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로 여는 수요일] 출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10 07:30:00백로는 늘 같은 곳으로 출근을 한다 웬만한 비에도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큰물이 지나가자 어김없이 짝다리로 서서 목을 길게 빼고 물결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처자식만 없으면 벌써 때려치우겠다던 남자 밥이 죄라서 짝다리로 정류장에 서 있다 시냇물 주식회사 다니는 백로도 힘들구나. 늘 같은 여울목에서 수면인식 출근부를 찍는구나. 대를 이어 근무했어도 사원 복지제도가 형편없구나. 우산도 없 -
[시로 여는 수요일] 새해 인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03 07:30:00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 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아, 해님과 달님이 공짜였군요. -
[시로 여는 수요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26 17:39:22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세상에는 시를 쓰는 사람이 -
[시로 여는 수요일] 도다리쑥국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20 07:30:00언니, 우리 통영 가요 첫눈 오는 날 아는 동생이 통영에 가잔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도다리쑥국을 먹잔다 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꼭 통영엘 간대요 나는 통영에 여러 번 가 봤고 중앙시장에서 도다리쑥국을 먹었고 함께한 그 맛을 이제는 잊을 만한데 언제 갈까? 동생은 이른 봄에 가자 하고 나는 겨울 가기 전에 가자 한다 언니, 그거 알아요? 가자미를 입에 넣고 국물을 뜨면 입안에 바다가 요동친대요 그것도 쑥 향으로 -
[시로 여는 수요일] 애기메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13 07:30:00한때 세상은 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 날 위해 돌돌 감아 오르는 줄 알았지 들길에 쪼그려 앉은 분홍치마 계집애 쪼그려 앉은 무릎을 펴고 일어서보니 키가 훌쩍 자랐지. 분홍치마가 유치해져서 벗어던졌지. 날 위해 돌던 세상은 따로 돌고 있었지.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내가 돌아야 했지. 어지러워서 발이 엉키고 쓰러지기도 했지. 한때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았던 추억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지. 할머니가 되어도 분홍치마의 색깔은 -
[시로 여는 수요일] 단양 마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06 07:30:00여섯 쪽을 갈라 한 쪽을 심어도 어김없이 육 쪽이 되는 마늘 서리 내린 논밭에다 두엄 뿌려 갈아 묻고 짚 덮어 겨울 나면 봄 앞질러 언 땅 뚫고 돋는 새순 맵기는 살모사 같고 단단하기는 차돌 같은 단양 마늘 약값도 안 되고, 품값도 안 되는 것을 육순 노모 해마다 심는 정은 쪽 떼어 묻어도 육 남매 살 붙어 열리기 때문일까 쪽쪽 떼어 뿌려도 어김없는 육 쪽 마늘 저런 괴이한 일이 있나.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홍길동 분신 -
[시로 여는 수요일] 섀도복싱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28 17:39:43거기 있다는 걸 안다. 빈틈을 노려 내가 커다란 레프트 훅을 날릴 때조차 당신은 유유히 들리지 않는 휘파람을 불며 나의 옆구리를 치고 빠진다. 크게 한 번 나는 휘청이고 저 헬멧의 틈으로 보이는 깊고 어두운 세계와 우우우, 울리는 낮게 매복한 소리.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완악한 힘에 맞서 당신을 안아버리는 이 짧고 눈부신 한낮. 부러진 내 갈비뼈 사이의 텅 빈 간격으로 잠입하는 당신에 대해 당신의 그 느린 일렁임에 대 -
[시로 여는 수요일] 산토끼 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22 07:30:00산토끼가 똥을 누고 간 후에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토끼는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산토끼 똥도 산토끼를 그리워하는구나. 산토끼 속을 잘 아는 산토끼 똥이 산토끼가 사라진 산 너머를 바라보는구나. 자신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개운하게 줄행랑쳤어도 원망하지 않는구나. 산토끼 똥이라도 꿈은 커서 말똥말똥 눈 뜨고 있구나.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동공이 다 풀어져도 -
