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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소의 입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3.24 05:40:00허영자 아픔을 머금은 내 흰 피는 모두 어디로 흘러갔나? 우유라는 이름으로 불고기 육회 산적 너비아니 육포 장조림 떡갈비… 갈비탕 설렁탕 곰탕 내장탕 족탕 꼬리탕 사골탕… 스테이크 스튜 로스트 커틀릿 햄버그… 목심 등심 안심 채끝 우둔살 설도 사태 갈비 양지머리 앞다릿살 안창살 부챗살 살치살 업진살 토시살 치마살 제비추리 모두 인간들이 내 살과 뼈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고 입맛대로 조각조각 내 몸에 붙여준 이름 -
[시로 여는 수요일] 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3.17 05:50:00이관묵 너는 땅바닥이니라 엎드려 읽어야 할 삶이니라 일어나거라 네 힘으로 걸어가라 네 자신에게 넘어지고 네 자신에게서 일어서라 스스로에게 부축 받고 스스로에게 일어서라 스스로에게 당당히 맞서라 언제나 상대는 너 자신, 너는 네 자신이 동지인 동시에 적! 걸어라 너의 언어에게 다가가 구원 받아라 너의 언어로 쓰러지고 너의 언어로 태어나라 들어가 기도하라 너 자신에게 발생하고 너 자신을 발간하라 너에게서 깨어나 -
[시로 여는 수요일] 봄 처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3.10 00:05:30- 고진하 미수가 다 된 어머니가 오늘은 봄 처녀가 되셨다 뒷짐 지고 개울가로 산보 나가셨다가 서너 줌 뜯어온 초록빛 돌나물이 까만 비닐봉지 속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쇠귀에 경 읽기란 말은 가는귀먹은 어머니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눈까지 침침하다 하시면서 못 보고 못 듣는 게 없으시다 돌나물 뜯다가 마른 풀섶에 놓인 종달새 알 몇 개를 보고 행여 누가 슬쩍 해갈까 봐 마른 풀로 꼭꼭 숨겨주고 오셨단다 잘하셨다고 -
[시로 여는 수요일] 프르제발스키를 복제한 이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3.03 05:40:00이경 그들은 벌써 몇백 년 전에 멸종되었다 야생의 말 몽골초원 후스타이 국립공원에서 얼핏 뒷모습을 들킨 프르제발스키는 달아난 말의 후손 순혈의 계보는 멸종 위기를 자초한다 더럽혀야 할 때 더럽히지 못하는 순수는 위험하다 강하고 지혜로운 자 멸종하는 생물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유롭고 우아한 털 빛깔과 낙천적 기질을 가졌으며 두려움이나 질투심이나 공격성이 없다는 점이다 굴종하거나 군림하지 않으며 싸움을 싫어 -
[시로 여는 수요일] 당신이라는 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24 05:40:00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천암 능인 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
[시로 여는 수요일] 옆걸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17 05:17:00이정록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 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 올 한 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 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 -
[시로 여는 수요일] 빨간 내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10 05:50:00공광규 강화 오일장 속옷 매장에서 빨간 내복을 팔고 있소 빨간 내복 사고 싶어도 엄마가 없어 못 산다오 엄마를 닮은 늙어가는 누나도 없다오 나는 혼자라 혼자 풀빵을 먹고 있다오 빨간 내복을 입던 엄마 생각하다 목이 멘다오엿장수 각설이타령 세밑 대목 달구는데 어찌 그리 청승맞게 쭈그리고 앉아 계시오. 소금가마니에서 간수 새나 했더니, 장승 같은 양반 풀빵 먹다 울고 계시는군요. 울던 울음, 마저 우시오. 소금 같던 -
[시로 여는 수요일] 쟈가 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03 05:05:00조명희 나는 이름이 두 개다 아버지 술 드시고 출생신고 하러 가서 면서기랑 농담 따먹기 하다 획이 바뀌는 바람에 취학통지서 받던 날 엄마는 아버지를 닦달하였다 어디다 꼬불쳐 놓은 자식이 아닌가 하고 맨 정신으로 면사무소에 다녀온 아버지는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쟈가 갸여 배고픈 살림에 이름 하나 더 가졌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두 이름을 얻었으니 반반 치킨처럼 얼굴을 반반 나눠 썼는데 쟈는 동아전과 -
