가 생겨 빛을 정확히 망막에 모으지 못하면 사물을 선명하게 볼 수 없다. 하지만 카메라에서는 블록렌즈를 두꺼워졌다가 얇아지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렌즈로 거리를 조절해서 정확하게 필름에 영상이 맺히게 한다.
사진의 현상과 인화는 빛에 반응하는 감광 물질이 핵심이다. 보통 할로겐화 원소와 결합된 은, 즉 할로겐화은을 쓴다. 빛의 에너지, 즉 광자가 필름에 도달해 필름 면을 때리면 금속으로 바뀌며 영상을 기록 하고, 현상약품 처리과정을 통해 금속이 까만색으로 변해 눈에 보이 게 된다. 이때 빛의 강도에 따라 금속은 짙어지거나 옅어지게 돼 백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흑백 사진의 원리다.
컬러사진은 할로겐화은에 파란색, 녹색, 빨간색 등 3가지 색소를 결합해서 수많은 색을 표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필수품이 된 카메라는 어떻게 생각해 냈고, 또 누가 발명한 것일까.
일식 관찰에서 시작된 카메라의 원리
카메라를 발명한 사람들에 대해 논하자면 상당히 긴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카메라의 기원 역시 생각보다 훨씬 오래됐다. 카메라는 10세기경 천막생활을 하던 아랍인들이 천막에 뚫린 구멍 사이로 들어온 빛이 맞은 편 벽에 거꾸로 비치는 것을 보고 어두운 방, 즉 암실을 만들어 일식을 관찰한 것이 기원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는 문자로도 확인된다. 11세기 무렵 이슬람에서 활약했던 이븐 알 하이삼이라는 과학자가 쓴 책이 바로 그것.
알하젠이라는 라틴어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 과학자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깊이 연구, 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빛과 사람의 눈에 관해 연구한 '광학의 서'다.
이 책에는 "캄캄하게 닫힌 방의 창문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그 틈으로 태양광선을 받아들이면 빛은 방의 반대편 벽에 부딪쳐 그곳에 태양의 모습이 비칠 것이다. 따라서 눈부신 태양을 직접 쳐다보지 않고도 벽에 비친 태양을 보고 있으면 일식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어두운 방의 벽에 영상을 비춘다면 태양뿐 아니라 다른 풍경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곧 오늘날의 카메라, 특히 바늘구멍 사진기와 똑같은 원리다. 그의 일식 관찰 방식은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쿠라' 로 불리게 됐고, 카메라라는 단어 자체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이후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좀 더 넓은 용도로 쓰이면서 근대적인 카메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당대의 저명한 예술가 겸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및 같은 이탈리아 과학자인 지암바티스타 델라포르타는 경치를 그릴 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고, 화가들에게 이를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하지만 카메라 옵스쿠라는 바늘구멍 사진기 정도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멍이 작으면 빛의 양이 적어 벽에 나타나는 영상이 어둡게 되고, 그렇다고 구멍을 크게 하면 영상 자체가 희미해져 알아보기 어렵게 되는 등 많은 난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지로라노 카르다노는 1550년 카메라 옵스쿠라의 구멍에 볼록렌즈를 끼우면 빛을 집속시켜 보다 밝은 영상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다니엘로 바르바로는 1568년 렌즈 앞에 조리개를 부착해 빛의 양을 조절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보다 개선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지니게 된 사람들은 이제 크기가 좀 더 작고 이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연구에 주력하게 돼 천막이나 가마 같은 모양의 이동식 카메라 옵스쿠라가 등장하게 됐다.
그리고 1657년 독일의 카스파르 쇼트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크기를 오늘날의 카메라처럼 작은 상자 수준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2개의 상자를 이어 붙여 늘이거나 오므리면서 렌즈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한 것.
1685년 뷔르츠부르크의 수도승인 요한 찬은 젖빛 유리에 영상이 비춰지도록 하고, 보다 정교하게 고안된 휴대형 카메라 옵스쿠라를 제작해 오늘날 리플렉스 카메라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했다.
리플렉스 카메라의 작동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렌즈를 지나 입사한 빛을 렌즈 뒤의 광축에 대해 45° 각도로 설치된 거울로 반사 및 굴절시켜 초점 스크린에 영상을 맺게 한다. 그 다음 구도와 피사체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한다.
현상과 인화 가능한 카메라
17세기 말엽의 카메라 옵스쿠라는 이처럼 광학적 원리나 외관 등에서 오늘날의 카메라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촬영을 통해서 사진을 얻을 수는 없었다. 사진이 나오려면 필름에 의한 현상과 인화 등의 과정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꽤 복잡한 화학적 공정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인물, 즉 필름에 의한 현상과 인화 등의 요소까지 갖춘 근대적 카메라의 발명자로는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와 조셉 니엡스가 꼽힌다.
다게르는 당시 이름난 풍경화가로 카메라 옵스쿠라에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궁리 끝에 종이 등의 필름에 현상, 인화하는 방안을 연구하게 됐다. 당시의 사람들은 빛을 받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는 질산은 용액을 이용해 주로 연구했지만 이 방법에는 2가지 난점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날의 필름과 마찬가지로 종이 위에 복사된 색이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흰색과 검은색이 뒤바뀌는 것. 또 하나는 밝은 곳에서 보면 곧 종이 전체가 까맣게 변해 버려 애써 찍은 것이 아무 소용없게 돼 버린다는 것.