[시로 여는 수요일] 꽃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14 17:41:32연모한다고 말하기가 좀처럼 어렵다 어느 날 내가 죽었다면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내가 죽었는데 그걸 모른다면 나는 내 죽음을 후회할 것이다 세상이 단순해져서 슬픔도 단순해진다 환청이 사라지고 말이 쏟아지는 환시가 심해졌다 새벽녘 불쑥불쑥 나타나는 비명이 목숨이었다 언젠가는 모든 숨들이 멈춘다는 걸 노을이 전해주었다 생은 들꽃 같아 눈에 띄지 않게 향기를 잃는다 꽃말의 아름다움이 삶과 죽음의 안타까 -
[시로 여는 수요일] 꽃과 함께 식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08 07:30:00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꺾어왔다 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문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글고 노란 꽃판도 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 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 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 -
[시로 여는 수요일] 걸친, 엄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01 07:30:00한 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간다 엄마의 팔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팔을 꿰고 엄마의 목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목을 꿰고 엄마의 다리가 들어갔던 구멍에 내 다리를 꿰! 고, 나는 엄마가 된다 걸을 때마다 펄렁펄렁 엄마 냄새가 풍긴다 - 엄마…… - 다 늙은 것이 엄마는 무슨…… 걸친 엄마가 눈을 흘긴다 불에 태우거나 보공으로 넣지 않고 돌아가신 엄마 옷을 걸치다니, 걸친 엄마는 절친 엄마였을 것이다. 펄렁 -
[시로 여는 수요일] 행복공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24 17:39:24행복공장을 왜 하냐구요? 제가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수심이 가득해 보여서. 행복하지 않은 내가 너를 물들일 것 같아서. 행복하지 않은 너에게 내가 물들 것 같아서. 행복으로 물들이는 너와 내가 되고 싶어서. 그래서 오늘도 행복공장을 합니다. 내가 꽃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내가 단풍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내가 미소 지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네가 꽃이었을 때 내게 꽃물이 -
[시로 여는 수요일] 민화 18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18 07:30:00참 얼척없데이, 이 가을 당신과 같이 단풍 드는 일 당신이 끓여 준 김치찌개를 삼십 년이나 먹고 또 먹고 아직도 맛있다고 낄낄거리는 일, 참 얼척없데이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아직 한 이불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아직 한 밥상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아직 한 마음 이 가을 당신과 함께 단풍 드는 일, 참 얼척없데이 삼십 년 전이나 똑같이 한 뚝배기의 된장찌개에 함께 숟가락을 담그는 일, 참 얼척없데이. 더러 김치찌개 싱겁 -
[시로 여는 수요일] 진달래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11 07:30:00그럭저럭 사는 거지. 저 절벽 돌부처가 망치 소리를 다 쟁여두었다면 어찌 요리 곱게 웃을 수 있겠어. 그냥저냥 살다보면 저렇게 머리에 진달래꽃도 피겠지. 시루떡 향초 꽂아 어떤 소원을 빌어도 돌부처가 대꾸 않는 이유를 알겠네. 천 년 쟁쟁한 망치소리 이명에 천둥소리에도 끄떡 않는 비밀을 알겠네. 온화한 미소만 보았지, 아픔의 심연을 보지 못했네. 돌, 돌, 돌부처가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아서 천 년 우러름 받는 이 -
[시로 여는 수요일] 호박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03 17:29:15시라는 게 다 뭐꼬? 배추시 아니면 고추시 그럼 아니 아니 호박시 호박시를 한번 심어볼까? 내 평생 시라고는 종자 씨앗으로만 생각했다 호박시를 큰 화분에 심어놓고 매일같이 시가 되어 나오라고 기도를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시는 나오지 않고 싹이 터서 파란 두 잎이 나오더니 줄기가 뻗어나가고 꽃이 피고 호박이 열리더라 아하, 시란 놈은 이렇게 꽃이 피고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거로구나!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가 한글
오늘의 핫토픽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