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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의 데스노트 - 9번 교향곡의 저주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는 오랜 미스터리가 하나있다. 바로 9번 교향곡의 저주다. 지난 19세기부터 시작된 이 저주는 9번 교향곡을 작곡한 작곡가들이 그 다음 작품을 만들기 전에 목숨을 잃는 일이 빈발하면서 시작됐다.
실제로 베토벤을 포함한 많은 작곡가들이 이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정말로 9번 교향곡에는 우리가 모르는 저주의 굴레가 씌워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까.


베토벤, 슈베르트, 드보르작, 브루크너, 말러. 이들은 세계 음악사에 한 획을 그 은 교향곡 작곡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것 말고도 공통점이 또 있다. 하나 같이 9번 교향곡을 작곡한 후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9번 교향곡과 관련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음악가 쇤베르크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9번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너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9번 교향곡 그리고 돌연한 죽음

9번 교향곡의 저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꼽히는 베토벤으로부터 시작된다. 잘 알려졌다시피 베토벤의 삶은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특히 30세 이후에는 시신경 이상으로 청력까지 완전히 상실한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가운데서도 꿋꿋이 작곡에 전념하며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교향곡 '영웅', 운'명', '전원'을 비롯해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 등 전 세계인으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는 작품도 다수다.

한 지휘자는 베토벤의 음악성을 칭송하며 "베토벤의 곡을 지휘할 때면 신과 대화하는 것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베토벤의 인생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칭해지는 작품은 단연 9번 교향곡 '합창'이다.

장엄하고 웅대한 이 곡이 완성되기까지 자그마치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베토벤은 20대 초반 인 지난 1793년부터 이 곡을 구상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우상으로 여겼던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기 위해 메모를 해뒀는데 50세가 훌쩍 넘은 지난 1822년 런던필하모니에서 교향곡 작곡 의뢰를 받고 나서야 마침내 합창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완성해냈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할 당시의 유명한 일화도 있다.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연주가 끝난 뒤에도 악보만 바라 보고 있자 단원 중 한 명이 그의 소매를 끌어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몸을 돌리게 했고, 그 광경을 바라본 베토벤은 오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이다.

9번 교향곡의 대성공에 이어 10번 교향곡을 구상하던 베토벤이 갑자기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사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폐렴의 후유증인 폐수종 때문이라고도 하고 과도한 음주에 따른 간경화라는 주장도 있다.

한 의사는 류마티스로 인해 인체의 각 기관에 염증이 생기면서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정말 그는 9번 교향곡 저주의 희생양이었을까.

슈베르트로 이어진 저주

그 진실 여부를 떠나 저주는 슈베르트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오페라, 실내악, 피아노곡, 교회음악, 가곡 등 전 부문에 걸쳐 무려 998곡의 작품을 남겼다. '가곡의 왕'이라는 타이틀의 주인공답게 '들장미', '숭어' 등 가곡만 무려 633곡에 이른다. 무엇보다 슈베르트는 당대 음악계의 거성이었던 베토벤 을 깊이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인지 슈베르트 도 평생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내며 음악활동을 했다. 슈베르트의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베토벤과 비교해봐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랬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사망한 그 이듬해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티푸스균에 의한 질환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각에서는 매독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놀라운 점은 그 역시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9번 교향곡 '그레이트'를 완성한 직후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10년 이상을 고심해 만든 이 작품은 오늘날 웅장한 선율 속에 깊고 풍부한 감정이 깃든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정작 슈베르트 본인은 죽기 전까지 이 곡이 연주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그가 8번 교향곡 '미완성'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슈베르트 사망 후 10여 년이 지나 독일의 음악가 슈만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9번 교향곡을 발견하게 된다.

슈베르트의 형을 만나 먼지투성이 악보 하나를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레이트였던 것. 당시에만 해도 곡이 너무 길고, 동일한 리듬만 계속 반복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비웃음까지 받았던 이 곡은 슈만의 헌신적 노력으로 지난 1839년 초연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슈베르트도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 셈이다.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였음에도 말이다.

방심이 부른 죽음

두 명의 거장을 앗아간 9번 교향곡의 저주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브루크너와 드보르작이 다음 희생양이다. 19세기 후반 최고의 교회음악가로 평가되는 브루크너는 '레퀴엠', '미사 솔렘니스' 등 미사곡뿐만 아니라 긴 교향곡을 다수 작곡하기도 했다.



