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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추석 무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27 07:30:00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
[시로 여는 수요일] 벼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19 17:40:14어릴 적 논둑에 앉아 똥 누다 처음 본 꽃 똥 누고 일어설 때면 발바닥부터 저릿저릿 피가 돌아서 일어서다 주춤 다시 보던 꽃 언제부턴가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목이 메인 꽃 밥상 차리시는 젊은 아버지가 까맣게 타고 있는 꽃벼는 쌀이 되고, 쌀은 밥이 되고, 밥은 똥이 된다. 한자로 쌀(米)이 다르게(異) 변한 것이 똥(糞)이니 현장학습을 제대로 하셨다. 벼의 생애는 똥에서 그치지 않는다. 똥은 다시 거름이 돼 꽃이 되고 열매 -
[시로 여는 수요일] 생강꽃처럼 화들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13 07:30:00윗집 사람과 아랫집 사람, 싸움이 났다 담장 넘어온 닭 때문이라지만 두 분 사랑싸움이다 산 고개 여러 번 넘은 정분이지만 딱, 그만큼이다 된장찌개 끓인 날은 아랫집 사람의 순정이 윗집 마루에 슬그머니 놓여 있다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 빠트리고 싱겁네, 물이 더 들어갔네 구시렁구시렁 웃음으로 넘어간다 마당에 풀어논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으며 아랫집 담장 밑을 서성이고 윗집 사람 속을 읽는 닭이 그저 모가지만 냈다 뺐 -
[시로 여는 수요일] 제비 세 마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06 07:30:00현관문 앞에 똥을 누는 제비, 밉지 않다 유월 초 땅거미 질 무렵이면 찾아와 자고 가는 제비 반갑기만 하다 아내는 저녁이면 “제비야 잘 자~” 아침이면 “제비 잘 잤어?” 손주들에게 말하듯 한다 제비 역시 알아들은 듯 고갯짓을 한다 어미 품 벗어나 허해서일까 현관 전깃줄에 앉아 몸을 밀착시키는 제비 세 마리, 나란히 같은 쪽에 머리를 두고 있다 가끔 돌아앉아 반대쪽에 머리 두는 녀석도 있지만 서로의 몸 닿는 일 잊지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내와 나 사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30 09:30:00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 -
[시로 여는 수요일] 데드 포인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16 07:30:00안데스를 일주하는 사이클 경기 콜롬비아의 산길을 오르는 선수들 산기슭의 아열대를 지나면 저만치 산꼭대기 만년설이 보인다 해발 사천오백 미터 산간고원을 달린다 산소가 희박한 공기 속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가슴은 곧 터질 듯 헐떡인다 자욱한 안개가 귀를 핥으며 자꾸만 속삭인다 포기하라! 이제 그만 포기하라! 나는 핏발 선 눈으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잉카의 태양! 왜 -
[시로 여는 수요일] 모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09 07:30:00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
[시로 여는 수요일] 행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02 07:30:00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긴 행렬이 있다 나는 암탉을 키우지 않는다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순행하는 자연이 있다 암탉이 밀어낸 알들의 차례가 있다 어제의 달걀판은 오늘의 달걀판을 받든다 총상꽃차례의 꽃대에서 어제의 꽃송이가 오늘의 꽃송이를 받든다 보이지 않게 세계는 부패하고 있다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긴 행렬이 있다 마침내 내게 당도한 꽃다발이 안심하고 냄새를 피우고 있다 암 -
[시로 여는 수요일] 나무다리 위에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26 07:30:00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게 흐른다 나무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근심 없는 생 -
[시로 여는 수요일] 낮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19 07:30:00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 -
[시로 여는 수요일] 모르는 사람의 손이 더 따뜻하리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12 07:00:00내일 이 땅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화성엔 가지 않을 거야 거기엔 내 좋아하는 참깨와 녹두콩을 심지 못하므로 오늘 핀 도라지꽃 그릴 한 다스 색연필이 없으므로 일기책 태운 온기에 손 쬐며 쓴 시를 최초의 목소리로 읽어 줄 사람 없으므로 지구 아니면 어느 책상에 앉아 아름다운 글을 쓰겠니? 노래가 깨끗이 청소해 놓은 길 어느 방향으로 책상에 놓아 내일 아침의 왼쪽 가슴에 달아 줄 이름표를 만들겠니? 생각하는 마음 때 -
[시로 여는 수요일] 내가 나의 감옥이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05 07:30:00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 -
[시로 여는 수요일] 해바라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6.28 07:30:00담 아래 심은 해바라기 피었다 ?참 모질게도 딱, 등 돌려 옆집 마당 보고 피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말동무하듯 잔소리하러 오는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모종하고 거름 내고 지주 세워주고는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린 터에 야속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해바라기가 내려다보는 옆집 담을 넘겨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은 옆집 억지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등에 슬몃슬 -
[시로 여는 수요일]가난한 사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1.02 08:00:00- 정호승 별을 바라보는 사람은 가난하다 별을 바라보다가 별똥별이 되어 사라지는 사람은 가난하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가난하다 꽃을 바라보다가 인간의 아름다움이 부끄러워 한 송이 지는 꽃이 되는 사람은 가난하다 가슴속에 새를 키우는 사람은 가난하다 새가 날아갈 수 있도록 드디어 가슴의 창문을 활짝 열어주는 사람은 가난하다 진흙으로 빚은 귀를 지니고 봄비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가난하다 밤새워 봄비 소리를 -
[시로 여는 수요일]손
정치 정치일반 2022.10.26 07:00:00- 성명진 내 손아귀 바라본다 한 끼 분의 쌀을 풀 만큼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쌀 만큼이다 심장을 받쳐 들 만큼이다 가만히 합장하여 본다 오 평생 비어 있기를…….사람 손은 단풍나무 잎과 닮았다. 사람 손은 다섯 개 손가락으로 되어 있고, 단풍나무 잎은 일곱 개에서 열세 개 손가락으로 되어 있다. 사람은 겨우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만, 단풍나무는 수만 장의 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한 끼 분의 쌀을 두 손으로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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