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난 1950년대까지만 해도 변변한 산업시설 하나 없었다. 수출 품목은 농업·광업·수산업 산물이 주를 이뤘다. 1960년대 들어 신발·의류 등 경공업 제품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들 품목은 각각 서로 다른 환율을 적용받는 방식으로 보호됐다. 보호무역을 통해 산업기반이 형성되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수출로 이어지는 데는 어려움이 컸다. 정부는 1965년 복수환율제를 단일변동환율제로 바꾸는 대대적인 환율제도 개혁을 골자로 한 무역자유화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후 국내 기업들은 시장개방으로 내수시장에서도 외국 기업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환율 장벽이 걷히자 수입업자들은 손쉽게 해외기업들의 제품을 국내로 들여왔다. 하지만 국내 산업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 회사들이 외국 업체들과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산업 경쟁력이 생겼고 일자리도 늘어났다. 결국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결정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기록됐다.
1980년대에는 살인적인 물가가 우리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0년대 후반 정부의 중화학 육성정책으로 중복 투자가 늘어난 게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1978년에는 2차 오일 쇼크가 발생했다. 1980년 물가상승률은 무려 30%를 넘어섰다. 경제성장률은 해방 이후 사상 첫 마이너스(-1.7%)를 기록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정부는 수출지원 축소,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긴축 재정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물가는 안정됐고 우리나라는 1986~1988년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이른바 3저 호황을 맞았다. 다시 고성장 가도를 달리게 됐음은 물론이다.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전과 달리 큰 위기 징후가 감지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감지했지만 우리나라만 못했다. 은행의 과도한 외화 채무를 간과한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호황기로 자금 수요가 늘어나자 은행들은 단기 외채를 마구잡이로 끌어왔다. 그 자금을 갖다 쓴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로 보유 외환은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에 처했다.
한국은 뼈를 깎는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대기업과 은행들은 구조조정에 나섰고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국가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자신이 갖고 있던 금을 자발적으로 내놓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모두가 위기극복을 위해 힘을 합친 결과 한국 경제의 체질은 놀라보게 개선됐다”며 “2000년대 탄탄한 성장기반은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마련됐다”고 말했다.
/세종=임지훈기자 jhl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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