30세의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에 뛰어든 그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예순이 넘어 작곡한 7번 교향곡과 8번 교향곡을 발표한 후였다.

말년에는 쇠약해진 몸으로 옛 교향곡의 개작이나 퇴고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진 브루크너. 그런 그는 9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중 돌연 사망하고 만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9번을 완성하고 10번을 작곡하던 도중 사망했던 것과 비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은 모두 10곡이지만 어렸을 때 작곡한 한 곡이 뒤늦게 발견되며 1번 교향곡임에도 10번 교향곡이 된 것이다. 만약 작품완성 순서에 맞춰 10번 교향곡을 1번으로 하고 나머지 교향곡들을 모두 한 단계씩 뒤로 밀어버릴 경우 브루크너 역시 9번 교향곡을 작곡한 뒤 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된다.





체코의 국민적 음악가로 추앙받던 드보르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민족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을 바탕으로 자국은 물론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으며 슈베르트와 비견될 만큼 독창성이 풍부한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지난 1904년 신장병으로 사망한 그의 마지막 작품은 그 유명한 신세계 교향곡이다. 예상했겠지만 이는 그의 9번째 교향곡이다. 이쯤 되면 작곡가들에게 9번 교향곡은 두려운 징크스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를 극도로 두려워 해 갖은 애를 쓴 인물도 있다.

당대 최고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구스타프 말러다. 여러 편의 교향곡을 작곡하며 베토벤 이후 가장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작곡가로 인정받았던 그는 9번 교향곡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 되면서 저주를 피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작곡한 교향곡에 번호를 붙이지 않고 단지 표제만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번호가 없는 교향곡 '대지의 노래'가 탄생했다. 하늘에 뜻이 닿았던지 이 비책은 통했다. 교향곡 완성 후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10번째 교향곡을 무사히 완성했다.

하지만 이때 그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저주를 완전히 피했다고 믿고 10번째 교향곡에 제9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이후 말러는 10번 교향곡 작곡에 착수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심장병 악화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끝내 9번 교향곡의 저주로부터 무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주는 없다… 우연의 일치?

이처럼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만큼 정교한 사건들의 연속은 9번 교향곡의 저주에 대해 심리적인 신빙성을 준다. 하지만 이를 저주로 단정 짓기에는 분명 모자란 구석이 있다.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보란 듯이 피해간 이들도 적 지 않기 때문이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하이든은 77세까지 장수하며 무려 100여곡이 넘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 또한 위령미사곡 '레퀴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교향곡 작품은 총 41곡이나 된다.

구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 쇼스타코비치도 유명을 달리한 70세까지 15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물론 세 사람 모두 9번째 교향곡에 당당히 9번을 달았다.

이들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많은 작곡가들이 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무사히 여생을 보냈다. 그러므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그저 신기한 우연의 일치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한 실정이다.

사실 아무리 뛰어난 작곡가라도 오케스트라를 위한 장대한 스케일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천재라 칭하는 작곡가들조차 한 곡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데 길게는 수십 년을 소요했다. 그러니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는 일임에 틀림없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가 원인이 돼 사망에 이르렀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감안할 경우 앞서 언급한 쇤베르크의 발언도 저주 자체를 염두에 뒀다고 하기 보다는 교향곡을 9곡이나 작곡 할 정도면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신의 에너지가 소진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사랑해마지않는 여러 작곡가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9번 교향곡을 작곡한 후 죽음을 맞았다는 점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화제 거리임에 틀림 없다.

19세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오늘날까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 증명 여부를 떠나 9번 교향곡의 저주가 사실인지 혹은 뒷날의 호사가들이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이야기인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또 지금에 와서 그것을 가려내는 일은 정작 별반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저주로 세상을 떠났다는 그 작곡가들의 마지막 9번 교향곡들은 하나같이 명곡이며 그들의 음악 인생이 집약적으로 녹아있는 걸작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쩌면 9번 교향곡의 저주는 아낌없이 자신을 불태운 열정과 노력의 다른 이름은 아닐는지.

박소란 기자 psr@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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