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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섀도복싱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28 17:39:43거기 있다는 걸 안다. 빈틈을 노려 내가 커다란 레프트 훅을 날릴 때조차 당신은 유유히 들리지 않는 휘파람을 불며 나의 옆구리를 치고 빠진다. 크게 한 번 나는 휘청이고 저 헬멧의 틈으로 보이는 깊고 어두운 세계와 우우우, 울리는 낮게 매복한 소리.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완악한 힘에 맞서 당신을 안아버리는 이 짧고 눈부신 한낮. 부러진 내 갈비뼈 사이의 텅 빈 간격으로 잠입하는 당신에 대해 당신의 그 느린 일렁임에 대 -
[시로 여는 수요일] 산토끼 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22 07:30:00산토끼가 똥을 누고 간 후에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토끼는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산토끼 똥도 산토끼를 그리워하는구나. 산토끼 속을 잘 아는 산토끼 똥이 산토끼가 사라진 산 너머를 바라보는구나. 자신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개운하게 줄행랑쳤어도 원망하지 않는구나. 산토끼 똥이라도 꿈은 커서 말똥말똥 눈 뜨고 있구나.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동공이 다 풀어져도 -
[시로 여는 수요일] 꽃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14 17:41:32연모한다고 말하기가 좀처럼 어렵다 어느 날 내가 죽었다면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내가 죽었는데 그걸 모른다면 나는 내 죽음을 후회할 것이다 세상이 단순해져서 슬픔도 단순해진다 환청이 사라지고 말이 쏟아지는 환시가 심해졌다 새벽녘 불쑥불쑥 나타나는 비명이 목숨이었다 언젠가는 모든 숨들이 멈춘다는 걸 노을이 전해주었다 생은 들꽃 같아 눈에 띄지 않게 향기를 잃는다 꽃말의 아름다움이 삶과 죽음의 안타까 -
[시로 여는 수요일] 꽃과 함께 식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08 07:30:00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꺾어왔다 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문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글고 노란 꽃판도 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 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 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 -
[시로 여는 수요일] 걸친, 엄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1.01 07:30:00한 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간다 엄마의 팔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팔을 꿰고 엄마의 목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목을 꿰고 엄마의 다리가 들어갔던 구멍에 내 다리를 꿰! 고, 나는 엄마가 된다 걸을 때마다 펄렁펄렁 엄마 냄새가 풍긴다 - 엄마…… - 다 늙은 것이 엄마는 무슨…… 걸친 엄마가 눈을 흘긴다 불에 태우거나 보공으로 넣지 않고 돌아가신 엄마 옷을 걸치다니, 걸친 엄마는 절친 엄마였을 것이다. 펄렁 -
[시로 여는 수요일] 행복공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24 17:39:24행복공장을 왜 하냐구요? 제가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수심이 가득해 보여서. 행복하지 않은 내가 너를 물들일 것 같아서. 행복하지 않은 너에게 내가 물들 것 같아서. 행복으로 물들이는 너와 내가 되고 싶어서. 그래서 오늘도 행복공장을 합니다. 내가 꽃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내가 단풍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내가 미소 지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네가 꽃이었을 때 내게 꽃물이 -
[시로 여는 수요일] 민화 18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18 07:30:00참 얼척없데이, 이 가을 당신과 같이 단풍 드는 일 당신이 끓여 준 김치찌개를 삼십 년이나 먹고 또 먹고 아직도 맛있다고 낄낄거리는 일, 참 얼척없데이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아직 한 이불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아직 한 밥상 삼십 년을 함께 살고도 아직 한 마음 이 가을 당신과 함께 단풍 드는 일, 참 얼척없데이 삼십 년 전이나 똑같이 한 뚝배기의 된장찌개에 함께 숟가락을 담그는 일, 참 얼척없데이. 더러 김치찌개 싱겁 -
