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한반도에는 기쁨과 환희의 물결이 넘쳐났다. 물론 환희로 물든 해방의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제의 핍박에서는 벗어났지만, 주권을 찾은 한반도에는 또 다른 갈등과 분열, 그 외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란 속에서도 희망은 싹트고 있었다. 일제의 간섭 없이, 오롯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두 달 후인 1945년 10월 3일, 순수 민족자본으로 국내 최초의 식품회사가 탄생했다. 바로 ‘해태제과합명회사(현 해태제과)’였다. 해방 직후 일본 기업 영강제과 직원이었던 박병규, 민후식, 신덕본, 한달성이 회사를 인수해 설립한 해태제과합명회사는 대한민국 최초 과자인 ‘연양갱’과 사탕, 캐러멜 류를 생산하며 국내 제과시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사회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 분위기가 원료 부족과 자금난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회사 설립 이후 곧바로 시작된 미국산 사탕의 대량 수입은 국내 제과기업의 존폐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태제과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상품 다양화와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을 통해 제과기업의 초석을 닦아 나갔다. 6.25 전쟁으로 임직원 절반 이상을 잃고 판매조직이 거의 와해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위기를 이겨내고 본격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해태제과가 국내 제과시장의 문을 열었다면, 본격적으로 시장 경쟁을 촉발한 기업은 크라운제과였다. 1947년 서울역 뒤 중림동에서 ‘영일당제과’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크라운제과는 국내 최초의 샌드형 비스킷 브랜드 ‘크라운산도’ 시리즈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특히 크라운제과 창업주인 고(故) 윤태현 회장이 과자 틀 쇠를 직접 깎아 ‘산도’를 만들어낸 이야기는 지난 1999년 배우 김혜수 주연의 드라마 ‘국희’의 모티브가 될 정도로 지금까지 제과업계의 대표적인 성공신화로 손꼽히고 있다. 그 후 크라운제과는 죠리퐁, 콘칲, 쵸코하임, 쿠크다스 등 히트 상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명실공히 국내 대표 제과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양사는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한가족이 됐다.
국내 제과업계는 지금 양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두 리더,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과 신정훈 해태제과 대표의 경영 전략에 주목하고 있다. 윤영달 회장의 사위인 신정훈 대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해태제과에 ‘허니시리즈’를 선물한 장본인이다. 평소 해태제과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 윤 회장은 신 대표를 단순히 자신의 사위가 아닌, 든든한 사업 파트너이자 동료로 여기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국내 제과시장을 이끌어온 양사의 수장 윤 회장과 신 대표는 현재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포춘코리아가 해태제과와 크라운제과의 성장 스토리,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장인’ 윤영달 회장과 ‘사위’ 신정훈 대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했다.
지난 5월 11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 모습을 드러낸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의 얼굴은 한껏 상기돼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수차례 도전했지만 이뤄내지 못했던 또 하나의 꿈을 실현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해태제과식품(이하 해태제과)은 지난 2001년 상장 폐지를 당한 후 15년 만에 증시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 전에도 윤 회장은 해태제과의 상장을 몇 차례 추진한 바 있었지만, 지난 2008년 불거진 ‘멜라민 파동’을 포함해 각종 악재가 발목을 잡으며 상장 무산이라는 아픔을 겪어왔다.
이날 윤 회장은 그간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상장의 소회를 밝혔다. “개인적으론 크라운제과 상장 이후 40년 만에 거래소를 다시 찾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글을 준비했지만 흥분돼 글자가 잘 보이지 않네요. 해태제과를 상장하면서 가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건 많은 고객들이 우리 주주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임직원 모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날에는 윤 회장만큼이나 주목을 받은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윤 회장의 사위인 신정훈 해태제과 대표다. 해태제과가 크라운제과 품에 안긴 지난 2005년 해태제과에 합류한 신 대표는 이후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이며 해태제과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초유의 히트작으로 기록된 ‘허니버터 시리즈’의 개발을 진두지휘하며 단숨에 스타 CEO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해태제과의 도약을 장인 윤영달 회장과 사위 신정훈 대표의 찰떡궁합 경영이 이뤄낸 결과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윤 회장의 관록과 신 대표의 혁신이 만나 최상의 시너지를 냈다는 것이다. 장인-사위 경영의 대표적인 성공케이스로 손꼽히는 두 사람의 찰떡궁합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지난 2004년으로 되돌려 보자.