니엡스는 빛을 쬐면 굳어지는 아스팔트의 성질을 이용했다. 즉 은으로 도금한 금속판에 아스팔트를 칠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사진을 찍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촬영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던 중 역시 새로운 사진 촬영법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다게르를 알게 돼 두 사람은 공동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니엡스는 몇 년 후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다게르는 본업인 화가 일까지 제쳐 두고 사진 연구에만 전념한 결과 1837년 드디어 만족할 만한 사진 촬영법의 개발에 성공했다.
그가 개발한 방법은 은판에 요오드의 증기를 쪼아서 표면에 요오드화은의 얇은 막을 형성한 다음 영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은증기를 이용해 현상 및 정착하는데, 이 방법은 그의 이름을 따서 다게레오타입이라고 불렸다. 또한 은판을 쓰지 않고 질산은 용액을 칠한 종이에 촬영한 다음 소금물이나 요오드화칼륨 용액에 담가 현상, 정착하는 톨보트법도 비슷한 시기 영국인 윌리엄 폭스 톨보트에 의해 선보이게 됐다.
1851년에는 프레데릭 스코트 아처에 의해 콜로디온을 이용하는 습판법이 개발돼 촬영의 감도를 한층 높일 수 있었다. 다만 이 방식에서는 감광막이 젖어 있을 때 촬영과 현상을 끝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습판막을 아라비아 고무액이나 젤라틴, 카세인 등의 용액으로 덮어 건조시키는 이른바 건판법도 새로 개발됐다. 그리고 이 무렵의 카메라들은 감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기 때문 에 노출시간을 짧게 조절할 수 있는 셔터가 카메라에 장착되기에 이르렀다.
일반 대중을 위한 카메라의 탄생
19세기 말엽까지 여러 가지의 사진법과 카메라가 다양하게 소개됐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조지 이스트먼에 의해 발매된 종이 롤필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촬영 직후에 바로 현상, 인화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야외촬영을 하려면 사진 기사들은 무거운 카메라와 함께 각종 현상장비들을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게다가 필름의 현상, 인화 과정은 사람 몸에 해로운 여러 가지 화학약품을 써서 몇 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은행원으로 일하던 이스트먼은 사진에 상당한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암실을 짊어지고 다니게 될 경우 전문가라면 몰라도 일반 대중들이 카메라를 이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 이에 따라 보다 손쉽게 사진을 찍는 방법을 찾게 됐다. 몇 년 동안 노력하던 그는 1884년 그 당시 쓰이던 유리 감광판 대신 종이를 말아서 쓰는 롤필름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스트먼은 회사를 차려 본격적으로 카메라 사업에 나섰는데, 1888년에는 종이 필름을 장착한 코닥 카메라를 선보이게 됐다. 이 카메라는 고객이 사진을 다 찍은 후 이스트먼의 회사로 보내면 현상, 인화를 마친 사진과 새 필름을 장착한 카메라를 돌려주는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스트먼의 코닥 카메라는 인기리에 판매됐고, '단추만 누르세요. 뒷일은 저희들이 다 맡겠습니다'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와 함께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다.
필름 없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
20세기 들어와 1안 리플렉스 카메라와 2안 리플렉스 카메라 등이 잇달아 출현했고,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주는 오토포커스 카메라도 새롭게 개발됐다.
1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하나의 렌즈만 사용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과 찍히는 것이 동일하다. 하지만 하나의 렌즈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셔터가 닫히는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2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2개의 렌즈를 사용하기 때문에 셔터가 닫히는 순간에도 보이기는 하지만 보이는 것과 찍히는 것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2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 최근에는 밀려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 카메라가 선보이게 됐는데, 디지털 카메라는 영상이 필름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정보로 저장된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는 촬영한 영상을 현상, 인화할 필요 없이 컴퓨터 등에서 바로 보거나 출력할 수 있어 필름 없는 카메라 시대를 열었다.
디지털 카메라의 핵심부품은 전하결합소자(CCD). 이는 반도체를 이용한 집적회로의 일종으로 빛을 전기신호로 바 꿔주는 기능이 있다. 전하결합 소자를 발명한 과학자는 윌러드 보일과 조지 스미스인데, 이들은 미국의 벨연구소에서 근무하던 1969년 세계 최초로 전하결합소자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에 흑백 전하결합소자 카메라가 선보이게 됐다.
금속판으로 이루어진 전하결합소자는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문에 필름을 사용하던 종래의 카메라 기술에 다시 한 번 혁명을 몰고 오게 됐다. 보일과 스미스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외양과 광학계 등은 기존의 필름 카메라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영상을 아날로그 데이터로 저장하지 않고 비트맵으로 분할해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한다. 또한 컴퓨터의 영상 데이터와 호환돼 편집, 수정, 저장, 송신, 출력 등이 가능해 가히 정보화 시대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미래에도 끊임없이 발전하게 될 카메라는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근한 벗이자 과학기술과 예술을 잇는 가교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글_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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