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은 국내 자산운용업계에서 정통 가치투자의 대명사로 꼽힌다. 이 회사의 최고운용책임자(CIO)를 맡고 있는 이채원 부사장은 국내 가치투자 선구자로 명성이 높다.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은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이했다. 아울러 창립 첫 해 출시한 이른바 ‘10년 투자 펀드’ 1호는 운용기간 만 10년을 채운 지난 4월 기준 150%가 넘는 누적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장기 가치투자의 진면목을 증명한 바 있다. 그 성과의 주역인 이채원 부사장을 만나봤다.
“10년 투자 고객을 찾습니다.”
지난 2006년 4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하 밸류운용)이 ‘한국밸류 10년투자 주식투자신탁 1호’와 ‘한국밸류 10년투자 채권혼합투자신탁 1호’ 펀드를 출시하면서 지면 광고에 내세운 슬로건이다. 이 광고에는 밸류운용의 대표 펀드매니저인 이채원 부사장(당시 전무이자 CIO)이 직접 모델로 등장해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펀드 열풍이 불던 시절이다. 인기 펀드에는 엄청난 돈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부분 투자자들은 ‘단기 고수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 기다림이나 인내심과 같은 덕목을 갖춘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 터에 밸류운용은 ‘10년 투자’를 내건 펀드를 출시한 것이다. 게다가 이 펀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3년간 환매 제한’이라는 조건까지 달았다. 애초부터 장기 투자 의향이 있는 고객만을 모집한 것이다.
사실 10년 투자 펀드의 탄생은 전적으로 이채원 부사장의 신념과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 얼마 전까지 한국투자증권 자산운용본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가치투자 전문 펀드’를 운용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런 뜻을 한국투자증권 경영진이 수용하면서 자산운용본부가 분사(分社)해 밸류운용이라는 자산운용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이채원 부사장의 가치투자 철학은 밸류운용의 투자전략에 고스란히 이식됐다. 그때부터 이 부사장은 밸류운용의 CIO로서 펀드 운용 전반을 챙겨오고 있다.
그의 가치투자에 대한 신념과 뚝심은 국내 자산운용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언론매체들은 그에게 ‘한국의 워런 버핏’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바 있다. 물론 그는 펀드 투자자들에게도 가치투자의 대명사로 각인돼 있다. 밸류운용의 펀드 투자자 중에는 이 부사장의 저서(이채원의 가치투자-가슴 뛰는 기업을 찾아서, 2007년)를 읽고 그의 투자철학에 공감해 투자한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
‘10년 투자 펀드’ 누적 수익률 150% 넘어
이채원 부사장을 믿고 선택한 고객들은 결국 두둑한 보상을 받았다. 이 부사장이 직접 운용하는 10년 투자 펀드 주식형 1호는 운용기간 10년 만에 누적 수익률 156.79%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 대비 115%의 초과 수익률을 달성한 것이다. 이채원 부사장에 따르면 10년 투자 펀드 주식형 1호의 누적 수익률은 국내 전체 펀드 중에서 상위 1%에 포함된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해 펀드가 100개라면 그중에서 1등을 했다는 뜻이다.
이채원 부사장은 말한다. “저는 10년 투자 펀드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고객들의 기다림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것은 10년 투자 펀드 고객 중에서 가입기간이 8년이 넘는 분들이 절반에 달한다는 점입니다. 5년 이상은 70%나 됩니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죠. 누구에게나 맞는 완벽한 펀드는 세상에 없습니다. 고객들의 성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죠. 저희 펀드는 수익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때문에 가급적 저희 투자철학과 ‘궁합’이 잘 맞는 분들을 고객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가치투자는 기업의 내재가치에 비해 주식가격이 낮게 거래되는 종목에 투자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가치와 가격의 괴리를 이익으로 취하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 기업의 주가는 필연적으로 그 기업의 내재가치를 반영하게 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투자 방식이다.
이채원 부사장이 가치투자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은 외환위기 때였다. 그는 당시 동원투자신탁운용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면서 ‘동원꿈드림’ 펀드를 운용했는데, 이 펀드가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아 수익률이 -40%를 기록하게 된다.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나마 코스피 지수가 -57%를 기록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선방한 결과였다. 그는 이 덕분에 회사로부터 적지 않은 보너스도 받았다. 하지만 고객 자산에 큰 손실이 발생한 터라 씁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 무렵 그는 가치투자 이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의 명저 ‘현명한 투자자’를 접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벼락같은 깨우침을 얻었다. 가치투자라는 멋진 신세계에 단숨에 매료된 것이었다. 그 감흥 때문에 한 달간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회사에 가치투자 전문 펀드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1998년 12월 ‘동원밸류 이채원 1호’라는 펀드가 출시된다. 공식적으로 국내 최초 가치투자 전문 펀드였다. 이 펀드는 이듬해 9월 누적 수익률 127%를 올리면서 세간의 화제가 됐다. 당연히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직후부터 수익률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그 해 연말에는 87%까지 뚝 떨어졌다. 사상 유례 없는 닷컴 버블의 영향 때문이었다. 당시 SK텔레콤, KT 등 정보기술(IT) 종목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반면 그가 편입한 가치주들은 시장의 외면으로 주가가 속절없이 떨어졌던 것이다.