■ 장인과 사위가 이끈 해태제과 ‘14년 만의 증시 복귀’
지난 2005년 초, 당시 국내 제과업계 4위였던 크라운제과가 2위인 해태제과를 인수했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과 언론에선 이를 두고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켰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실제 크라운제과의 해태제과 인수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단 크라운제과는 2003년 당시 화의(和議·파산을 예방할 목적으로 채무 정리에 관해 채권자와 채무자가 맺는 강제 계약) 상태였다. 1998년 외환위기 여파로 부도처리 된 후 5년째 화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 인수전에 뛰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거의 없다. 단순히 기업 규모 측면에서도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의 차이는 매우 컸다.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 인수 신청서를 제출한 2004년을 기준으로 보면, 크라운제과의 매출은 2,897억 원으로 해태제과 매출 6,187억 원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부 반발이 거셌다. ‘무리하게 해태제과를 인수했다간 우리도 같이 쓰러진다’, ‘우리 사정이 누군가를 인수할 상황이냐’ 같은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당시 빅딜을 이끈 윤영달 크라운제과 회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작은 회사가 큰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고 직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크라운제과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윤 회장의 의지가 단호했습니다. 이제는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인수하는 시대가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회사가 느린 회사를 잡아 먹는 시대라고 강하게 어필하셨죠. 당시 윤 회장은 해태제과 인수가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의 주력 분야인 비스킷과 스낵과자류에서 겹치는 제품군이 거의 없었거든요. 결국 직원들을 설득한 윤 회장은 과감히 인수전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의견이 모이자 윤 회장은 망설임 없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해태제과를 관리하고 있던 외국계 자산관리 회사 ‘USB컨소시엄’에 인수제안서를 제출했지만, 화의 상태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인수와 관련된 자료조차 내주지 않는다는 실무진의 보고를 받자 윤 회장은 빠르게 움직였다. 즉각 화의 종결을 선언하며 인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렇게 한 번의 고비는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이번에는 인수자금 마련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시장에서 평가한 해태제과의 인수적정가는 5,000억 원 수준이었다. 막 화의를 벗어난 크라운제과로선 감당하기 버거운 액수임에 분명했다. 윤 회장의 관록과 아이디어는 바로 이 순간에서 빛을 발했다. 제과업계 관계자 A 씨는 말한다. “윤 회장은 평소 해태제과를 ‘민족기업’으로 생각했어요. 해방 이후 순수 민족자본으로 탄생한 최초의 제과기업이었으니까요. 이를 활용하면 자금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윤 회장이 (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처음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군인공제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평소 생각을 말씀하셨죠. ‘민족기업이 해외업체에 넘어가 있으니 이를 내가 찾아오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군인공제회 관계자들의 심정적 동감은 이끌어 냈지만, 그게 바로 투자 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윤 회장은 직접 크라운제과 협력업체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셨죠. 그렇게 협력사에서 십시일반 받은 돈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윤 회장의 노력이 결국 군인공제회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크라운제과는 군인공제회와 함께 만든 크라운컨소시엄을 통해 해태제과 인수에 성공했다. 인수 이후 윤 회장은 두 기업의 화학적 결합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당시 업계에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두 조직이 물리적 결합을 넘어 어떻게 화학적 결합을 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삼킨 형태의 인수·합병에선 골리앗에 속한 임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윤 회장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윤 회장은 해태제과 인수 후 처음 회사를 찾은 자리에서 “우리는 점령군이 아니다. 제과 명가 해태제과가 가진 혼을 살려 나가겠다” 고 말하며 임직원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후에도 윤 회장은 일주일에 나흘은 해태, 하루는 크라운으로 출근하며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크라운제과에서 윤 회장이 만든 등산, 독서, 조찬 모임 등 각종 프로그램에 해태제과 임직원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화학적 결합을 위한 다양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후에도 해태제과의 혼을 살리기 위한 윤 회장의 노력은 쉼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화학적 결합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인수 직후 발생한 해태제과 영업직 노조의 장기 파업은 치명적이었다. 회사가 직장폐쇄로 맞서자 노조는 크라운제과 불매운동으로 맞불을 놓기까지 했다. 노사의 극적인 합의로 170여 일에 걸친 파업이 마무리 되긴 했지만, 그 땐 이미 해태제과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2004년 3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던 해태제과의 영업이익은 파업 여파로 100억 원 적자로 돌아섰고, 크라운제과 역시 그 후폭풍으로 영업이익 감소가 나타났다.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윤영달 회장은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사위인 신정훈 당시 해태제과 상무의 영입이었다.
