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발생가능한 모든 종류의 재난에 대비해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럭셔리 지하벙커 '테라 비보스 (Terra Vivos)'. 이곳에 가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바스토우에서 모하비 사막으로 차를 몰았다. 80㎞를 달리자 아무런 표시도 없는 자갈길을 지나 철조망이 둘러쳐진 황량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콘크리트 블록으로 지어진 작은 창고 같은 건물 속으로 들어가니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계단 아래에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야심찬 사나이 로버트 비치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환영의 인사와 함께 등 뒤에 있던 1,360㎏의 방폭문을 손으로 두드리며 이렇게 물었다. "가족이 있으신가요?"
그의 다음 질문은 생명보험에 가입했냐는 것이었다. 현재 가입한 생명보험보다 더욱 좋고 확실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면 현 보험료의 10배를 지불할 수도 있을지를 물었다. 경제적 여력이 된다면 누구나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치노가 서 있는 이 시설은 냉전시대에 건설된 것으로서 지난 1965년 미국의 유명 이동통신기업 AT&T가 핵공격으로부터 통신 인프라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활용될 것이다. 바로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1인당 5만 달러를 지불하면 테라 비보스의 입주권을 살 수 있다. 미성년자는 50%를 할인해준다. 입주희망자들은 벙커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의 보증금으로 우선 5,000달러를 선납해야 한다. 이후 잔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8월 현재 바스토우 벙커의 75명을 포함, 이미 수백명이 예약을 마쳤다.
지하의 호화 유람선
테라 비보스는 지하벙커 네트워크다. 비치노는 미국 내 주요 대도시로부터 240~320㎞ 거리 내에 최소 19개 이상의 벙커를 만들 계획이다. 각 벙커들은 기후변화, 핵전쟁, 심지어는 우주 환경의 변화 등으로 촉발된 뜻하지 않은 인류 종말의 대재앙에서도 안전하도록 콘크리트와 강철로 설계될 예정이다. 입주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재앙이 발발했을 때 다음날 아침에 피난할 곳이 확보되는 것이다. 비치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제가 파는 것은 생명 보험이 아닙니다. 생명 보장입니다."
유사시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테라 비보스가 갖춘 물리적 조건은 놀랄 만큼 대단하다. 바스토우의 벙커는 16㎞ 떨어진 곳에서 50메가톤급 핵폭탄이 폭발해도 견딜 수 있다. 또한 시속 725㎞의 강풍, 매그니튜드 10의 지진을 이겨낸다. 지면 온도가 10일 동안 676℃로 유지돼도 안전하며 홍수가 일어나도 3주일을 버틸 수 있다. 비치노는 곧 공기정화시스템을 설치, 화생방 공격도 막아낼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벙커 속에는 최대 135명의 사람들이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식량과 의류가 비축된다. 지하벙커라는 일반적 이미지와 달리 이곳에서의 피난생활은 유람선처럼 좁지만 호화로울 것이라는 게 비치노의 설명이다. 실제로 비치노는 테라 비보스의 내부 인테리어를 위해 대만의 요트 제조업체에 주문 해 부품들을 공급받고 있으며 TV, 세탁기, 수세식 변기 등 콘도 수준의 편의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그는 언제나 기이한 비즈니스에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 22세였던 지난 1977년는 한 주류회사의 이벤트에 쓸 거대한 팽창식 테킬라 병을 제작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포춘이 뽑은 500대 기업 중 200개사를 고객으로 맞이했다. 팽창식 장비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그는 회사를 매각하고 새로운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유럽과 하와이를 아우르는 리조트들의 지분소유권(fractionalownership)을 매매하는 회사였다. 지분소유는 일종의 공동소유제도로서 구매자가 전체 시설 중 일부만 소유하고 나머지는 공동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비치노가 테라 비보스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지난 1980년 마야 달력 복제품을 접하면서다. 마야 달력은 음모론자들이 오는 2012년 12월21일 지구가 종말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주장하는 고대 달력이다. 비치노는 그 순간을 명확히 기억한다.
"달력을 본 뒤 광산을 대피호로 개조, 1,000명의 사람들이 장기간 생활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물품을 구비해서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0여년이 지나 올해 그는 바스토우 벙커를 인수했다. 또 한 이곳 외에도 6개의 지하벙커를 더 가지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와 펜실베이니아주에 각 1개소, 뉴욕주에 2개소, 그리고 미국 중서부 지방에 2개소가 있다고 한다. 인수금액은 비밀이다. 대피소의 정확한 위치 역시 밝히지 않았다. 무단 침입자들로부터 입주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마야 달력에서 말한 종말이 2년 뒤로 다가왔지만 비치노는 종말론자가 아니며 2012년 멸망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2013년이 더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2013년에 태양 활동이 대폭 증가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 폭풍이 극도로 강해지면 지구에 엄청난 전자기 펄스가 쏟아져 전력망을 붕괴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상태를 어떻게 모면한다 치더라도 언젠가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질 수도, 치료제가 없는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핵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 비치노의 말이다. "2012년의 지구멸망 시나리오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자극제에 불과합니다. 테라 비보스는 앞으로 200년 동안 언제든 사용 가능합니다."
조화로운 공동체의 건설
비치노는 필자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오래 묵은 경유 냄새로 인해 이 벙커가 냉전시대의 산물임이 다시 상기됐다. 비치노는 '핵폭발 감지기'라고 적힌 스위치를 가리켰다. 이 스위치를 작동시키면 감마선 탐지기가 작동된다. 감마선 탐지기는 160㎞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핵폭발을 감지, 외부와 연결된 모든 공기 흡입구를 닫는다. 그는 감지기를 시험가동 해 본 후 자랑스레 말했다. "이 장치는 지금도 작동합니다."