[시로 여는 수요일] 노천시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27 05:30:00이면우 나무 되고 싶은 날은 저녁 숲처럼 술렁이는 노천시장 간다 거기 나무 되어 서성대는 이들 많다 팔 길게 가지 뻗어 좌판 할머니 귤 탑 쓰러뜨리고 젊은 아저씨 얼음 풀린 동태도 꿰어 올리는 노천시장에선 구겨진 천원권도 한몫이다 그리고 사람이 내민 손 다른 사람이 잡아주는 곳 깎아라, 말아라, 에이 덤이다 생을 서로 팽팽히 당겨주는 일은, 저녁 숲 바람에 언뜻 포개지는 나무 그림자 닮았다 새들이 입에서 튀어나와 -
[시로 여는 수요일] 길음동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20 05:18:54신미나막다른 골목에서 만나게 된다 누가 붉은 페인트로 써놓은 소변금지 간판은 의상실인데 과일 파는 집 할머니가 전구를 갈아 끼울 때처럼 헝겊으로 조근조근 사과를 돌려 닦을 때 퇴근 시간쯤 마주치게 된다 얼굴만 아는 뚱뚱한 여자 얼굴에 기미가 들깨가루처럼 핀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욕하며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울지 않으려고 성을 내며 남편을 걷어찬 적이 있다 그녀와 스칠 때 빙그레 웃음이 난다 그녀를 닮은 뚱뚱한 -
[시로 여는 수요일] 금란시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13 05:25:34함민복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꽁지를 천천히 들어봐꿈의 칠 할이 직장 꿈이라는 샐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대양을 누비며 헤엄치던 신사들이 삼삼오오 좌판에 모였군요. 구름처럼 모여서 군무를 출 때처럼 머리를 가지런히 한쪽으로 두었군요. 많은 직장에서 정장이 사라지고, 노타이가 유행해도 주식회사 바다에선 아직도 복식 규정이 엄격하군요. 꽁치 넥타이, 고등어 넥타이, 삼치 넥타이가 반듯하 -
[시로 여는 수요일] 산다는 것의 의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06 06:00:55이시영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주었기 때문이다.1976년의 일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어떤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사로잡아 체 속에 가두었다. 장차 쳇바퀴 돌리는 서커 -
[시로 여는 수요일] 올해의 귀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30 06:01:30박노해12월의 밤이 깊으면 고요히 방에 홀로 앉아 수첩을 펴고 한 해를 돌아본다나에게 선물로 다가온 올해의 귀인은 누구였던가나를 남김없이 불살라 빛나던 올해의 시간은 언제였던가세상을 조금 더 희망 쪽으로 밀어올린 올해의 선업은 무엇이었던가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올 한 해 나는 누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던가누구에게 모질었던 그늘이었던가 누구를 딛고 올라선 열정이었던가가만가만 눈이 내리고 여명이 밝아 -
[시로 여는 수요일] 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23 06:02:58이재무아프고 괴로울 때 강으로 왔다 무엇이 간절히 그리울 때 강으로 왔다 기다림에 지쳤을 때 강으로 왔다 억울하고 서러울 때 강으로 왔다 미움이 가시지 않을 때 강으로 왔다 분노가 솟구칠 때 강으로 왔다 자랑으로 흥분이 고조될 때 강으로 왔다 마음이 사무칠 때 강으로 왔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을 때 강으로 왔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오면 나는 꽃 한 송이 사들고 강으로 왔다 강은 바다에 미치면 죽는다너는 나를 보러 -
[시로여는 수요일] 완행열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09 06:03:42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 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하였지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 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은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속도의 왕국에 아직도 완행열차가 남아 있다니. 조그만 간이역이 아직껏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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