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3> '무역인' 장보고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1.13 16:55:41장보고(?~846)는 전통시대 우리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무역인’이다. 중국(당)과 일본·신라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부를 쌓았다. 독자적인 군사력까지 있었으니 해상왕국을 건설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 광장에는 장보고의 활동을 새긴 조각이 있는데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어릴 때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신라에 귀국해 전남 완도에 ‘청해진’이라는 근거지를 만들고 해적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2> 문무왕 김법민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1.06 13:17:36661년부터 681년까지 신라 왕위에 있으면서 삼국통일을 완수한 이가 문무왕 김법민이다.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그의 수중릉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바다에서는 왜의 침입을 물리쳤다. 그의 시호가 ‘문무(文武)’인 것도 이채롭다. ‘문’과 ‘무’ 모든 측면에서 뛰어났다는 의미로 당시 신라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던 군주였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듬해에 왕위에 올랐는데 유민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1> 원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0.30 18:59:56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지배계급의 필요에 따라서였다. 다양한 토착종교로 분립해 있던 각 소국을 신라와 백제·고구려가 각각 통합하는 과정에서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삼국통일을 위해 또 새로운 단계가 요구됐다. 피지배 민중까지 흡수하는 과정이다. 원효(617~686)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고 한다. 불교가 국민종교가 된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0> 계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0.23 12:09:42백제 말기에 성충이나 흥수 등 인물이 많았지만 대부분 계백(?~660)을 으뜸으로 친다. 황산벌 전투라는 장렬한 최후 때문이다. 결사대 5,000명으로 신라의 5만 대군과 승산 없는 싸움을 했다. 말이 좋아 ‘결사대’지 패망하기 직전 백제의 군사력이 그 정도뿐이었다는 해석이 보다 정확하다. 계백의 당시 벼슬은 2등급인 달솔. 최후의 위기에도 백제는 힘을 모으지 못하고 분열했다. 지금의 논산에 위치한 황산벌이 뚫리자 바로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9> 김유신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0.16 18:50:03김유신(595~673)은 신라 삼국 통일 최대의 공로자다. 7세기 삼국 통일이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고조선 붕괴 후 혼란스러웠던 한민족의 정통성을 세우고 유지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 김유신은 신라에 병합된 적국(가야) 출신으로 차별을 받는 상황에서 이러한 성과를 냈다.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자신의 집을 지나치면서도 가족을 만나지 않은 일화 등 스스로에 대한 절제가 뛰어났다. 신라는 적국 출신을 지배계급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8>을지문덕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0.10 03:16:23을지문덕은 고려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두 번째로 등장한다. 신라정통론자인 김부식도 을지문덕의 공로를 인정한 셈이다. 첫 번째는 김유신이다. 을지문덕은 612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진행된 수나라의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면서 한민족 역사상 최고 영웅이 됐다. 수나라는 중국 한나라(후한)가 분열하고 400년 만에 들어선 통일왕조다. 즉 수나라의 침공은 한나라 무제의 고조선 침공(기원전 108년) 이후 최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7> 무왕 부여장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9.25 18:16:06무왕(武王)은 백제 30대 국왕으로, 원래 이름은 부여장(?~641)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의 주인공. 평민이었지만 신라의 공주인 선화를 꾀어 결혼하고 또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이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왕족인 부여씨로서 29대 법왕의 아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스캔들이 필요할 만큼 국왕 즉위가 어려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호가 ‘무’라는 데서 말해주듯 그의 치세는 신라와의 전쟁으로 점철됐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6>고구려인의 기상 보여준 온달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9.18 17:58:59“자꾸 우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정략결혼을 싫어한 공주 평강은 진짜 그를 찾아간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라는 이야기로 잘 알려진 온달(?~590)은 고구려의 활력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일화가 실린 ‘삼국사기 온달전’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어쨌든 평민인 그가 국왕의 사위이자 군사령관이 되는 데는 뛰어난 무예 실력과 지략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고구려로서는 북방과 남방에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5>백제의 부흥 꿈꿨던 성왕 '부여명농'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9.11 11:03:07백제 성왕(聖王)은 도전과 응전, 그리고 좌절을 응축한 인물이다. 이름은 부여명농(?~554)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다. 시호가 ‘성’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사서에는 그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다고 적혀 있다.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중흥을 도모한다. 551년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쳐서 한강유역을 회복하지만 553년에는 신라에 빼앗긴다. 복수심에 불타며 신라를 공격하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4>6세기 망명음악가 '우륵'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9.04 11:42:14우륵은 가야 출신이지만 신라로 망명해 6세기 중엽에 꽃을 피운 음악인이다. ‘삼국사기’ 기록에도 불구하고 생몰연대나 출생지는 불명확하다. 그가 정리한 음악과 춤·노래 등은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발전했고 이는 곧 우리 고유 음악의 기초가 됐다. 우륵은 보통 가야금을 만들고 보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원래 그의 음악성은 대가야(지금의 경북 고령)를 기반으로 성장했는데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에 통합된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3> 박제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8.28 18:21:07“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외치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 박제상(362~418)의 동상이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시 효충사에 있다. 박제상은 지금으로 하면 외교관의 역할을 했다. 고구려와 왜(일본)에 각각 인질로 잡혀 있던 당시 신라 국왕의 동생들 구출을 시도했다. 고구려에서는 성공했고 왜에서는 인질은 구출했으나 본인은 체포되고 만다. 왜왕의 회유에 대해 한 말이 앞의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 광개토태왕 고담덕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8.21 12:46:11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보통 ‘광개토태왕’으로 불린다. 원래 이름은 고담덕(374~412)이다. 만주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사람이다. 또 백제·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국의 침략 후 고조선이 멸망하고 이에 따라 사분오열됐던 한민족에 일체감을 불어넣었다. TV드라마 ‘태왕사신기(2007)’, ‘광개토태왕(2011)’ 등으로 제작돼 일반에도 익숙하다. 사진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단군왕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8.07 14:36:31아이가 “아빠, 단군 할아버지가 누구야?”라고 묻는다. 아빠는 대답한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할아버지야. 200세대 정도 위로 올라가 지금부터 반만년 전 고조선을 세운 분이지.” 단군 할아버지는 한민족의 시조다. ‘삼국유사’에서는 “환인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이 땅으로 내려와 곰에서 사람이 된 웅녀와 혼인해 아이를 낳고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
[역사의 향기/한양도성] <50·끝> 청계천 발원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7.31 18:12:45한양도성은 분지 지형이다. 성곽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등 4개 산의 능선을 연결했다. 이런 산에서 한양도성 안으로 흘러내린 물은 한곳으로 모이는데 그것이 바로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동대문 인근에서 한양도성을 빠져나간다. 이 때문에 청계천의 시작을 찾는 것은 모호한 작업이다. 사진은 북악산 자락의 창의문 바로 아래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 표석이다. 일부러 표석까지 세운 것은 청계천 전체에서 가장 긴 지 -
[역사의 향기/한양도성] <49> 창의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7.24 18:55:34서울의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지점에 창의문(彰義門·북소문)이 있다. 현재 한양도성의 성문 가운데 조선시대 원형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741년(영조 17년)에 다시 세운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시내와 떨어져 일제강점기와 도시 개발의 광풍이 비껴갈 수 있었다. 1623년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을 부수고 도성으로 진입했다. 인조는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오늘의 핫토픽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