원래 폭격에 대비한 대규모 방공호의 건설은 주로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지난 1962년 미 정부가 '그린 아일랜드(Green Island)' 프로젝트라는 명칭으로 웨스트버지니아주 그린 브라이어의 휴양지 지하에 건설한 대형 벙커가 그 실례다. 정부의 지속성 확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벙커는 방사능 낙진을 막을 수 있으며 국회의원 전원과 600명의 직원들이 45일간 생존할 수 있는 물자가 보관돼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소규모의 기업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냉전시대의 군사적 유물을 활용하지만 몇몇 기업은 아예 직접 벙커를 만들기도 한다. 텍사스주 소재 래디어스엔지니어링의 경우 2,000명이 5년간 생활할 수 있는 유리섬유로 만든지하대피소 건설을 추진 중이다.
캔자스주의 폐기된 아틀라스 미사일 기지를 지하 7층의 방사능 낙진 대피소로 개조 중인 서바이벌 콘도 프로젝트의 관리자 래리 홀은 "냉전시대에 지어진 대피소야말로 우리 사업에 더없이 중요한 인프라"라고 말한다. 이 회사가 개조에 투자할 비용은 한 층당 175만 달러 규모다.
콜로라도의 또 다른 대피소 판매 업체인 하든드 스트럭처스의 브라이언 캠든 사장에 의하면 지난 2005년 이래 벙커의 판매가 40%나 증가했다. 그는 비치노의 벙커 개조를 돕고 있으며 13개소의 벙커를 더 건설하고 있다. 배선, 발전기, 공기 필터 교환 등 비치노가 계산한 바스토우 벙커의 개조비용은 약 350만 달러다.
테라 비보스 고객들의 입주 동기는 다양하다. 40세의 전직 엔지니어인 제이슨 호지는 훌륭한 공기정화시스템이 마음에 들어 이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저는 LA에서 200㎞ 떨어진 곳에 삽니다. 바람이 LA에서 저희 동네로 불기 때문에 LA에 핵폭탄이 터지면 몇 시간 뒤 방사능 낙진이 집 위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56세의 호흡기 치료사 스티브 크레이머의 경우 재난 이후 생겨날 약탈자들을 더 우려하고 있다. 때문에 탱크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강화 철문을 본 후 기꺼이 보증금을 지불했다. 사실 테라 비보스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힌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조화로운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까다로운 일이다. 그래서 비치노는 입주자를 까다롭게 선택한다. 지금껏 지원자가 5,000명 이상이었지만 수백 명 만이 그의 심사를 통과했다.
비치노는 이렇게 말한다. "입주자 중 누구도 한 벙커 속에 의사만 200명이 있고 배관공은 한 명도 없는 상황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화장실이 고장나는 것만으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구 생명 부활의 씨앗
같은 이유로 입주자들은 테라 비보스에 총기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내부에서 휴대할 수는 없다. 모든 총기는 입구에서 수거돼 벙커를 나갈 때까지 보관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도 별도의 보안요원에 의해 유치장에 감금된다.
비치노는 자신의 고객뿐만 아니라 지구 생물종 전체의 생존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가급적 많은 생물종의 DNA 표본을 수집, 벙커 속 냉장고에 보관할 계획이다. 정말로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치면 그의 벙커는 인류를 보존하고, 지구에 다시금 생명의 씨를 뿌리는 근거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벙커 구경이 끝나갈 무렵, 비치노는 낡은 제어판을 보여 줬다. 그 제어판을 보니 벙커의 모든 시스템들이 여전히 전반적으로 잘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벙커 내부의 배선 일부가 단락됐고 변기는 작동되지 않았다. 특히 현재 설치되어 있는 750㎾급 디젤발전기는 환경적인 문제 때문에 캘리포니아주의 법률로 작동이 금지돼 있다. 이 벙커가 비치노의 약속대로 유람선만큼 쾌적해지려면 비치노의 말을 그대로 믿더라도 최소한 3개월은 더 소요된다. 그리고 그 외의 19개 벙커는 앞으로 18개월은 지나야 준비가 끝난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 대다수 과학자들은 대재난이 목전에 닥치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마야인들은 행성의 배열이 지구 자기장을 역전시켜 대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하지만 미국 해양대기청(NOAA)의 우주기상 관측센터장인 톰 보그던은 "과거에도 행성들은 여러 차례 그렇게 정렬됐지만 그 때마다 대재앙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확실한 것은 2012년에는 행성 간 정렬이 없다. 지구 근처로 날아올 소행성도 현재까지 탐지된 것은 오는 2029년에나 찾아오게 될 '아포피스' 단 하나 뿐이다. 직경 300m의 아포피스가 지구와 충돌하면 분명 대재앙이 일어나겠지만 미 항공우주국(NASA)의 지구근접천체 프로젝트에 소속된 스티브 치슬리 박사는 그 확률이 25만분의 1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 멸망을 초래할 분명한 위협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없다. 기후 변화가 대재앙을 일으키는 것도 최소 수십년 후의 일이다. 그리고 지난 1월 핵과학자협회는 인류 멸망의 시계 분침을 1분 뒤로 돌렸다. 이러한 얘기를 듣고도 비치노는 테라 비보스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꺾지 않는다. 대재앙의 위험은 언제나 상존한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핵무기를 발사한다거나 지구와 충돌할 소행성을 너무 늦게 발견하는 등의 상황 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반문한다. "사람들은 집에 소화기를 준비합니다. 소화기를 준비해 놓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나요? 소화기로 불을 꺼야할 상황이 닥치지 않는다고 해서 소화기의 존재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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