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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어머니의 그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9.06 09:22:20-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
[시로 여는 수요일]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31 07:00:00-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
[시로 여는 수요일]어떤 풍경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24 07:00:00- 이진흥 당신이 산이라면 나는 강, 나는 당신을 넘지 못하고 당신은 나를 건너지 못합니다. 천년을 내게 발을 담근 채 당신은 저 건너에만 눈길을 두고, 만년을 당신 휩싸고 돌며 나는 속으로만 울음 삭였습니다. 그렇게 세월 지나 당신의 능선 위로 별빛 기울고 나의 물결 위로 꽃잎 떨어져 당신은 죽고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주검 돌아보니 산은 첨벙첨벙 강 속으로 들어가고 강은 찰랑찰랑 산의 허리 감싸 안고 -
[시로 여는 수요일]바닥을 마주친다는 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17 07:00:00- 김황흠 길바닥과 발바닥이 서로 사정없이 치고 미련 없이 뗀다 연거푸 치고 떼며 더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치고받는 바닥 끝까지 마주치는 일은 죽어서야 끝나는 일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도 막상 보면 허깨비 보듯 살아온 것 같아 돌아보면 마주치고 온 길바닥이 텅 비었다 누구를 바라보는 여물진 마음 가져 보지 못한 내 발도 가는 길도 저마다 바닥이 있다 바닥끼리 만나도 치고받는구나. 발바닥이 길바닥을 치면, 길바닥이 발 -
[시로 여는 수요일]파도의 일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10 07:00:00- 정수자 청이 딱히 없어도 맨발로 내닫는 건 바람과 손잡은 파도의 오랜 비밀 푸르른 등을 미는데 흰 속곳 춤이라니! 더러는 하품이고 거품뿐인 일과라도 바위야 부서져라 껴안고 굴러 보듯 필생의 운필을 찾아 눈썹이 세었다고 파도의 투신으로 해안선이 완성되듯 모래를 짓씹으며 달리리니 라라라 지면서 매양 칠하는 노을의 화법처럼싸르락 싸르락, 명사십리 모래를 밟으러 갈 때야 맨발이 제격이죠. 해진 러닝에 속곳 춤이라 -
[시로 여는 수요일]진정한 멋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8.03 07:00:00- 박노해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지탄받던 단어가 이렇게 멋스런 대접을 받을 수도 있구나. 분수를 -
[시로 여는 수요일]밥 이라는 앞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7.27 07:00:00- 박해람앞 뒤 없는 곳에 밥 차려 놓고 한 벌 수저 놓으면 따끈따끈한 앞이 생긴다 뒤로 밥 먹는 사람 없다 등 뒤에서도 알 수 있는 밥 먹는 몸짓 그런 앞을 보려고 누구나 살아서 밥을 벌려 한다 뒷걸음질 치는 고양이 쉬지 않고 도는 기계 돌아앉아 훌쩍훌쩍 우는 사람 밥 차려 놓으면 그 모든 뒤쪽들이 돌아앉는다오죽하면 밥에 대한 속담이 그리 많겠는가? ‘고운 일 하면 고운 밥 먹는다’고 한다. 미운 일 하고도 고운 밥 먹 -
[시로 여는 수요일]공중제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7.20 07:00:00-최정례 공중제비를 돌았다 꿈속이었다 빨간 셔츠의 선수가 잔디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공중제비를 돌았다 당나귀가 한밤중에 마구간을 뛰어넘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긴장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라고 했다 기쁨이 지나갔다 슬픔이 지나갔다 발을 굴렀다 공중제비를 돌았다 혼자였다 아침마다 국민체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공중제비가 좋겠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온 국민이 도는 거다. 살도 빠지고, 기분도 좋아질 거 -
[시로 여는 수요일]맨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7.13 07:00:00-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 -
[시로 여는 수요일]자화상 그리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6.29 07:00:00- 김명옥 끙끙 앓는 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저 여자 죽을 만큼 아파보면 삶이 가벼워지기도 한다는 저 여자 마음 아픈 날에는 시집을 덮고 돌아눕는 저 여자 눈물 나는 날은 가까이 보이기도 하는 저 여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해서 저 여자 허공에 갇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저 여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껍질을 벗겨 여자를 발굴하는 작업 아직, 무엇이 더 남았냐고 내게 묻는 저 여자 어디로 달려 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
[시로 여는 수요일] 손 씻는 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6.22 07:00:00- 류근왼손은 오른손을 씻고 오른손은 왼손을 씻는 법이다 손바닥은 손등을 씻고 손등은 손바닥이 데려가 입힌 때를 다른 편 손바닥에 기꺼이 맡기는 법이다 손에서 손까지의 거리 손바닥에서 손등까지의 거리 서로 마주치지 않으면 죽어도 씻을 수 없는 거리가 가슴 아래 같은 체온에 매달려 있다손바닥은 세상의 보물을 다 쓸어볼 수 있지만 제 손등만은 어루만질 수 없다. 서로 없으면 안 되지만 평생 다른 곳을 보아야 한다. -
[시로 여는 수요일]정지의 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6.15 07:00:00-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한 동안 멈추어 서서 뒤를 돌 -
[시로 여는 수요일]오늘 내게 제일 힘든 일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6.08 07:00:00- 손진은 늦점심을 먹으러 마주 보는 두 집 가운데 왼편 충효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가는 일, 길가 의자에 앉아 빠안히 날 쳐다보는 황남순두부집 아주머니 눈길 넘어가는 일, 몇 해 전 남편 뇌졸중으로 보내고도 어쩔 수 없이 이십수 년째 장살 이어 가고 있는 희끗한 아주머니, 내 살갗에 옷자락에 달라붙는 아린 눈길 애써 떼어 내는 일, 지뢰를 밟은 걸 알아차린 병사가 그 발 떼어 놓지 못해 그곳의 공기 마구 구기듯, 가물거 -
[시로 여는 수요일]살구나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5.25 07:00:00쏙쏙 뼈가 쑤신다는 기별을 받고 고향에 갔다 검버섯 덕지덕지 핀 스레트 낡은 집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아끼던 옷 주섬주섬 걸치고 병원 가면서도 에미 잘 있고 선이와 철이도 잘 있냐며 어머닌 가족이란 끈을 놓지 않는다 골밀도 검사를 위해 분홍 가운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빛깔이 참 곱다 이게 공단이냐 다우다냐” 시집 갈 색시처럼 만져보고 비벼본다 그때 젊은 날의 푸른 물살이 주름 속으로 잠깐 흘렀을까 한때 -
[시로 여는 수요일]목욕탕에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5.18 07:00:00- 남호섭 이주 노동자 세 사람 팬티 입은 채 목욕탕에 들어왔다 수영장에 온 사람들마냥 자기들끼리는 싱글벙글 냉탕 온탕 들락날락하는데 아무 말 못 하고 째려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슈퍼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 다 보여 주는 건 우리 손해고 다 못 씻는 건 지놈들 손해지 설날 앞둔 일요일 아침 뜨거운 김 피어오르는 목욕탕에서 한데 어울려 목욕을 한다 냉탕, 온탕이 깔깔 껄껄 웃는다. 바둑무늬 타일이 군데군데 이 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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