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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3.09 07:00:00당신이라는 말 - 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전암 능인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 -
[시로 여는 수요일] 간절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3.02 07:00:00- 박완호 환절기를 보내고 나면 또 다른 환절기가 찾아왔다. 사랑 뒤에 사랑이, 이별 뒤에 이별이, 환절기에서 환절기로 가는 어디쯤에서 삶은 마지막 꽃잎을 떨구려는 건지. 죽음 너머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죽음은 늘 다른 누군가의 것이어서, 나는 내내 아파하기만 했을 뿐. 환절기와 환절기 사이, 좁고 어두운 바닥에 뿌리를 감추고 찰나에 지나지 않을 한번뿐인 생을 영원처럼 누리려는 참이었다. -
[시로 여는 수요일]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2.23 07:00:00-이시영 20세기 미국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죽기 전에 뉴욕에 있는 그의 집에서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나 이제 가네!”라고 작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역시 20세기 미국 칼럼니스트 부크월드는 자신의 죽음을 ‘뉴욕 타임즈’ 인터넷 판 동영상 비디오에 직접 출연해 알렸다. “안녕하세요, 아트 부크월드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
[시로 여는 수요일]눈사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2.16 07:00:00- 강영환대설주의보가 지나간 벌판에 서서 햇살만으로도 녹아내릴 사람이다 나는 한쪽 눈웃음으로도 무너져 내릴 뼈 없는 인형이다 벌판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곁에 왔다 걸어온 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갈 길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내 지키고 선 이 자리에서 여분으로 남겨진 사랑도 가슴에서 뽑아낸 뒤 흔적 없이 떠나고 싶을 뿐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려 붙인 눈썹이 떨어져 나간 뒤 그대 뿜어낸 입김에 -
[시로 여는 수요일] 밥
문화·스포츠 문화 2022.02.09 07:00:00그렇다 쌀을 다 쏟고 나서 그 포대를 세울 때 그 때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는 몇 낱 알쌀의 그 소리 크다 매양, 그렇다 계량컵의 쌀을 쏟을 때 솥은 깨지는 소리를 낸다 쌀이 쌀 위에 떨어질 즈음에야 그 소리, 잦아든다 그러고 있다 길 없는 귀신의 길도 밥이 내고 밥이 메운다 그렇다쌀도 먼저 맨바닥에 떨어질 때 비명을 지르는구나. 도정까지 마치고, 쌀눈까지 떨어져 눈이 멀었는데도 아득한 바닥이 무섭기만 하구나. 함께 쏟 -
[시로 여는 수요일]어머니의 숨비소리 2
문화·스포츠 문화 2022.01.26 07:00:00- 김영란 그믓 그스멍 느거 나거 바당은 곱가르지 안 ㅎㆍㄴ다 땅 문세 집 문세 문세옌 ㅎㆍㄴ걸 베려나 봐시냐 바당은 그믓 긋지 안ㅎㆍ영…… 게난 살아졌주시깨나 읽어봤지만 첫 줄부터 막힌다. 두 번째 줄로 건너뛰어도 난감하다. 시루떡에 박힌 콩처럼 한두 개 아는 단어를 이어봐도 매끄럽게 뜻이 통하지 않는다. 제주 여행 중 한 찻집에 들렀을 때 만난 시다. 감물 천에 정성껏 쓴 손 글씨 앞에 난색을 표하니 토박이 주인 -
[시로 여는 수요일]이른 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1.19 07:00:00- 이규리 그분하고 같은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냄비 안에서 숟갈이 부딪혔을 때 그렇게 아득할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딩딩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것이 끝이라 해도 끝 아니라 해도 다시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하얗고 먼 길 하나 휘어져 있었다 같은 아픔을 보게 되리라 손가락이 다 해지리라 어떻게 되든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한 순간이 -