■ 사위를 ‘모셔온’ 장인 윤영달 회장
앞서 언급했듯이, 신정훈 대표는 윤영달 회장의 사위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 MBA 과정을 마친 후 삼일회계법인을 거쳐 외국계 경영컨설팅 업체 베인앤컴퍼니에서 근무했다. 윤 회장의 장녀인 윤자원 씨와 부부의 연을 맺은 신 대표는 결혼 이후에도 베인앤컴퍼니에서 2년 이상 더 일을 했다. 크라운·해태제과 내부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신 대표는 원래 해태제과에 합류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베인앤컴퍼니가 크라운제과의 해태제과 인수합병에 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신 대표가 해태제과의 내부 사정과 경영 상태를 훤히 꿰뚫게 됐고, 이를 눈여겨본 장인 윤 회장이 신 대표에게 합류를 제안했다고 한다. 이후 신 대표는 2005년 해태제과 재경관리본부장으로 합류하며 장인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주변에서 이들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인물을 단지 사위라는 이유로 높은 직책에 앉힌 게 아니냐는 말들이 무성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신 대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다소 억울한 면도 있었다. 신 대표는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컨설팅 회사에 재직할 때 주로 제과시장 분석과 마케팅 전략 수립 업무를 담당했는데, 그저 낙하산으로만 보는 시선이 억울하기도 했다”며 “성과로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이 같은 논란을 불식시킨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바로 지난 2008년 불거진 이른바 ‘멜라민 파동’ 이었다. 멜라민은 플라스틱을 만들 때 사용되는 유해 화학물질이다. 적은 양으로도 신장결석을 유발하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까지 하는 악명 높은 물질이다. 당시 5만여 명의 어린이들에게 피해를 준 이른바 ‘중국산 멜라민 분유 파동’의 여파는 북미, 유럽, 아프리카 지역으로도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 때 국내 시장에서 처음으로 멜라민이 검출된 과자가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의해 적발됐다. 바로 해태제과의 커스터드 제품이었다. 중국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제조된 커스터드에서 멜라민이 검출된 것이었다. 해태제과는 한 순간에 논란의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러자 당시 해태제과 상무로 재직 중이던 신 대표가 바로 사태 진화에 뛰어들었다. 즉시 회사 내부 품질관리 심사 기구를 중심으로 전방위적인 TF 팀을 구성했다. 전국 영업사원을 총동원해 제조 일자, 유통기한에 상관없이 제품 전량을 회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본사 임직원들도 전국 각 지역의 모든 거래처와 도·소매점을 돌며 제품 회수 확인을 진행했다. 중국 현지 OEM 업체와의 거래를 즉각 중단했고, 원인조사와 법적 대응을 위한 행보도 이어갔다.
해태제과의 발 빠른 수습은 위기관리의 모범적인 매뉴얼 방식 대로 착착 진행됐다. 멜라민 파동 이후 급감했던 매출은 불과 3개월 만에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고, 해태제과는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태 수습을 진두지휘한 신정훈 상무가 스스로 낙하산 인사가 아니었음을 결과로 입증한 셈이었다. 이 일은 결과적으로 그가 해태제과 대표에 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식품업계 관계자 B 씨는 말한다. “윤 회장은 사석에서 사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신 대표가 해태제과에 오기 전부터 말이죠. 윤 회장은 신 대표를 해태제과로 영입할 당시 ‘나는 사위를 회사로 불러들인 게 아니라 우리 회사로 모셔왔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능력에 관한 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죠. 윤 회장은 신 대표를 처음 ‘모셔 올’ 당시 공동대표직을 염두에 뒀습니다. 하지만 이사회에서 ‘가족들이 전면에 나설 경우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자 직급을 낮췄다고 합니다. 내부 인사들은 현재까지 보여준 신정훈 대표의 경영능력에는 합격점을 줄 만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스스로 보여준 성과가 명확하니까요.”