[시로 여는 수요일] 진달래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11 07:30:00그럭저럭 사는 거지. 저 절벽 돌부처가 망치 소리를 다 쟁여두었다면 어찌 요리 곱게 웃을 수 있겠어. 그냥저냥 살다보면 저렇게 머리에 진달래꽃도 피겠지. 시루떡 향초 꽂아 어떤 소원을 빌어도 돌부처가 대꾸 않는 이유를 알겠네. 천 년 쟁쟁한 망치소리 이명에 천둥소리에도 끄떡 않는 비밀을 알겠네. 온화한 미소만 보았지, 아픔의 심연을 보지 못했네. 돌, 돌, 돌부처가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아서 천 년 우러름 받는 이 -
[시로 여는 수요일] 호박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10.03 17:29:15시라는 게 다 뭐꼬? 배추시 아니면 고추시 그럼 아니 아니 호박시 호박시를 한번 심어볼까? 내 평생 시라고는 종자 씨앗으로만 생각했다 호박시를 큰 화분에 심어놓고 매일같이 시가 되어 나오라고 기도를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시는 나오지 않고 싹이 터서 파란 두 잎이 나오더니 줄기가 뻗어나가고 꽃이 피고 호박이 열리더라 아하, 시란 놈은 이렇게 꽃이 피고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거로구나!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가 한글 -
[시로 여는 수요일] 추석 무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27 07:30:00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
[시로 여는 수요일] 벼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19 17:40:14어릴 적 논둑에 앉아 똥 누다 처음 본 꽃 똥 누고 일어설 때면 발바닥부터 저릿저릿 피가 돌아서 일어서다 주춤 다시 보던 꽃 언제부턴가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목이 메인 꽃 밥상 차리시는 젊은 아버지가 까맣게 타고 있는 꽃벼는 쌀이 되고, 쌀은 밥이 되고, 밥은 똥이 된다. 한자로 쌀(米)이 다르게(異) 변한 것이 똥(糞)이니 현장학습을 제대로 하셨다. 벼의 생애는 똥에서 그치지 않는다. 똥은 다시 거름이 돼 꽃이 되고 열매 -
[시로 여는 수요일] 생강꽃처럼 화들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13 07:30:00윗집 사람과 아랫집 사람, 싸움이 났다 담장 넘어온 닭 때문이라지만 두 분 사랑싸움이다 산 고개 여러 번 넘은 정분이지만 딱, 그만큼이다 된장찌개 끓인 날은 아랫집 사람의 순정이 윗집 마루에 슬그머니 놓여 있다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 빠트리고 싱겁네, 물이 더 들어갔네 구시렁구시렁 웃음으로 넘어간다 마당에 풀어논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으며 아랫집 담장 밑을 서성이고 윗집 사람 속을 읽는 닭이 그저 모가지만 냈다 뺐 -
[시로 여는 수요일] 제비 세 마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9.06 07:30:00현관문 앞에 똥을 누는 제비, 밉지 않다 유월 초 땅거미 질 무렵이면 찾아와 자고 가는 제비 반갑기만 하다 아내는 저녁이면 “제비야 잘 자~” 아침이면 “제비 잘 잤어?” 손주들에게 말하듯 한다 제비 역시 알아들은 듯 고갯짓을 한다 어미 품 벗어나 허해서일까 현관 전깃줄에 앉아 몸을 밀착시키는 제비 세 마리, 나란히 같은 쪽에 머리를 두고 있다 가끔 돌아앉아 반대쪽에 머리 두는 녀석도 있지만 서로의 몸 닿는 일 잊지 -
[시로 여는 수요일] 아내와 나 사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30 09:30:00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 -
[시로 여는 수요일] 데드 포인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16 07:30:00안데스를 일주하는 사이클 경기 콜롬비아의 산길을 오르는 선수들 산기슭의 아열대를 지나면 저만치 산꼭대기 만년설이 보인다 해발 사천오백 미터 산간고원을 달린다 산소가 희박한 공기 속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가슴은 곧 터질 듯 헐떡인다 자욱한 안개가 귀를 핥으며 자꾸만 속삭인다 포기하라! 이제 그만 포기하라! 나는 핏발 선 눈으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잉카의 태양!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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