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로 여는 수요일]소풍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0.19 08:00:00- 신현정 소풍을 딱 한번만 더 가자면 다람쥐가 솔방울을 물고 가는 그 뒤를 쫓아가서는 혹시나 다람쥐가 재주나 홀딱 넘어 만든 공산에 들게 될는지 나, 마냥 뒤쫓아 가겠다 거기 열매 한 개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도 천둥 만하게 크게 나는 공산에서 나, 설령 죄 있다 하더라도 다람쥐처럼 기고 숨고 금빛 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리곤 하겠다 다람쥐를 쫓아가다 다람쥐가 되는 시인을 보겠다. 재주를 넘다가 꽁무니에 복슬 꼬리 -
[시로 여는 수요일]친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0.12 08:00:00- 이시영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하마터면 의심할 뻔했습니다. 어찌 미워할 일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영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탈출한 -
[시로 여는 수요일]지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0.05 07:00:00- 이장근 병이 나를 앓는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내 존재를 확인한다 더 커지지 않았는지 내가 모르는 나에게 전이되지는 않았는지 시간 맞춰 약을 먹으며 나를 관리한다 세상의 모든 나는 완치될 수 없는 질환이어서 죽어야 끝나지만 나를 죽이지 않고 오래 앓아주는 병 정 많은 병을 만나 나는 오늘도 살아있다정 많은 병이라니 그런 병도 있을까마는 병을 친구 대하듯 하시는군요. 병과 싸우지 않고 병을 모시는군요. 병이 -
[시로 여는 수요일]민화 4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28 00:00:00- 성선경버스로 한 시간 반, 통영 간다 배둔, 고성을 거쳐 한 시간 반 통영 가서 시외버스 터미널 앞 큰언니식당에서 백반정식을 먹는데 생일도 아닌데 미역국이 한 대접 낯모를 곳에서 낯모르는 사람에게 생일상 받는다 구운 간조기 한 마리 김 몇 장, 계란찜 고봉밥 한 그릇, 생일상 받는다 뜻밖 허튼 걸음 버스로 한 시간 반 배둔, 고성을 거쳐 한 시간 반 통영 가 낯모를 곳에서 낯모르는 사람에게 생일상 받는다 따끈따끈하게 -
[시로 여는 수요일] 길에서 주웠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21 07:00:00- 강서연 섬진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고라니 발자국을 주웠다 구슬은 빠져나가고 틀만 남은 브로치 강과 들녘의 풍경을 여미고 있는 이것은 길이라는 순한 눈동자의 흔적이다 질주를 탁본한 천연 주얼리이다 바람이 몸을 깎아 브로치 빈 틀에 넣어보는 오후 소나기라도 한차례 내리고 나면 머무른 고라니 발자국에도 넘칠 듯 그렁거리는 에메랄드빛 보석 알알이 박혀 들겠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둥 -
[시로 여는 수요일] 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14 07:00:00나는 본 적 없네 나의 뒤 한번쯤 안아보고 싶어도 너무 먼 나의 뒤 한때 잘나가던 시절에도 뒤는 외로웠으리 삶이 부끄러울 때마다 먼저 어깨를 낮추고 생이 고단할수록 두둑한 뒷심으로 버텨 준 가면을 씌울 수 없는 민낯의 뒤가 나의 앞이었으면아니라네. 앞인 그대가 고생했네. 늘 걸어온 길보다 나아갈 길이 걱정 아닌가. 나는 그저 묵묵히 그대만 믿고 따랐을 뿐이네. 스마트한 세상, 구글 맵 열면 초라한 골목까지 알려주지 -
[시로 여는 수요일]어머니의 그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06 09:22:20-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
[시로 여는 수요일]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31 07:00:00-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
[시로 여는 수요일]어떤 풍경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24 07:00:00- 이진흥 당신이 산이라면 나는 강, 나는 당신을 넘지 못하고 당신은 나를 건너지 못합니다. 천년을 내게 발을 담근 채 당신은 저 건너에만 눈길을 두고, 만년을 당신 휩싸고 돌며 나는 속으로만 울음 삭였습니다. 그렇게 세월 지나 당신의 능선 위로 별빛 기울고 나의 물결 위로 꽃잎 떨어져 당신은 죽고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주검 돌아보니 산은 첨벙첨벙 강 속으로 들어가고 강은 찰랑찰랑 산의 허리 감싸 안고 -
[시로 여는 수요일]바닥을 마주친다는 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17 07:00:00- 김황흠 길바닥과 발바닥이 서로 사정없이 치고 미련 없이 뗀다 연거푸 치고 떼며 더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치고받는 바닥 끝까지 마주치는 일은 죽어서야 끝나는 일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도 막상 보면 허깨비 보듯 살아온 것 같아 돌아보면 마주치고 온 길바닥이 텅 비었다 누구를 바라보는 여물진 마음 가져 보지 못한 내 발도 가는 길도 저마다 바닥이 있다 바닥끼리 만나도 치고받는구나. 발바닥이 길바닥을 치면, 길바닥이 발 -
[시로 여는 수요일]파도의 일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10 07:00:00- 정수자 청이 딱히 없어도 맨발로 내닫는 건 바람과 손잡은 파도의 오랜 비밀 푸르른 등을 미는데 흰 속곳 춤이라니! 더러는 하품이고 거품뿐인 일과라도 바위야 부서져라 껴안고 굴러 보듯 필생의 운필을 찾아 눈썹이 세었다고 파도의 투신으로 해안선이 완성되듯 모래를 짓씹으며 달리리니 라라라 지면서 매양 칠하는 노을의 화법처럼싸르락 싸르락, 명사십리 모래를 밟으러 갈 때야 맨발이 제격이죠. 해진 러닝에 속곳 춤이라 -
[시로 여는 수요일]진정한 멋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03 07:00:00- 박노해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지탄받던 단어가 이렇게 멋스런 대접을 받을 수도 있구나. 분수를 -
[시로 여는 수요일]밥 이라는 앞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7.27 07:00:00- 박해람앞 뒤 없는 곳에 밥 차려 놓고 한 벌 수저 놓으면 따끈따끈한 앞이 생긴다 뒤로 밥 먹는 사람 없다 등 뒤에서도 알 수 있는 밥 먹는 몸짓 그런 앞을 보려고 누구나 살아서 밥을 벌려 한다 뒷걸음질 치는 고양이 쉬지 않고 도는 기계 돌아앉아 훌쩍훌쩍 우는 사람 밥 차려 놓으면 그 모든 뒤쪽들이 돌아앉는다오죽하면 밥에 대한 속담이 그리 많겠는가? ‘고운 일 하면 고운 밥 먹는다’고 한다. 미운 일 하고도 고운 밥 먹 -
[시로 여는 수요일]공중제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7.20 07:00:00-최정례 공중제비를 돌았다 꿈속이었다 빨간 셔츠의 선수가 잔디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공중제비를 돌았다 당나귀가 한밤중에 마구간을 뛰어넘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긴장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라고 했다 기쁨이 지나갔다 슬픔이 지나갔다 발을 굴렀다 공중제비를 돌았다 혼자였다 아침마다 국민체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공중제비가 좋겠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온 국민이 도는 거다. 살도 빠지고, 기분도 좋아질 거 -
[시로 여는 수요일]맨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7.13 07:00:00-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
오늘의 핫토픽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