■ 허니버터칩 인기로 날개 단 신정훈 대표
멜라민 파동을 무사히 수습한 신정훈 대표는 이후 해태제과의 혁신을 진두지휘하고 나섰다. 특히 그는 ‘지시만 하는 대표’가 되길 거부했다. 직원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이며 회사를 변화시켰다. 해외 출장 때마다 현지 과자를 직접 맛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신제품 출시 후에는 직원들이 참여하는 품평회를 개최해 다양한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 대표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허니버터칩의 성공이었다. 허니버터칩은 경영자로서 신 대표가 가진 장점이 집약된 결과물이었다. 신 대표는 짭조름한 기존 감자칩의 틀에서 과감히 탈피한 ‘달콤한 감자칩’ 아이디어에서부터 개발, 제조방식,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허니버터칩의 모든 것에 관여했다. 허니버터칩이 신 대표 작품이라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닌 이유이다.
허니버터칩의 시작은 지난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태제과는 감자 스낵 시장에 도전장을 던지기 위해 ‘감자칩 개발 특별팀’이라는 TF 팀을 구성했다. 당시에도 해태제과는 감자칩 제품을 보유하고 있긴 했었다. 그러나 경쟁제품인 ‘포카칩’과 ‘프링글스’의 아성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 경쟁제품의 장벽이 너무나 높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팀 차원에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던 중 국내 스낵 시장 분석을 위한 이른바 ‘맛 지도’를 작성하게 되었다.
제과업체들은 보통 신제품 아이디어 회의에서 이른바 ‘지도형 분석 자료’를 활용하곤 한다. 지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브랜드 별 제품군 현황이다. 비스킷, 스낵, 아이스크림 등 제품군 별로 경쟁사가 어떤 제품을 내놓았는지 확인하고, 틈새시장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맛 지도다. 맛 지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밀가루, 옥수수, 감자 등 특정 재료로 만들어진 과자가 각각 어떤 맛을 함유하고 있는지 구분해 놓은 지도라 할 수 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정명교 해태제과 연구소장은 말한다. “맛 지도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특별한 점을 찾지못했어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옆에 앉아있던 신 대표가 혼잣말로 ‘왜 감자칩은 짠맛만 있는 거지?’라고 하더군요. 그 한마디에 모든 방향이 결정됐습니다. 짠맛에서 벗어나 새로운 맛의 감자칩을 만들자는데 의견이 모아졌죠.”
이후 신 대표는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해외시장에선 어떠한 맛의 감자칩이 인기를 끌고 있는지 개발팀에 전수조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세계적 트렌드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때 신 대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제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일본 가루비사의 ‘해피니스버터칩’이었다. 일본 출장 때 먹어본 이 감자칩의 맛이 떠오른 신 대표는 즉시 개발팀에 참고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모방을 지시한 건 아니었다. MSG를 사용해 감칠맛을 낸 일본 제품과 차별화하기 위해, MSG를 사용하지 않고 유사한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부터 개발팀과 신 대표의 사투가 시작됐다. 다양한 재료를 배합한 시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시식해 보는 시간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정 소장은 말한다. “부드럽게 올라오는 단맛을 내기 위해선 아카시아 벌꿀이 최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어요. 문제는 고소한 맛이었죠. 지루한 작업이 계속됐습니다. 그 때 신 대표가 아이디어를 내더군요. 프랑스산 고메버터를 넣어보면 어떻겠냐는 거였죠. 그래서 고메버터를 넣은 29번째 시제품을 만들게 됐죠. 그리고 그걸 맛본 순간 팀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이 맛이다’ 싶었거든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허니버터칩이었다. 개발에 성공하자 신 대표는 이 제품의 이름 짓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해태제과 측에 따르면, 처음 개발팀에서 제시한 이름은 ‘달콤한 꿀감자’였다. 하지만 신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더욱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네이밍이 소비시장의 주축인 젊은 층에 어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신 대표는 제품의 주원료인 꿀과 버터를 강조한 ‘허니버터칩’ 을 이름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제품이 출시 되자마자 곧바로 마케팅 전략 수립에 돌입했다.
그 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 파워블로거가 허니버터칩 구매인증 글을 올린 게 그 시작이었다. 그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구매인증부터 맛 평가, 허니버터칩과 함께 찍은 셀카까지 무서운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를 눈여겨 본 신 대표는 그 때까지 진행했던 마케팅 전략의 수정을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제로 마케팅 전략이었다.