[시로 여는 수요일] 눈덩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1.12 07:00:00- 조말선 시작은 나였어 나를 묻히고 나는 굴러간다 나는 아니야, 라고 외치는 나를 묻히며 굴러간다 너도 그랬잖아, 라고 외치는 나만 묻히며 굴러간다 옷 갈아입을 시간을 줘, 라고 외치는 나를 묻히며 굴러간다 나는 나에게 묻힌다 내 무덤을 내가 만든다 나도 같이 가, 라고 외치는 너에게 힘껏 눈덩이를 던진다 나는 제대로 박살난다 나에 대해서 가속도만 붙는다 나는 밤새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나는 이튿날 눈 녹듯 사라진 -
[시로 여는 수요일]새해 인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2.01.05 07:00:00-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고기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 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글쎄, 지난해엔 삼백 -
[시로 여는 수요일]알고 보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2.28 17:46:11사랑하는 사람이 침묵할 때 그 때의 침묵은 소음이다 그 침묵이 무관심이라 느껴지면 더 괴로운 소음이 된다 집을 통째 흔드는 굴삭기가 내 몸에도 있다 침묵이자 소음인 당신, 소음 속에 오래 있으면 소음도 침묵이란 걸 알게 된다 소음은 투덜대며 지나가고 침묵은 불안하게 스며든다 사랑에게 침묵하지 마라 귀찮은 사랑에게는 더욱 침묵하지 마라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건너편에서 보면 모든 나무들이 풍경인 걸 나무의 -
[시로 여는 수요일]새와 의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2.22 07:00:00- 송찬호 그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 나무였을 때 가지에 날아와 앉던 어떤 새를 의자는 기억하고 있다. 새벽을 깨우며 지저귀던 깃털에 찬 이슬이 묻어 있던 꽁지 짧은 어떤 새를 잊지 않고 있다 의자라는 직업을 갖기 전 의자라는 형벌의 정물로 만들어지기 전새는 나무가 서 있던 자리를 몇날 며칠이나 찾아왔을 것이다. 우듬지가 있던 빈 허공을 맴돌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새들을 어깨에 앉히던 -
[시로 여는 수요일]반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2.01 07:00:00김주대 양손에 큰 짐을 든 노인이 동요를 부르며 걷다가 간간이 뒤돌아본다 계집아이가 깡마른 사내아이를 업고 노인의 노래를 따라 걷는다 계집아이의 걸음이 느려지면 노래가 커지고 따라붙으면 작아진다 등에 업힌 사내아이를 돌아보며 계집아이도 노래를 따라 부른다 자다 깬 사내아이가 계집아이의 목을 끌어안고 노래를 옹알거린다 노래를 따라 노래가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간 후 반달이 천천히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반달 -
[시로 여는 수요일]어처구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1.24 07:00:00- 마경덕 나무와 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근본이 다르고 핏줄도 다른데 눈 맞추고 살을 섞는다는 것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일 한곳에 붙어살며 귀가 트였는지, 벽창호 같은 맷돌 어처구니 따라 동그라미 그리며 순하게 돌아간다 한 줌 저 나무 고집 센 맷돌을 한 손으로 부리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근본이 다르고 핏줄이 달라서 한 몸이 되었을 것이다. 맷돌 손잡이까지 돌이었다면 시종 덜그럭거렸을 것이다. -
[시로 여는 수요일] 초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1.17 07:05:00김은자 하릴없이 숫눈발 속에 다시 서노니 초경의 비린내 풋풋한 순수함이여. 너의 심부에 언제나 깊고 어둔 발자취를 남겼으되, 이 눈길 위에 다시 새로운 나의 발자국. 오오 편편으로 흩어지는 하늘의 전신이 흰 북소리 둥둥 울릴 때 과거가 어찌 남김없이 용서받고 기억들이 어찌 어김없이 위무 받느뇨.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번째 만남이듯 흰 눈썹 부비며 낯선 미명의 거리를 가노라. 미진한 기억 속에 흰 북소리 낮게 -
[시로 여는 수요일]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1.10 07:00:00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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