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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만월
정치 정치일반 2021.09.15 07:05:00- 김정수 막내네 거실에서 고스톱을 친다 버린 패처럼 인연을 끊은 큰형네와 무소식이 희소식인 넷째 대신 조커 두 장을 넣고 삼형제가 고스톱을 친다 노인요양병원에서 하루 외박을 나온 노모가 술안주 연어 샐러드를 연신 드신다 주무실 시간이 진작 지났다 부족한 잠이 밑으로 샌다 막내며느리가 딸도 못 낳은 노모를 부축해 화장실로 가는 사이 작은 형이 풍을 싼다 곁에서 새우잠을 자던 아내를 깨운다 며느리 둘이 노모의 냄 -
[시로 여는 수요일]아내와 나 사이
정치 정치일반 2021.09.08 07:00:00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
[시로 여는 수요일] 곰 인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9.01 05:50:00박복조 영등포 역사,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불이 훤하다 그 남자, 의자처럼 누워 있다 누군가 가지고 놀던 곰 인형 의자에 버려져 있다 그 남자처럼 버려져 있다 누군가 가지고 놀던 그 남자, 곰 인형처럼 의자에 버려져 있다 그 남자의 가슴에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남자가 의자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세상 바닥에 버려진 곰 한 마리의자 위에 구겨진 한 남자가 누워 있구나. 그 옆에 때 묻은 곰 인형 하나가 쓰러져 있구 -
[시로 여는 수요일] 오늘은 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25 05:50:00육근상 ?아침 겸 즘심을 짜장면이랑 쏘주로 때우고 있는디 옆자리에서 탕수육 노나 먹던 홍안의 여자아이 들이 주뼛주뼛허더니 저어 아저씨예 담배 있으모 두 까치만 주이소 나헌티 하는 소리는 아니겄제 면발에 고춧가루 뿌려 길게 끌어 올리는디 쏘주도 한 잔 털어 놓으려 허는디 아저씨예 으이 담배 있으면 돌라고 예에 있으모 두 까치만 주이소 허는디 금방이라두 눈물 쏟아낼 것 같은 내 어릴 적 닮은 미간과 깊게 파인 간절 -
[시로 여는 수요일] 복숭아에 난 벌레의 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18 05:50:00김안려 구불구불하게 패여 있는 길 하나 보인다 가고 있는 길 어딘지 모른 채 우주의 한가운데를 열심히 기어가고 있다 홈이 파인 둥근 길 접어놓아도 언제, 벌린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잦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같이 불안에 잠기는 붉은 흙 위의 길에서 신발을 신어보기도 전에 저만치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마는 풀무치같이 가벼운 목숨을 놓아 버린다 복숭아밭에서 종일 일하면, 벌레 먹 -
[시로 여는 수요일] 니가 좋으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11 05:50:00김해자 시방도 가끔 찾아와 나를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 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닌 말 덜 자란 토끼풀 붉게 물들이던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
[시로 여는 수요일] 눈사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04 05:50:00강영환 대설주의보가 지나간 벌판에 서서 햇살만으로도 녹아내릴 사람이다 나는 한쪽 눈웃음으로도 무너져 내릴 뼈 없는 인형이다 벌판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곁에 왔다 걸어온 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갈 길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내 지키고 선 이 자리에서 여분으로 남겨진 사랑도 가슴에서 뽑아낸 뒤 흔적 없이 떠나고 싶을 뿐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려 붙인 눈썹 떨어져 나간 뒤 그대 뿜어낸 입김에 빈터 -
[시로 여는 수요일] 한 수 배우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28 05:50:00문성해 매미가 아파트 방충망에 붙어 있다 내가 시 한 줄 건지지 못해 겹겹이 짜증을 부릴 때조차 매미는 무려 다섯 시간이나 갓 태어난 날개며 평생 입고 다닐 몸이며 울음이며를 말리우고 있다 내가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조차 그저 조용히 울음을 견디고 있다 내가 안 나오는 시를 성급히 애 끓이는 사이 매미는 그저 조용히 제가 지닌 것들을 미동도 없이 말리우고 있다가 드디어 해가 지기 시작한 즈음 조용히 물이 끓기 시 -
[시로 여는 수요일] 수태고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21 05:50:00윤제림 승강기 버튼을 누르면서 아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몇 층 가세요?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 할아버지 아니다 아이가 먼저 내리며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이런 고얀 녀석” 하려는데, “그래, 안녕”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잘 했다 저 아이가, 내 딸애한테 태기(胎氣)가 있음을 알려주러 먼길을 온 천사인지 누가 아는가 고 녀석도 고스란히 돌려받을 겁니다. 한동안 ‘학생’ 하고 불리다가, ‘총각’ 하고 -
[시로 여는 수요일] 악어와 악어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14 05:50:00송찬호 악어가 입을 딱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악어새가 날아와 톡톡톡톡톡 쫑쫑쫑쫑쫑 악어 이빨 사이 고기 찌꺼기를 파 먹고 악어 입 속을 말끔하게 청소해 놓았다 악어새가 날아가자 악어가 입을 닫았다 연주가 끝나고 피아노 뚜껑이 탁, 하고 닫히는 것 같았다강을 건너는 누의 발목을 잡아채던 이빨이었을 것이다. 새끼 잃은 어미 누가 앞발을 굴렀을 것이다. 어미 잃은 새끼 누가 둑을 맴돌다 떠났을 것이다. 물보라 치던 -
[시로 여는 수요일] 터미널 2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07 05:50:00이홍섭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엄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 -
[시로 여는 수요일] 나팔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30 05:50:00권대웅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 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길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경사 났네요. 나라가 저출산으로 걱정인데 미래의 주인이 오셨네요 -
[시로 여는 수요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23 05:50:00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 -
[시로 여는 수요일] 업어 준다는 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16 05:50:00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 -
[시로 여는 수요일] 바지락 끓이는 여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09 06:00:00려원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바지락을 씻어요 조개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어요 더 이상 밀물이 들지 않는 해안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요 결막염 걸린 눈은 수평선에 걸린 노을처럼 붉어요 조바심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거품을 뱉어낸 조개들이 입을 벌리고 부글부글 소리를 내요 밸브를 잠그고 깨소금을 뿌려요 아뿔싸, 국물을 떠올린 숟가락에 가슴에서 부글부글 올라온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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