해태제과 홍보팀 관계자는 말한다. “수많은 제품을 출시해 본 경험을 갖고 있지만, 허니버터칩 출시 이후 SNS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습니다. 마케팅 팀에선 SNS에서 입소문을 탔으니 공격적으로 광고와 마케팅을 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죠. 그런데 신 대표의 생각은 정반대였어요.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에서 일반적인 대응을 하는 건 옳지 않다며 새로운 대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게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 대표는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에 기업이 인위적으로 관여하는 순간, 이 같은 현상이 빛을 잃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어요.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뒀죠. 결과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의도대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반짝 열풍으로 시들어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마케팅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 제과시장 판도 바꾼 윤 회장의 ‘크로스마케팅-루트 세일’
신 대표의 혜안과 전략이 고스란히 녹아든 허니버터칩은 삽시간에 국내 제과시장을 뒤흔든 메가 히트작으로 떠올랐다. 출시 3개월 만에 매출 50억 원을 기록했다. 지금도 매달 생산하는 약 75억 원치의 허니버터칩이 전량 판매되며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지난 5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에 준공한 제2공장을 통해 월 생산량을 2배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윤영달 회장과 신정훈 대표, 장인과 사위의 경영 스타일과 성과에는 매우 흡사한 부분이 있다. 신정훈 대표에게 ‘허니버터칩’이 있다면, 윤영달 회장에겐 이보다 한참 전인 1972년에 크라운제과의 상징으로 꼽히는 ‘죠리퐁’을 개발한 업적이 있다. 신 대표가 SNS와 입소문만을 활용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창출했다면, 윤 회장은 국내 제과시장에서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크로스마케팅’, ‘루트 세일’ 같은 독특한 판매영업 전략을 선보인 바 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제과시장에서 ‘스낵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원 부족과 기술력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크라운제과 상무이사로 재직 중이던 윤영달 회장은 스낵류가 과자 시장의 전성시대를 열어 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스낵류의 개발을 목표로 줄곧 아이디어 구상에 몰입했다.
그 때 윤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뻥튀기’였다. 쌀, 옥수수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튀겨 만든 뻥튀기는 먹는 재미 못지않게 보는 재미, 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전통 과자였다. 윤 회장은 즉시 생산기계 개발을 주문하고 여러 가지 곡물을 튀겨보기 시작했다. 쌀, 팥, 좁쌀 등 여러 가지 곡물을 수없이 튀기며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결국 최적의 원료로 밀쌀을 선택한 윤 회장과 크라운 기술진은 즐겁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졸리(Jolly)와 튀겨질 때 나는 소리 ‘펑’을 절묘하게 합성한 죠리퐁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윤 회장이 이끈 크라운제과는 죠리퐁 못지않게 독특한 판매영업 전략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바로 한국적 유통시스템인 ‘루트 세일’과 신개념 마케팅 전략인 ‘크로스마케팅’이 그 것이다. 루트 세일(Root Sale)은 제조업체의 유통사원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전국의 모든 소매점, 심지어 구멍가게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물건을 공급하는 유통방식이다. 그리고 루트 세일이라는 기법을 처음 국내 제과시장에 도입한 주인공이 윤영달 회장이다. 과거 윤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트 세일이 탄생하게 된 비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어느 날 서울 중구에 있는 방산시장을 방문했었어요. 저희 제품 중 하나인 크라운산도 도매상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그 곳에서 도매상들이 크라운산도를 찾는 소매상들에게 경쟁업체의 제품을 권하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정말 열 받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죠.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방안을 모색하던 중 우연히 길거리에서 코카콜라 빨간색 차량이 콜라를 가득 싣고 이동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알아보니 코카콜라는 도매상 없이 직접 소매점에 물건을 유통한다고 하더군요. 바로 그거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대학교 졸업생 몇 명을 뽑아서 전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가 소매상권이 잘 갖춰진 지역이었으니까요. 그곳에서 일종의 실험을 해봤습니다. 과자 유통에도 루트 세일 방식이 먹힐지에 관한 실험이었죠. 열심히 뛰다 보니 반응이 오더라고요. 전주에서 얻은 노하우를 살려 서울에서도 본격적인 직판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크라운제과의 루트 세일 방식은 그때 처음 시작됐다고 할 수 있어요.”
