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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모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09 07:30:00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
[시로 여는 수요일] 행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8.02 07:30:00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긴 행렬이 있다 나는 암탉을 키우지 않는다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순행하는 자연이 있다 암탉이 밀어낸 알들의 차례가 있다 어제의 달걀판은 오늘의 달걀판을 받든다 총상꽃차례의 꽃대에서 어제의 꽃송이가 오늘의 꽃송이를 받든다 보이지 않게 세계는 부패하고 있다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긴 행렬이 있다 마침내 내게 당도한 꽃다발이 안심하고 냄새를 피우고 있다 암 -
[시로 여는 수요일] 나무다리 위에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26 07:30:00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게 흐른다 나무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근심 없는 생 -
[시로 여는 수요일] 낮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19 07:30:00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 -
[시로 여는 수요일] 모르는 사람의 손이 더 따뜻하리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12 07:00:00내일 이 땅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화성엔 가지 않을 거야 거기엔 내 좋아하는 참깨와 녹두콩을 심지 못하므로 오늘 핀 도라지꽃 그릴 한 다스 색연필이 없으므로 일기책 태운 온기에 손 쬐며 쓴 시를 최초의 목소리로 읽어 줄 사람 없으므로 지구 아니면 어느 책상에 앉아 아름다운 글을 쓰겠니? 노래가 깨끗이 청소해 놓은 길 어느 방향으로 책상에 놓아 내일 아침의 왼쪽 가슴에 달아 줄 이름표를 만들겠니? 생각하는 마음 때 -
[시로 여는 수요일] 내가 나의 감옥이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7.05 07:30:00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 -
[시로 여는 수요일] 해바라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3.06.28 07:30:00담 아래 심은 해바라기 피었다 ?참 모질게도 딱, 등 돌려 옆집 마당 보고 피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말동무하듯 잔소리하러 오는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모종하고 거름 내고 지주 세워주고는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린 터에 야속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해바라기가 내려다보는 옆집 담을 넘겨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은 옆집 억지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등에 슬몃슬 -
[시로 여는 수요일]가난한 사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1.02 08:00:00- 정호승 별을 바라보는 사람은 가난하다 별을 바라보다가 별똥별이 되어 사라지는 사람은 가난하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가난하다 꽃을 바라보다가 인간의 아름다움이 부끄러워 한 송이 지는 꽃이 되는 사람은 가난하다 가슴속에 새를 키우는 사람은 가난하다 새가 날아갈 수 있도록 드디어 가슴의 창문을 활짝 열어주는 사람은 가난하다 진흙으로 빚은 귀를 지니고 봄비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가난하다 밤새워 봄비 소리를 -
[시로 여는 수요일]손
정치 정치일반 2022.10.26 07:00:00- 성명진 내 손아귀 바라본다 한 끼 분의 쌀을 풀 만큼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쌀 만큼이다 심장을 받쳐 들 만큼이다 가만히 합장하여 본다 오 평생 비어 있기를…….사람 손은 단풍나무 잎과 닮았다. 사람 손은 다섯 개 손가락으로 되어 있고, 단풍나무 잎은 일곱 개에서 열세 개 손가락으로 되어 있다. 사람은 겨우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만, 단풍나무는 수만 장의 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한 끼 분의 쌀을 두 손으로 풀 -
[시로 여는 수요일]소풍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0.19 08:00:00- 신현정 소풍을 딱 한번만 더 가자면 다람쥐가 솔방울을 물고 가는 그 뒤를 쫓아가서는 혹시나 다람쥐가 재주나 홀딱 넘어 만든 공산에 들게 될는지 나, 마냥 뒤쫓아 가겠다 거기 열매 한 개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도 천둥 만하게 크게 나는 공산에서 나, 설령 죄 있다 하더라도 다람쥐처럼 기고 숨고 금빛 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리곤 하겠다 다람쥐를 쫓아가다 다람쥐가 되는 시인을 보겠다. 재주를 넘다가 꽁무니에 복슬 꼬리 -
[시로 여는 수요일]친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0.12 08:00:00- 이시영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하마터면 의심할 뻔했습니다. 어찌 미워할 일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영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탈출한 -
[시로 여는 수요일]지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10.05 07:00:00- 이장근 병이 나를 앓는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내 존재를 확인한다 더 커지지 않았는지 내가 모르는 나에게 전이되지는 않았는지 시간 맞춰 약을 먹으며 나를 관리한다 세상의 모든 나는 완치될 수 없는 질환이어서 죽어야 끝나지만 나를 죽이지 않고 오래 앓아주는 병 정 많은 병을 만나 나는 오늘도 살아있다정 많은 병이라니 그런 병도 있을까마는 병을 친구 대하듯 하시는군요. 병과 싸우지 않고 병을 모시는군요. 병이 -
[시로 여는 수요일]민화 4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28 00:00:00- 성선경버스로 한 시간 반, 통영 간다 배둔, 고성을 거쳐 한 시간 반 통영 가서 시외버스 터미널 앞 큰언니식당에서 백반정식을 먹는데 생일도 아닌데 미역국이 한 대접 낯모를 곳에서 낯모르는 사람에게 생일상 받는다 구운 간조기 한 마리 김 몇 장, 계란찜 고봉밥 한 그릇, 생일상 받는다 뜻밖 허튼 걸음 버스로 한 시간 반 배둔, 고성을 거쳐 한 시간 반 통영 가 낯모를 곳에서 낯모르는 사람에게 생일상 받는다 따끈따끈하게 -
[시로 여는 수요일] 길에서 주웠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21 07:00:00- 강서연 섬진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고라니 발자국을 주웠다 구슬은 빠져나가고 틀만 남은 브로치 강과 들녘의 풍경을 여미고 있는 이것은 길이라는 순한 눈동자의 흔적이다 질주를 탁본한 천연 주얼리이다 바람이 몸을 깎아 브로치 빈 틀에 넣어보는 오후 소나기라도 한차례 내리고 나면 머무른 고라니 발자국에도 넘칠 듯 그렁거리는 에메랄드빛 보석 알알이 박혀 들겠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둥 -
[시로 여는 수요일] 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14 07:00:00나는 본 적 없네 나의 뒤 한번쯤 안아보고 싶어도 너무 먼 나의 뒤 한때 잘나가던 시절에도 뒤는 외로웠으리 삶이 부끄러울 때마다 먼저 어깨를 낮추고 생이 고단할수록 두둑한 뒷심으로 버텨 준 가면을 씌울 수 없는 민낯의 뒤가 나의 앞이었으면아니라네. 앞인 그대가 고생했네. 늘 걸어온 길보다 나아갈 길이 걱정 아닌가. 나는 그저 묵묵히 그대만 믿고 따랐을 뿐이네. 스마트한 세상, 구글 맵 열면 초라한 골목까지 알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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