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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8> 이황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3.05 16:44:59퇴계 이황(1501~1570)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숭되고 있지만 사상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신유학인 성리학(혹은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동방의 주자’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 유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성리학은 그의 논의를 중심으로 계승되거나 논쟁을 해나간다. 이황 사상의 이해와 발전에는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데 근대 이후 이것이 어려워졌다. 그가 애초 설명한 이(理)와 기(氣)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7> 신사임당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2.26 17:35:24사임당 신씨(신사임당·1504~1551)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율곡 이이 같은 위인을 낳아 길렀고 서예·그림 등 예술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니 전통시대 여성으로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항상 자식이나 남편의 뒤에 가렸으니 아쉬움도 있을 듯하다. 이는 시대의 한계로 남녀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재주를 발휘한 것은 어릴 때부터 무남독녀로 부모의 애정을 받고 학문을 익혔으며 출가 뒤에도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6> 최윤덕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2.19 17:24:30전통시대 사대부의 자격인 문무 겸비(文武兼備)는 최윤덕(1376~1445)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무과 출신의 무반이지만 정치적으로도 탁월해 장수이자 재상인 ‘장상(將相)’으로 불렸다. 군사적으로는 김종서와 함께 북방 4군6진을 개척했고 이종무와 남방 대마도를 정벌했다. 내치에서는 조선 관료사회의 정점인 좌의정(정1품)으로 국무를 통할했다. 당시 바로 위 영의정은 황희였다. 사진은 최윤덕의 고향인 경남 창원의 경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5> 장영실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2.12 17:59:09[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5> 장영실전통시대 최고의 과학자가 노비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조선 세종조의 ‘발명왕’ 장영실을 말함이다. 부산 동래현의 관노로 있다가 재주를 인정받아 궁중에까지 발탁됐다. 이후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해 앙부일구(해시계)·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어냈다. 한때 실학(實學)이었던 성리학이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흐르면서 선입견이 없는 장영실을 포함한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4> 황희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2.05 11:10:54역사상 뛰어난 국왕은 여럿 있었지만 최고의 재상은 단 하나다. 바로 황희(1363~1452)다. 황희는 1389년 과거에 급제했으니 고려의 신하로 출발했다. 고려가 1392년 멸망하자 그도 은둔했다. 하지만 인재를 버릴 수 없다는 주위의 요구가 너무 강했다. 1394년 조선 조정에 출사한다. 어질고 너그러운 품성에 이러한 격변기의 혼란도 그가 균형 잡힌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뛰어난 자질과 성실함으로 국정을 지키며 세종조를 성세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3> 세종 이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1.22 15:18:13세종의 리더십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일반적인 명칭이 ‘대왕(세종대왕)’일 정도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왕으로 평가된다. 이름은 이도(1397~1450)다. 그의 재위 기간은 시대의 혜택과 개인의 역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시기였다. 그가 즉위한 1418년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지 26년이 되던 해로 한 세대가 흐르면서 정국은 안정되고 진취적 기상도 살아 있었다. 여기에 세종 이도의 뛰어난 자질이 보태졌다. 부지런하고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2> 태조 이성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1.15 16:39:36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역 앞 광장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기마상이 있다. 1403년 함흥에 있던 이성계가 한양(서울)으로 돌아오던 중 찾아온 조정의 대신들과 만났다고 한다. 중신회의인 ‘의정부’ 회의가 열렸던 장소라고 해서 지금의 의정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활의 명수였다. 주몽과 비교된다. 동북지방의 호족이었다가 각종 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고려의 실권을 잡았고 이후 왕조교체에 나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1>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1.08 14:53:35한영우 서울대 교수가 지난 1999년 쓴 책의 제목은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정도전(1342~1398)은 신생 조선왕조의 정치와 경제, 사상 등 모든 면에 기틀을 쌓았다. 