크라운제과의 유통방식을 눈여겨 본 국내 대다수 제과업체들도 이후 ‘루트 세일’ 방식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루트 세일 방식은 막대한 자본으로 무장한 외국기업의 국내 제과시장 점령 시도를 효과적으로 막는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업계 전문가들은 윤영달 회장의 ‘루트 세일’ 도입이 현재 국내 제과시장에서 외국 기업의 영향력이 낮은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밖에도 윤 회장이 도입한 크로스마케팅(Cross Marketing)은 기존 국내 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던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사실상 크로스마케팅이라는 단어도 윤 회장이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크로스마케팅의 사전적 정의는 ‘경쟁을 하는 동종 업종 기업이나 관련 기업이 협력을 통해 핵심역량을 확보해 상생하는 전략’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예를 들어 국내 인기 아이스크림 제품을 판매하는 A사에 미국계 기업 B가 OEM 생산을 요청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이 아이스크림 제품은 미국에서 B사 브랜드로 판매된다. 반대로 국내 A사는 자사가 생산설비를 갖추지 못해 만들 수 없는 B사 제품을 OEM 생산을 통해 국내로 들여와 A 브랜드로 내수시장에 판매할 수 있다. 마케팅 업계에선 크로스마케팅이 연구, 설비,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사 브랜드 제품 라인업을 확대시킬 수 있어 국내외 시장 경쟁력 강화 및 신시장 개척에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윤영달 회장이 처음 크로스마케팅을 고안해 낸 시기는 지난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였다. 당시 크라운제과는 본사 사옥 및 공장 부지를 매각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신제품 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때 윤 회장이 획기적으로 시도한 것이 크로스마케팅이었다. 그가 타깃으로 삼은 건 해외시장이었다. 외환위기 여파, 경쟁사라는 인식 때문에 국내 시장에선 마땅한 파트너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중국, 일본, 대만을 검토한 끝에 대만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린 윤 회장과 마케팅팀 직원들은 곧바로 대만으로 날아가 이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대만 제과시장 1, 2등을 다투고 있던 ‘이메이’와 ‘콰이콰이’, 글로벌 1위 쌀 과자 생산 업체 ‘왕왕’ 관계자를 만나 크로스마케팅을 제안했다.
그러나 성사될 때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크라운제과의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화의 상태였던 크라운제과의 손을 선뜻 잡는 건 리스크가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윤영달 회장은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3개 기업과의 크로스마케팅 제휴에 성공했다. 현재 크라운제과에서 판매하고 있는 ‘크라운 참쌀 설병 설과’가 그 때 제휴를 맺은 대만 기업 왕왕의 제품이다.
윤 회장이 진두지휘한 크라운제과의 크로스마케팅 전략은 크라운제과가 화의를 조기졸업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추가 투자 없이 제품 포트폴리오를 2배 이상 늘린 덕분에 매출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당초 예정보다 3년 빠른 2003년 말에 화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윤영달 회장의 크로스마케팅은 새로운 개념의 상생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른 산업군으로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백혜진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윤 회장과 크라운제과가 내세운 크로스마케팅 전략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크로스마케팅의 가장 큰 장점은 기업에서 흔히 투자라고 착각하는 과잉지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비에 대한 과잉지출, 불필요한 개발비 지출 등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죠. 국내에 특정 설비가 없다고 굳이 그 설비를 꼭 갖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크로스마케팅은 해외시장 진출 시 위험을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운 시장 확대를 유도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윤영달 회장이 고안한 크로스마케팅 전략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해외시장 진출을 원하는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물론 고려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크로스마케팅이 단순히 제품만을 공유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거죠. 진정한 시장 확대를 위해선 각 시장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홍보마케팅 전략이나 시장 분석 자료 등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 크라운·해태 성장 이끈 장인과 사위의 찰떡궁합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가 한 식구가 된 지 벌써 1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양 사는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성장을 꾀해왔다. 최근에는 사위가 이끄는 해태제과가 무섭게 성장하면서 크라운제과의 동반성장을 이끄는 추세다. 해태제과의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은 7,884억 원으로 전년 대비 약 15% 증가했다. 지난해 523억 원 매출을 기록한 허니버터칩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태제과의 성장은 크라운제과 매출 증대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해태제과는 크라운제과의 자회사이기 때문에, 크라운제과의 연결 재무제표에선 해태제과의 실적이 지분율만큼 합산된다. 크라운제과의 지난해 매출은 1조2,040억 원으로 전년에 비해 11.1% 증가했다. 크라운제과 역시 지난해 출시한 ‘츄러스’가 누적 매출 200억 원을 돌파하며 해태제과 못지않은 신제품 효과를 보고 있다.
