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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꽃이 보이는 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2.01 14:49:39길가에 꽃이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가 가까이 있어도 먼 산 같은 날 길가에 꽃이 보이는 날은 그대가 멀리 있어도 내 곁에 있는 날꽃이 보이지 않는 날은 마음이 몸을 앞설 때이다. 시각적 소실점이 심리적 소실점으로 전환되었을 때다. 대개 팽팽한 긴장감 속에 골몰해 있을 때다. 무언가를 쫓고 있거나 무언가에 쫓길 때다. 사물을 보고 있으나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보이는 날은 마음이 돌아와 몸과 함께 거닐 때다. 목표 -
[시로 여는 수요일] 바다를 본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1.19 17:43:54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저런,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강릉 -
[시로 여는 수요일] 남의 이야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1.13 06:00:00주말 저녁 무렵 아내가 내민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러 밖에 나왔는데 아파트 옆 동 쪽으로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깜짝 놀랐다 영락없는 내 어머니였다 돌아가신 지 삼 년 된 어머니가 다른 모습으로 아직 이승에 살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뚱한 생각으로 한동안 쳐다보았다 어제 퇴근길 사내아이의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딸만 둘인 내가 모르는 사내아이의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 왜 돌아보았을까 -
[시로 여는 수요일] 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1.05 17:42:09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 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 -
[시로 여는 수요일] 풀잎 기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30 06:00:00황하 협곡 병령사 비탈길을 따라 삐죽이 뻗어내린 바위너설에 누군가 풀대를 꺾어 받쳐 놓았습니다. 오늘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천 길 낭떠러지 아슬아슬한 바위너설을 가냘픈 풀대 하나로 받쳐 놓았군요. 그 풀대를 짚고 바위가 굴러 떨어지지 않는군요. 바위가 짊어진 아득한 하늘이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군요. 병령사 협곡을 가보지는 않았어도 왠지 저 모습을 본 듯하고말고요. 아이 손을 잡고 가 -
[시로 여는 수요일] 채송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22 17:47:16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구두 한 짝이 유람선이 될 수 있다면, 깨진 조각 거울에 떠가는 구름 -
[시로 여는 수요일] 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15 17:49:05빈병 실은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 허리 활처럼 하얗게 굽는다 할머니 생애에 쏘지 못한 화살이 남아서일까…… 언덕을 넘어 팽팽하게 휘어지는 허리노을 너머 고소한 냄새가 난다던 할머니들이 있기는 했다. 참깨 서리를 하려는지 온몸을 낫으로 구부려 천국으로 떠나셨다. 깨 터는 소리인가 싶어 귀 기울여 보면 빗소리이곤 했다. 언덕 넘는 저 할머니, 평생의 내공으로 당겼으니 얼마나 멀리 날아가겠는가? 어느 은하 어느 별자리 -
[시로 여는 수요일] 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01 17:55:14예전엔 얼굴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뒤를 보아 알겠네 예전엔 말을 들어 알겠더니 요즘엔 침묵을 보아 알겠네 예전엔 눈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손을 보아 알겠네그래요. 얼굴과 말과 눈은 앞세우는 것이고, 뒤와 침묵과 손은 뒤따르는 것이지요. 앞이 큰소리치는 것들이라면, 뒤는 묵묵히 약속을 수행하는 것들이지요. 예전엔 얼마나 많은 웃음에 속고, 얼마나 많은 말들에 솔깃하고, 얼마나 많은 눈빛들에 헛된 믿음을 보였던 -
[시로 여는 수요일] 벌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9.24 17:49:51벌집을 들여다본 일이 있는가. 구멍마다 허공이 담긴 그 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랑은 모텔에서 프로포즈는 이벤트로 아이는 시험관으로 장례는 땡처리하듯 화장으로 또는 배 밑으로 밀어 넣는 뼈 시린 수장(水葬)! 티브이와 왕따와 듣보잡들과 안방까지 쳐들어오는 흙탕물을 나눠 마시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살처분하고 남은 닭과 돼지와 오리를 퀵 배달로 시켜 먹고 구멍마다 허공이 담긴 그 집에서는 지금 무슨 -
[시로 여는 수요일] 초로(草露)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9.11 06:00:00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대롱대롱 풀잎 끝에 매 -
[시로 여는 수요일] 사랑한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9.03 17:53:17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 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말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하는 게 한둘이랴. 긴긴 겨울밤마다 고라 -
[시로 여는 수요일] 빈 그릇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27 17:54:30담장 위에 빈 그릇 두었더니 비가 와서 채웁니다 그 물을 새가 와서 먹고 세수하고 벌이 와서 먹고 목욕하고 그래도 남아서 고양이가 얌전히 먹는 걸 봅니다 그릇을 비워두니 오는 대로 주인입니다쯔쯧- 오는 대로 주인이라니. 담장 위에 빈 그릇을 누가 놓았는가? 탈선한 청소년처럼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쏟아지던 빗물이 누구 때문에 고였는가? 그 귀한 빗물을 새가 와서 세수하고, 벌이 와서 목욕하도록 두었단 말인가. 겨우 -
[시로 여는 수요일] 바퀴 달린 가죽가방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21 06:00:00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른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 본래부터 잡동사니가 아니었을 것이다. -
[시로 여는 수요일] 그리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13 17:46:28소리 없이 와도 네 소리가 가장 크다 울타리를 쳐도, 성채에 가두어도 소용없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 큰 소리로 심장을 딛으며 온다. 이명과도 같다. 아무도 들을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또렷이 들린다. 대상이 멀리 있을수록 강렬하다. 자력과도 같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 분단된 것들끼리 당기는 힘이다. 그리움이 개인적이라면, 공동의 그리움은 염원이 된다. 이 시는 단 두 줄만으로 시가 왜 시인지 보여준다. 말은 다 해 -
[시로 여는 수요일] 완행열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8.07 06:00:00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멈추어서 뒤를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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