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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나왔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19 17:50:14알에서 깬 애벌레가 말했다 - 살려고 나왔다 씨앗을 찢고 새싹이 말했다 - 살려고 나왔다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 살려고 나왔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 살려고 나왔다 가슴을 뛰쳐나오며 시가 말했다 - 살리려고 나왔다 바야흐로 나오는 계절이다. 껍데기를 부수고, 껍질을 뚫고, 양수를 터트리고, 어둠을 물리치며, 겨우내 살아남은 것들이 살려고 나오는 계절이다. 모든 동사의 바탕은 ‘살다’일 것이다. 생명이 펼치는 -
[시로 여는 수요일] 너의 서쪽은 나의 동쪽이 된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13 06:00:00너와 내가 마주 바라볼 때 너의 왼쪽 눈은 나의 오른쪽 눈을 본다 너의 서쪽은 나의 동쪽이 되고 그 사이에 섬이 있다지 너에게 슬픔의 달이 떠오르면 나에게 있는 해의 밝음을 전해주려니 내 은빛 그리움도 물이랑 따라 야자수 해변으로 가리라 너는 어느 봄꽃으로 마중할까?너의 서쪽이 나의 동쪽이 된다니, 세상에 내가 있고 또 네가 있는 이유이겠죠.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80억이나 있는 까닭이겠죠. 풀 한 포기라도 저 -
[시로 여는 수요일] 공동경비구역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3.05 18:04:27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
[시로 여는 수요일] 타임캡슐 연대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2.27 17:40:54늦은 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7층을 누른다 미라처럼 꼿꼿이 서서 한 층에 천년씩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칠천 년 전 신석기 시대 움집 앞에서 지잉 소리를 내며 자동문이 열린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원시림 사이로 초록 이파리 무성한 팔이 나와 미세 먼지를 분리한 후 타임캡슐에 나를 안치한다 칸칸의 방에 7만 년 후의 아침에 깨어날 연대별 숨소리아침에 나온 집으로 늦은 밤 돌아가는 하루가 칠천 년 -
[시로 여는 수요일] 처음 가는 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2.14 06:00:00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없다니, 새해 내딛는 첫걸음에 힘이 실립니다. 내가 처음 가는 길이라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버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2.06 17:41:31몸에서 아버지 튀어나온다 고향 떠나온 지 사십 년 아버지로부터 도망 나와 아버지를 지우며 살아왔지만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 몸 깊숙이 뿌리 내린, 캐내지 못한 아버지 여태도 나를 입고 사신다 아버지로부터의 도피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나는 평생을 꿈꾸며 살아왔으나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식민지 불쑥, 아버지 튀어나와 오늘도 생활을 뒤엎고 있다 아버지는 성채이고 왕국이다. 어릴 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지만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31 07:25:00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 -
[시로 여는 수요일] 사과꽃이 온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24 07:20:00어느 산골 마을 농부는 사과꽃이 핀다고 말하지 않고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 사람이 오는 것처럼 저만치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 복을 빌어 줄 때도 너에게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 하늘이 열리길 바라는 것처럼 사과꽃을 말한다 정성을 다했는데 사과꽃이 오지 않으면 한 해 쉬어 가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보내 주는 분을 아는 것처럼 사과꽃을 기다리고 사과꽃의 배후를 말한다 사과꽃이 핀다는 것은 사과나무를 칭찬할 일이다. -
[시로 여는 수요일] 머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17 07:30:00어머니 아흔셋에도 홀로 사신다. 오래전에 망한, 지금은 장남 명의의 아버지 집에 홀로 사신다. 다른 자식들 또한 사정 있어 홀로 사신다. 귀가 멀어 깜깜, 소태 같은 날들을 홀로 사신다. 고향집 뒤꼍엔 머위가 많다. 머위 잎에 쌓이는 빗소리도 열두 권 책으로 엮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걸 쪄 쌈 싸먹으면 쓰디쓴 맛이다. 아 낳아 기른 죄, 다 뜯어 삼키며 어머니 홀로 사신다. 늙으신 어머니 두고 온 시골집이 내내 눈에 밟히 -
[시로 여는 수요일] 출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10 07:30:00백로는 늘 같은 곳으로 출근을 한다 웬만한 비에도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큰물이 지나가자 어김없이 짝다리로 서서 목을 길게 빼고 물결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처자식만 없으면 벌써 때려치우겠다던 남자 밥이 죄라서 짝다리로 정류장에 서 있다 시냇물 주식회사 다니는 백로도 힘들구나. 늘 같은 여울목에서 수면인식 출근부를 찍는구나. 대를 이어 근무했어도 사원 복지제도가 형편없구나. 우산도 없 -
[시로 여는 수요일] 새해 인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1.03 07:30:00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 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아, 해님과 달님이 공짜였군요. -
[시로 여는 수요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26 17:39:22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세상에는 시를 쓰는 사람이 -
[시로 여는 수요일] 도다리쑥국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20 07:30:00언니, 우리 통영 가요 첫눈 오는 날 아는 동생이 통영에 가잔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도다리쑥국을 먹잔다 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꼭 통영엘 간대요 나는 통영에 여러 번 가 봤고 중앙시장에서 도다리쑥국을 먹었고 함께한 그 맛을 이제는 잊을 만한데 언제 갈까? 동생은 이른 봄에 가자 하고 나는 겨울 가기 전에 가자 한다 언니, 그거 알아요? 가자미를 입에 넣고 국물을 뜨면 입안에 바다가 요동친대요 그것도 쑥 향으로 -
[시로 여는 수요일] 애기메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13 07:30:00한때 세상은 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 날 위해 돌돌 감아 오르는 줄 알았지 들길에 쪼그려 앉은 분홍치마 계집애 쪼그려 앉은 무릎을 펴고 일어서보니 키가 훌쩍 자랐지. 분홍치마가 유치해져서 벗어던졌지. 날 위해 돌던 세상은 따로 돌고 있었지.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내가 돌아야 했지. 어지러워서 발이 엉키고 쓰러지기도 했지. 한때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았던 추억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지. 할머니가 되어도 분홍치마의 색깔은 -
[시로 여는 수요일] 단양 마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2.06 07:30:00여섯 쪽을 갈라 한 쪽을 심어도 어김없이 육 쪽이 되는 마늘 서리 내린 논밭에다 두엄 뿌려 갈아 묻고 짚 덮어 겨울 나면 봄 앞질러 언 땅 뚫고 돋는 새순 맵기는 살모사 같고 단단하기는 차돌 같은 단양 마늘 약값도 안 되고, 품값도 안 되는 것을 육순 노모 해마다 심는 정은 쪽 떼어 묻어도 육 남매 살 붙어 열리기 때문일까 쪽쪽 떼어 뿌려도 어김없는 육 쪽 마늘 저런 괴이한 일이 있나.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홍길동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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