하지만 거침없이 달려온 윤영달 회장과 신정훈 대표에게도 여전히 난제는 산적해 있다. 우선 자회사 해태제과에 비해 성장세가 주춤한 모회사 크라운제과에 히트상품 출시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신제품 츄러스를 비롯해 크라운제과의 스테디셀러인 하임, 미니쉘, 마이쭈 등의 연간 매출은 각각 200억~500억 원 수준이다. 연 매출 1,000억 원대를 기록 중인 해태제과의 ‘홈런볼’과 1,000 억 원을 눈앞에 둔 ‘오예스’의 절반 이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해태제과가 별개의 상장사가 되면서 자회사 후광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있다. 흥미로운 점은 크라운제과를 이끄는 수장이 윤 회장의 장남 윤석빈 대표라는 것이다. 신정훈 대표가 허니버터칩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윤 대표가 어떤 전략을 선보일지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고공비행을 이어가고 있는 해태제과에도 불안요소는 존재한다. 상장 이후 불거진 옛 해태제과 주주들과의 잡음이 대표적이다. 옛 해태제과 주주들은 현재의 해태제과 식품이 과거 해태제과의 브랜드와 역사를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는 만큼 자신들도 주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면 현 해태제과 측은 “예전 해태제과와 지금의 해태제과식품은 엄연히 다르다”며 “현재 회사는 USB 컨소시엄이 옛 해태제과의 사업 부문을 양수해 2001년 설립한 신규법인으로, 상표와 브랜드를 인수한 별개 회사”라고 맞서고 있다. 양측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멜라민 파동을 슬기롭게 극복했던 신정훈 대표가 어떤 묘수를 내놓을 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선 사위를 ‘백년지객(百年之客)’이라고 불렀다. 시집간 딸이 편안하기 위해선 사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윤영달 회장과 신정훈 대표는 단순한 백년지객를 넘어 서로를 각별히 신뢰하는 사업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장인과 사위가 함께 일궈가고 있는 크라운·해태제과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두 사람의 행보에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크라운·해태제과의 히트상품들]
크라운·해태제과는 해방 후 반세기 동안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제품을 꾸준히 출시하며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크라운·해태제과가 출시한 주요 제품들을 소개한다.
1945년
연양갱(해태제과)
1956년
크라운산도(크라운제과)
1970년
부라보콘(해태제과) 국내 최초의 아이스크림콘인 부라보콘은 출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생산공장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도매상들과 일반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1972년
죠리퐁(크라운제과)
1974년
에이스(해태제과), 누가바(해태제과)
1975년
사브레(해태제과), 맛동산(해태제과) 맛동산의 누적판매량은 28억 개(2015년 기준)다. 국민 1인당 55봉지씩 먹은 셈이다. 이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1회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
1981년
홈런볼(해태제과)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탄생한 ‘홈런볼’은 연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한 순수 국내 과자 5개 제품 중 하나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기준)
1983년
빅파이(크라운제과)
1984년
오예스(해태제과), 버터링(해태제과)
1986년
참크래커(크라운제과), 쿠크다스(크라운제과) 쿠크다스는 윤영달 회장의 ‘아트경영’ 전략에 따라 기존 과자 표면에 초콜릿으로 S라인을 그려 넣어 톡톡한 매출 상승효과를 누렸다.
1989년
C콘칲(크라운제과), 카라멜콘땅콩(크라운제과), 미니쉘(크라운제과)
1991년
쵸코/화이트하임(크라운제과) ‘초콜릿 제품은 여름에 팔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지난 2010년부터 ‘얼려 먹으면 더 맛있다’는 콘셉트의 이른바 ‘1℃ 마케팅’을 펼쳐왔다. 그 결과 하임은 여름, 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1999년
국희땅콩샌드(크라운제과)
2014년
허니버터칩(해태제과)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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