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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단둘이 복숭아 꽃잎을 본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5.21 17:40:41둘이 마주 앉아 복숭아를 깎아 먹는다 하나가 아- 하면 다른 하나가 잘도 받아먹는다 하나가 웃으면 다른 하나는 더 크게 웃는다 이 나무 그늘 이 물가에 평상을 놓은 적이 있던가 단둘이 나란히 앉아 꽃잎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어제의 나는 늦게 오거나 아주 오지 않아도 좋다 흘러오는 냇물에 발을 담그고 떠내려 오는 복숭아 꽃잎을 본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어쩐지 혼자서도 나란나란 하시더라니, 혼자서도 도란도란 하시더 -
[시로 여는 수요일] 봄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5.07 17:50:12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는 가지런히 면발들을 뽑고 있다 산동네 늦잔칫집에 안남 색시 오던 날혼주들 손이 크기도 해라. 하긴 산동네 마당이 작지 올 사람이 적을까. 바다 건너 안남 색시를 맞는다니 큰 혼사가 아닌가. 산마루 국수틀에 구름반죽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미처 찾지 못한 하객들 몫까지 아낌없이 국수사리 풀어놓으니 예서 제서 후르륵 호르륵~ 면치기 하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 얼마나 귀한 인 -
[시로 여는 수요일] 종이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4.23 17:40:08딱 한 번 뜨거웠으면 됐다 딱 한 번 입맞춤이면 족하다 딱 한 번 채웠으면 그만이다 할 일 다 한 짧은 생 밟히고 찌그러져도 말이 없다딱 한 번 뜨거웠던 제 몸의 온도를 전해주고 갔구나. 딱 한 번뿐인 입맞춤을 허락하고 갔구나. 딱 한 번 채웠던 소중한 걸 다 비워주고 갔구나. 하루에도 두세 번씩 다른 종이컵과 입 맞추는 날 무심히도 바라보았었구나. 커다란 입으로 말도 없이, 밟히고 찌그러지다가 사라졌구나. 딱 한 번으 -
[시로 여는 수요일] 벚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4.17 06:00:00기적처럼 피어났다 벼락처럼 오는 죽음단 두 행의 시가 종이를 베는 검처럼 예리하다. 벚꽃이 피고 지는 찰나에 대한 통찰이 삶 전체를 관통한다. 무한한 우주 시간 속 어떤 생의 명멸인들 찰나가 아니겠는가. 광년을 달려오는 별빛의 생성과 소멸도 기적처럼 피어났다 벼락처럼 오는 죽음일 수 있겠다. 그러나 아침햇살에 스러질 이슬이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찰나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찰나에 응결되지 않는 영원이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름다운 수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4.02 20:03:05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
[시로 여는 수요일] 먹염바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26 17:39:58바다에 오면 처음과 만난다 그 길은 춥다 바닷물에 씻긴 따개비와 같이 춥다 패이고 일렁이는 것들 숨죽인 것들 사라지는 것들 우주의 먼 곳에서는 지금 눈이 내리고 내 얼굴은 파리하다 손등에 내리는 눈과 같이 뜨겁게 타다 사라지는 것들을 본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 사이 여기까지 온 길이 생간처럼 뜨겁다 햇살이 머문 자리 괭이갈매기 한 마리 뜨겁게 눈을 쪼아 먹는다 바다는 생명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밀려왔다 밀려가 -
[시로 여는 수요일] 나왔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19 17:50:14알에서 깬 애벌레가 말했다 - 살려고 나왔다 씨앗을 찢고 새싹이 말했다 - 살려고 나왔다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 살려고 나왔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 살려고 나왔다 가슴을 뛰쳐나오며 시가 말했다 - 살리려고 나왔다 바야흐로 나오는 계절이다. 껍데기를 부수고, 껍질을 뚫고, 양수를 터트리고, 어둠을 물리치며, 겨우내 살아남은 것들이 살려고 나오는 계절이다. 모든 동사의 바탕은 ‘살다’일 것이다. 생명이 펼치는 -
[시로 여는 수요일] 너의 서쪽은 나의 동쪽이 된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13 06:00:00너와 내가 마주 바라볼 때 너의 왼쪽 눈은 나의 오른쪽 눈을 본다 너의 서쪽은 나의 동쪽이 되고 그 사이에 섬이 있다지 너에게 슬픔의 달이 떠오르면 나에게 있는 해의 밝음을 전해주려니 내 은빛 그리움도 물이랑 따라 야자수 해변으로 가리라 너는 어느 봄꽃으로 마중할까?너의 서쪽이 나의 동쪽이 된다니, 세상에 내가 있고 또 네가 있는 이유이겠죠.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80억이나 있는 까닭이겠죠. 풀 한 포기라도 저 -
[시로 여는 수요일] 공동경비구역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05 18:04:27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
[시로 여는 수요일] 타임캡슐 연대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2.27 17:40:54늦은 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7층을 누른다 미라처럼 꼿꼿이 서서 한 층에 천년씩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칠천 년 전 신석기 시대 움집 앞에서 지잉 소리를 내며 자동문이 열린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원시림 사이로 초록 이파리 무성한 팔이 나와 미세 먼지를 분리한 후 타임캡슐에 나를 안치한다 칸칸의 방에 7만 년 후의 아침에 깨어날 연대별 숨소리아침에 나온 집으로 늦은 밤 돌아가는 하루가 칠천 년 -
[시로 여는 수요일] 처음 가는 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2.14 06:00:00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없다니, 새해 내딛는 첫걸음에 힘이 실립니다. 내가 처음 가는 길이라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버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2.06 17:41:31몸에서 아버지 튀어나온다 고향 떠나온 지 사십 년 아버지로부터 도망 나와 아버지를 지우며 살아왔지만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 몸 깊숙이 뿌리 내린, 캐내지 못한 아버지 여태도 나를 입고 사신다 아버지로부터의 도피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나는 평생을 꿈꾸며 살아왔으나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식민지 불쑥, 아버지 튀어나와 오늘도 생활을 뒤엎고 있다 아버지는 성채이고 왕국이다. 어릴 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지만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31 07:25:00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 -
[시로 여는 수요일] 사과꽃이 온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24 07:20:00어느 산골 마을 농부는 사과꽃이 핀다고 말하지 않고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 사람이 오는 것처럼 저만치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 복을 빌어 줄 때도 너에게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 하늘이 열리길 바라는 것처럼 사과꽃을 말한다 정성을 다했는데 사과꽃이 오지 않으면 한 해 쉬어 가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보내 주는 분을 아는 것처럼 사과꽃을 기다리고 사과꽃의 배후를 말한다 사과꽃이 핀다는 것은 사과나무를 칭찬할 일이다. -
[시로 여는 수요일] 머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17 07:30:00어머니 아흔셋에도 홀로 사신다. 오래전에 망한, 지금은 장남 명의의 아버지 집에 홀로 사신다. 다른 자식들 또한 사정 있어 홀로 사신다. 귀가 멀어 깜깜, 소태 같은 날들을 홀로 사신다. 고향집 뒤꼍엔 머위가 많다. 머위 잎에 쌓이는 빗소리도 열두 권 책으로 엮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걸 쪄 쌈 싸먹으면 쓰디쓴 맛이다. 아 낳아 기른 죄, 다 뜯어 삼키며 어머니 홀로 사신다. 늙으신 어머니 두고 온 시골집이 내내 눈에 밟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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