국가운영 중심에는 ‘민(民)’을 두었다. 정치는 국왕과 사대부의 협치를 주장하고 실제로도 적용했다. 또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지금의 서울)에 지금 우리가 그대로 살고 있기도 하다. 일인전제를 바라는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20> 고려 충신이자 조선 성리학의 시조, 정몽주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7.01.01 18:09:27조선 건국자들의 주류는 성리학자다. 성리학은 ‘신유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유학이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였다. 주희가 개조한 신유학은 고려말에 유입된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성리학(이른바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가 정몽주(1337~1392)다. 고려말 성리학자들은 고려의 사상과 제도를 혁신해야 한다는 데 일치한다. 하지만 왕조 자체를 바꿀 것인가에는 의견을 달리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9> 윤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2.25 14:31:06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한민족의 영토 팽창 정책은 대전환기를 맞는다. 더 이상의 팽창을 멈추고 반도에 안주하는 것이다. 전환점은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이다. 북쪽 방어선의 안정과 영토 확대를 위해 17만명의 대군이 동원된 이 전쟁의 승리로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두만강 너머까지 9성을 쌓는다. 문제는 점차 보수화하는 고려 조정에 있었다. 결국 ‘지키기 어렵다’면서 9성을 포기한다. 이후로 압록강·두만강은 한민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8> 강감찬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2.18 13:38:27강감찬(948~1031)은 고려의 명장이다.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이를 귀주에서 격파했다. 고려 초기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강감찬을 말할 때 보통 ‘장군’이라고 하지만 문·무 구별에서는 그는 문신이다.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주요 관직을 맡았다. 그런 그가 군사들을 이끌고 적과 싸워 대승을 거뒀으니 당시에는 문신과 무신의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는 인재가 대세였음을 알 수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7>서희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2.11 11:55:38서희(942~998)는 고려의 외교관이다. 993년 북방민족 거란이 대규모 병력으로 침입했다. 중과부적이라는 인식으로 항복하거나 영토할양을 하자는 주장이 고려 내부에서 나왔다. 서희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이고 거란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중간의 여진족을 축출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어 협상을 성공시켰다. 이를 통해 강동6주(‘강동’은 압록강 동쪽)를 회복하며 오히려 영토를 넓혔다. 서희의 이 협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6>신숭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2.04 13:28:27신숭겸(?~927)은 고려왕조 최고의 충신이다. 927년 신라를 침입한 견훤의 후백제군과 왕건이 직접 지휘하는 고려군이 지금의 대구에서 맞붙었다. 고려군은 대패했고 왕건도 포로가 될 위기였다. ‘고려사’는 “견훤의 군사가 태조(왕건)를 포위해 매우 위급했다. 그때 신숭겸이 대장이 돼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얼마 전 한 TV 드라마는 신숭겸이 왕건을 탈출시킨 뒤 왕건의 옷을 입고 싸운 것으로 표현했다. 두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5> 태조 왕건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1.27 18:02:36태조 왕건(877~943)의 고려를 실질적인 통일국가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영토와 인구 측면에서 신라보다 더 완전한 통일이었고 외세의 영향력도 배제됐다. 하나로 뭉친 한민족은 20세기까지 다시는 갈라지지 않았다. 왕건의 강점은 포용력. 신라의 자발적 투항을 이끌어냈고 후백제의 견훤은 자신의 아들에게 배신당한 후 오히려 왕건에게 의지했다. 지방 호족들의 저항도 정략결혼이라는 ‘당근’으로 꺾었다. 국호를 ‘고려’ -
[역사의 향기/한국인像] <14> 최치원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11.20 13:24:00변혁기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최치원(857~?)은 12세에 중국으로 유학해서 과거 급제하고 관리까지 지냈다. 귀국한 것은 29세인 885년. 신라는 이미 기울어져 회복불능 상태였다(935년 신라멸망). 최치원은 수많은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골품 귀족체제는 이를 무시했다. 체제에 저항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인가. 하지만 그는 41세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다. 유교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저작을 남겼다. 최치원은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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