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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초로(草露)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9.11 06:00:00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대롱대롱 풀잎 끝에 매 -
[시로 여는 수요일] 사랑한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9.03 17:53:17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 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말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하는 게 한둘이랴. 긴긴 겨울밤마다 고라 -
[시로 여는 수요일] 빈 그릇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27 17:54:30담장 위에 빈 그릇 두었더니 비가 와서 채웁니다 그 물을 새가 와서 먹고 세수하고 벌이 와서 먹고 목욕하고 그래도 남아서 고양이가 얌전히 먹는 걸 봅니다 그릇을 비워두니 오는 대로 주인입니다쯔쯧- 오는 대로 주인이라니. 담장 위에 빈 그릇을 누가 놓았는가? 탈선한 청소년처럼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쏟아지던 빗물이 누구 때문에 고였는가? 그 귀한 빗물을 새가 와서 세수하고, 벌이 와서 목욕하도록 두었단 말인가. 겨우 -
[시로 여는 수요일] 바퀴 달린 가죽가방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21 06:00:00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른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 본래부터 잡동사니가 아니었을 것이다. -
[시로 여는 수요일] 그리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13 17:46:28소리 없이 와도 네 소리가 가장 크다 울타리를 쳐도, 성채에 가두어도 소용없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 큰 소리로 심장을 딛으며 온다. 이명과도 같다. 아무도 들을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또렷이 들린다. 대상이 멀리 있을수록 강렬하다. 자력과도 같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 분단된 것들끼리 당기는 힘이다. 그리움이 개인적이라면, 공동의 그리움은 염원이 된다. 이 시는 단 두 줄만으로 시가 왜 시인지 보여준다. 말은 다 해 -
[시로 여는 수요일] 완행열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07 06:00:00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멈추어서 뒤를 돌아보 -
[시로 여는 수요일] 절경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7.30 17:44:01능성1길 그 골목을 유모차로 가는 할머니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볼 주름 깊게 파서 “누궁고, 모리겠는데 인사해죠, 고맙소.”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어느 국립공원을 가도 보기 힘든 풍경이다. 단체 할인, 경로 할인, 학생 할인도 필요 없다. 경차 할인, 무료 주차도 필요 없다.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 열리는 마음의 절경. 두 뺨이 복숭아처럼 붉은 시절도 있었으리라. 머루 같은 눈망울로 아득한 별빛 너머까지 보이 -
[시로 여는 수요일] 선천성 그리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7.24 06:00:00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의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그립다고 품에 안았더니, 심장부터 덜컥 포개어지면 어떻게 하나. 천천히 할 말이 많은데 심장만 펄떡거리면 어떻게 하나. 새벽이 왔는데 가슴이 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불도 개고 밥도 해야 하는데, 출근도 하고 출장도 가야 하는데. -
[시로 여는 수요일] 혼잣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7.16 17:49:57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텔레비전이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냉장고가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벽이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노인이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안에, 안에만 듣는다.살아온 내공이라 부르겠다. 리모컨을 누르면 제 할 말만 떠들어대던 텔레비전이 귀를 쫑긋 세우다니. 문짝을 열면 애 어른 구분 없이 다짜고짜 찬 김을 얼굴에 내뿜던 냉장고가 노인의 말을 듣다 -
[시로 여는 수요일] 무심(無心)에 대하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7.09 17:58:38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왔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있고 어느 때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간다 사랑할 줄 모르면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강물을 따라갈 줄 모르면서도 강물을 따라간다 산을 바라볼 줄 모르면서도 산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지만 모든 것을 버리지도 얻지도 못한다 산사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 내가 불쌍한지 나를 바라본다 무심히 -
[시로 여는 수요일] 실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7.02 17:40:45우산과 양산이 되어준 허공 세 평 직박구리 지지고 볶는 소리 서너 되 바람의 한숨 여섯 근 불면의 밤 한 말 가웃 숫기가 없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늘 반 마지기 산까치가 주워 나른 뜬소문 한 아름 다녀간 빗소리 아홉 다발 오디 갔다 이제 왔나 고라니똥 같은 오디 닷 양푼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는 덤이라 했다 산뽕나무 한 채 헐리기 전 열흘 하고도 반나절의 기념비적 가족사는 이러하였다 일가를 이루었던 세간이며 식솔 -
[시로 여는 수요일] 노각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6.25 17:55:24노각이라는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세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 -
[시로 여는 수요일] 금계국 웃음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6.18 18:06:04자리를 탓할 입이 금계국에게는 없다 웃음꽃 활짝 피워 주변을 밝힌다 어디든 발붙이고 살면 그 자리가 좋은 자리, 남 탓하는 입이 있었으면 해맑은 웃음 나누기 어려웠으리 금계국이 잡초가 내민 손 뿌리치는 것 본 적 있는가 피눈물 흘리는 것 본 적 있는가 속울음 삼켜보지 않은 이 어디 있으랴 걱정 없는 이 어디 있으랴 울 일보다 웃을 일이 더 많은 게 세상살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꽃자리,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 웃음꽃 -
[시로 여는 수요일] 편하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6.04 17:48:18따뜻한 물 쓰기도 불편하고 화장실 가기도 불편하고 군불 넣기도 불편하고 산길 오르내리기도 불편하다 그렇게 불편을 오래 사용하다 보니 ‘불’자가 떨어져 버렸다산사의 일이 저리 편할 줄은 몰랐다. 편한 건 도시 문명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따뜻한 물 언제나 틀면 나오고, 마당 가로질러 화장실 갈 일 없고, 아궁이 군불 넣을 일 없고, 산길 오르내릴 일 없으니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았다. 그렇게 편한 걸 오래 사용하다 보니 -
[시로 여는 수요일] 낙타
문화·스포츠 문화 2024.05.29 05:00:00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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