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원자력협정 체결 이후 지난 60년간 발전기술 자립의 성과를 이룬 대한민국의 원자력기술이 또 다른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다. 원전 개발 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파생기술로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신 응용산업 육성의 희망이 움트고 있다. 오는 7월 그 대표적 사업이 결실을 보인다. 맹물에 레이저를 쪼여 한 방울 분량인 1㏄에 5만원을 호가하는 방사능 물이 다음달부터 양산되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산소-18 농축수’다. 국내 금 시세가 1g(1g=1㏄)당 약 5만원 안팎이므로 그야말로 황금수라 할 수 있다.
해당 기술을 개발한 정도영 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레이저로 산소-18농축수를 양산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은 세계 최초”라며 “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 강국들조차 지난 20~30여년간 해당 기술의 상용화에 실패했는데 이번에 대한민국이 선점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 기술은 원자력연구원이 40%의 지분을 가진 연구소기업 듀캠바이오연구소로 이전됐으며 현재 기본생산 설비를 완비해 곧 상용가동을 개시하며 내년에는 공장 신축이 이뤄질 예정이다.
산소-18을 쉽게 풀이하자면 비만해져 살찐 산소원자라고 비유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산소원자(산소-16)는 8개의 양성자와 8개의 중성자를 가져 질량수(양성자수+중성자수)가 16인 데 비해 극히 드물게 10개의 중성자와 8개의 양성자를 지닌 산소가 자연계에 존재한다. 이것이 산소-18이다. 이처럼 보통의 원자와 양성자 수는 같으나 중성자 수가 다른 것을 동위원소라고 한다. 산소-18은 방사능을 내뿜으므로 방사성 동위원소로 분류된다.
산소-18이 주목 받는 이유는 치매나 파킨슨병·암 등을 진단하는 데 쓰이는 의약품인 플루트메타몰의 원료이기 때문이다. 플루트메타몰은 산소-18을 양성자가속기에 넣어 가속 시킨 뒤 서로 충돌시키는 등의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다. 세계적 플루트메타몰 수요가 늘면서 현재 2억~3억 달러 정도인 전 세계 산소-18농축수 시장 규모는 앞으로 10년 내 8억 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산소 동위원소들의 자연계 존재비율 (단위: %)
일반 산소(산소-16) | 산소-17 | 산소-18 |
99.762 | 0.038 | 0.2 |
문제는 수요가 느는 데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에 있다. 자연계에서 순수한 물(H2O)에 함유된 산소-18의 비율은 불과 0.2%에 불과할 정도로 희박하다. 이를 플루트메타몰 제조에 사용하려면 물속에 함유된 산소-18의 비율을 98% 이상으로 높여 농축시켜야 한다. 농축을 위해 미국·러시아 등은 지난하고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최대 수㎞ 길이의 증류탑을 짓고 해당 시설에서 물을 증발시키는 방식이다. 보통의 산소원자와 산소-18은 아주 미세하게 증발률이 달라 물을 증발시키면 보통의 산소원자 등이 먼저 증발하고 산소-18이 남는다. 하지만 물에 포함된 산소-18이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필요한 분량을 얻으려면 수천번에서 수만번씩 증발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생산시설에 물을 집어넣고 증류해 최종 결과물을 얻기까지 길게는 1년가량 걸린다는 게 학계의 전언이다. 그만큼 제조비용은 막대할 수밖에 했다. 일본은 산소를 극저온으로 얼려서 증류하는 대안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생산성이 높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존 증류방식의 한계를 넘기 위해 원자력연구원이 선택한 것은 레이저를 이용한 광분해다. 광분해란 물질에 빛으로 에너지를 쏴서 분자결합을 끊는 방식이다. 이때 결합을 끊기 위한 에너지량은 분자의 종류마다 제각각인데 산소분자의 경우 특정 파장을 지닌 자외선 레이저를 쏘면 산소-18만 선택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다. 레이저 광분해 방식을 쓰면 기존에 1년 정도 걸리던 산소-18의 생산시간을 1시간 만에 마칠 수 있다. 또한 “기존과 같은 대규모 증류설비가 필요 없이 비교적 간단한 장비만 갖추면 돼 제조설비 비용 기존 대비 30% 정도밖에 들지 않아 해외 경쟁제품보다 원가경쟁력이 높다”고 듀캠바이오측은 설명했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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