갑작스런 수익률 하락으로 그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고객들의 항의 전화도 빗발쳤다. 그는 당시 상황을 “온몸에 병이 나고 난리가 났었다”고 회고했다. 그런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그는 연차와 월차 휴가 등을 모두 긁어 모아 20일이 넘는 긴 휴가를 떠났다. ‘자신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시장이 잘못됐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몇 달 뒤 그는 첫 직장이었던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으로 컴백해 주식운용팀장을 맡게 된다. 회사 고유자산을 운용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이 일을 맡아 2000년 4월부터 2006년 2월까지 6년간 회사에 2,000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안겨줬다. 누적 수익률은 무려 435%로, 코스피 대비 370%가 넘는 초과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다.
국내 가치투자의 대명사로 꼽혀
천당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가면서 이채원 부사장의 가치투자 철학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어찌 보면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은 수익률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졌다. 그는 주식시장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비이성적인 양상을 보일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한다. 특히 시장이 과열되면서 거품이 생길 때가 힘들다. 일부 인기 종목 중심으로 주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가치주에 투자하는 밸류운용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안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를 꺼내 읽는다. 지금까지 수십 번은 족히 읽었다고 한다. 그에게 ‘현명한 투자자’는 곧 바이블이나 다름없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가장 먼저 ‘교과서(이 부사장이 ’현명한 투자자‘를 지칭하는 말)’ 를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죠. ‘현명한 투자자’를 읽고 나면 ‘전투력’이 다시 상승합니다. 가치투자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2011년 초 이른바 ‘차화정(자동차, 화학, 정유주)’ 중심으로 장세가 전개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중소형 가치주들은 투자자들로부터 소외되면서 수익률도 바닥이었죠. 정말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부터 가치주 중심으로 분위기가 바뀌면서 (10년 투자 펀드의) 2011~2013년 3년간 수익률이 50%를 넘는 등 계속 1등을 달렸습니다. 그러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2년간은 성장주 중심의 장세 때문에 수익률이 좀 저조한 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만간 다시 가치주 장세가 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부사장의 투자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벤저민 그레이엄은 두 가지 투자원칙을 강조했다. 첫 번째가 ‘돈을 잃지 말 것’, 두 번째가 ‘첫 번째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즉 절대로 돈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원금을 지키면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철학이다.
이 부사장의 가치투자 역시 ‘잃지 않는 투자’를 기본으로 삼는다. 기업가치의 3대 요소로 안정성, 수익성, 성장성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 부사장이 중시하는 가치는 안정성과 수익성이다. 안정성과 수익성은 기업의 과거와 현재 실적만으로도 충분히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성을 판단하려면 기업의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극히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소위 성장주에 투자한다면 대박을 낼 수도 있겠지만 쪽박을 찰 수 있는 위험도 상존한다. 이 부사장이 성장주를 멀리하고 가치주를 선호하는 이유다.
그는 말한다. “저는 돈을 잃는 게 죽는 것만큼이나 싫습니다. 제 돈이면 모르겠지만 고객이 맡겨주신 소중한 자산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죠. 저희는 투자에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펀더멘털 외적인 이유로 저평가된 주식만 사들입니다. 이를 위해 매 분기별로 저PBR(주가순자산비율) 주식과 저PER(주가수익비율) 주식, 그리고 배당수익이 높은 주식을 각각 상위 100개씩 추려냅니다. 그중에서 새로 등장한 기업은 직접 탐방을 가죠. 저희 펀드매니저들이 기업 탐방을 많이 할 때는 연간 1,600건을 한 적도 있습니다. PBR, PER, 배당수익 등을 따지는 정량(定量)분석은 기업가치 평가에서 70%의 비중을 차지합니다. 나머지 30%는 정성(定性)분석의 영역이죠. 정성분석을 할 때는 해당 기업의 비즈니스모델을 핵심적으로 봅니다. 특히 저는 해당 기업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를 유심히 봅니다. 가령 현재 돈을 많이 벌고 있지만 특정 거래처에 의존도가 높은 기업은 피합니다. 거래처가 거래를 끊으면 순식간에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잃지 않는 투자’가 가치투자의 기본
밸류운용의 펀드들은 ‘금리+알파’를 벤치마크(기준 수익률)로 삼는다. 국내 대다수 펀드가 코스피 지수를 벤치마크로 삼는 것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가령 요즘처럼 금리가 1%대라면 3~4% 정도의 수익률을 목표로 한다.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이 부사장은 “은행 예금은 만족할 수 없고 주식은 위험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10년 이상 길게 보면서 연 3~4% 정도 수익을 원한다면 우리 펀드에 가입하시라고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채원 부사장의 생활 모토는 ‘주중은 주식과 함께, 주말은 가족과 함께’다. 그의 삶은 주식과 가족이 전부인 셈이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펀드매니저를 할 것”이라며 “일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천생 주식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사장은 국내 증시의 향후 장세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채권, 부동산 등 여타 투자 대상보다 주식의 수익률이 높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시중 자금이 증시로 이동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그는 “성장주는 이미 너무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에 향후 3~4년간은 가치주가 시장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치투자의 달인이 내놓은 전망대로 시장이 움직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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