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삶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 유엔에서 일하고 싶었다. 해외 유학을 고집했지만 서울 유학도 허락할 수 없다며 만류하던 부모님을 성적표로 설득했다. 17살에 홀로 떠난 미국 유학 생활, 다리를 다쳐도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 없이 버텼지만 덕분에 자립심만큼은 제대로 배웠다. 글로벌 기업에서 익힌 조직 관리 노하우와 빈틈 없는 업무 스타일은 창업의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유엔 대신 먹거리 유통을 선택한 그녀는 한국의 ‘홀푸드(WholeFoods·유기농 식품)’를 꿈꾸며 오늘도 전진 중이다. 요즘 강남 주부 사이에서 입소문 타고 있는 글로벌 그로서리 브랜드 ‘마켓컬리’의 김슬아(34·사진)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자유로웠던 영혼, ‘7막 7장’을 만나며 바뀌다
장녀인 김 대표는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하지만 당신의 딸이 자유분방하게 자라길 원했던 어머니는 공부하라는 말보단, 빨리 잠자리에 들라는 말을 많이 했고, 수학 학원이 아닌 피아노 학원을 보냈다. “어머니가 딸 9명을 둔 집안의 장녀였어요. 그 많은 딸들 중에서도 첫째라는 점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부모님 속 안 썩이고 열심히 공부한 ‘착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가 당신의 자식을 키우실 때는 공부보다는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라고 하시고, 사교육도 일절 시키지 않으셨던 거죠.”
그가 학원을 다닌 기억은 태권도, 피아노, 첼로, 테니스 등 주로 예체능 분야였다. 이렇듯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지만 종종 어머니의 방목형 교육이 야속했다. 친구들처럼 영어 과외도 받고 싶고 수학 학원도 다니고 싶었던 그가 며칠 동안 조른 후에야 어머니는 마지못해 과외 선생님을 알아봤다.
김 대표가 유엔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 것은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7막 7장’(홍정욱 지음)을 읽고 나서다. 하버드대 최우수 졸업자인 지은이의 미국 유학 생활을 접한 많은 청소년들이 글로벌 무대 진출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7막 7장’을 읽고 난 후에는 막연하게 미국에 유학을 가서 유엔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 가서 세계적인 인재들과 겨뤄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거죠. 아버지한테 계속 부탁했지만 어린 여자애가 혼자 유학 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완강히 거절하셨어요. 그래도 몇 년을 끈질기게 조르니까 아버지는 성적으로 증명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김 대표는 공부에만 매진했다. 뭐 하나 꽂히면 다른 데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가 공부에 매달리니 원하는 성적이 나왔다. 중학교 수석 졸업, 민족사관고등학교 문과 수석 입학, 게다가 고등학교 1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 모의고사까지 고득점을 따냈다. 그는 소원하던 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2000년 커네티컷주 하드포드에 자리한 루미스 채피(The Loomis Chaffee School)에 10학년으로 진학했다. 이곳은 미국에선 보딩 스쿨의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대표적인 명문으로 꼽힌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대부분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재벌가 출신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영어를 접해 원어민 수준으로 언어를 구했고, 미국이나 중동 친구들은 전용기가 있을 정도로 부유했지요. ‘울산 촌년’이었던 제 눈에는 너무도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었지요. 고민도 많았고, 수업을 따라가느라 밤잠 줄이며 바둥거렸던 제 인생 최초의 ‘사춘기’였던 셈이지요.”
보호자 없이 생활하다 보니 고생도 적지 않았다. 어느 겨울날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지만,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이 없어 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무지했으니 그냥 버텼고, 고생스러웠지만 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학창 생활을 보냈다.
시대를 바꾸는 여성을 꿈꾸다
국제기구를 꿈꾸었던 그는 정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웰슬리(Wellesley) 칼리지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힐러리 클린턴이 나온 학교로도 유명한 웰슬리는 150년 전통의 명문 여자 사립대학이다.“제 인생을 돌아보면 웰슬리를 간 게 ‘신의 한 수’ 같아요. 울산 촌아가씨한테 ‘애살있다’(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고자 하는 욕심과 애착이 있는 상태)고 하는데, 웰슬리가 저를 어른으로 키웠던거죠. 여대는 현모양처를 키운다고들 생각하지만, 웰슬리는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을 키우거든요. ‘지배당하지 말고 지배해야 한다’는 모토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면서 시대를 바꾸는 여성상을 기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학풍이 제게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어쩌면 웰슬리를 나왔기 때문에 사업가의 길까지 오게 된 것 아닐까요.”
분주한 대학 생활 중에도 그는 다양한 경험을 했다. 특히 친구 두 명과 정보기술(IT) 사업을 했던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 닷컴 붐이 불었던 당시에 그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교양 강의를 듣다가 이커머스 사업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고 합류했던 것. 인도계 미국인과 중국계 미국인 친구 두 명과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을 빌려 사업에 나섰던 그가 맡았던 역할은 개발을 제외한 운영 전반이었다.
“이커머스에서 쓰는 솔루션으로 개인화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었죠. 고객들이 어떤 상품을 보는지 트래킹해서 맞춤 상품을 추천하는 개념이었어요. 친구들은 개발을 하고 저는 나머지 업무를 맡았어요. 솔루션을 개발한 후 6개월 동안은 영업을 뛰었는데 관심을 갖는 고객이 없어 애를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그러다 3학년 때 저한테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인턴 기회가 와서 나왔는데, 2년 정도 지나 실리콘밸리의 IT 업체에 솔루션이 팔렸다고 하더군요. 요즘 말로 하면 성공적인 ‘엑싯(Exit)’이 됐던 거죠. 20대 청년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하는데, 이 친구들은 생활비 걱정은 안 하고 살아도 되겠다며 의료 봉사를 떠나더군요. 그걸 보면서 ‘미국 교육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BCG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과정에선 창업 경험이 큰 자양분이 됐다. 신사업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는 자신이 바둥거리면서 경험했던 일들이 대기업 신사업 프로젝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고 한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 그는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유엔 진출을 꿈꿨던 그가 전혀 다른 업종인 골드만삭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배들한테 물어보니 석·박사 학위가 없으면 유엔에 말단직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BCG에서 사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 재미있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구요. 비즈니스 월드에서도 가장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고, 이왕 할 거면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많이 배우려면 골드만삭스만한 곳은 없죠.(웃음)”
골드만삭스에 들어간 후에는 혹독한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 매주 한번씩 실무 시험을 봤고 성적이 좋지 않으면 상사가 경고를 내렸다. 정치 전공자였던 김 대표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기들보다 몇 배 더 애써야 했다.
“일을 대하는 자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우는 데 있어 골드만삭스나 (두 번째 직장인) 맥킨지만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일을 끝냈다’고 할 때의 그 ‘끝’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끝’과는 기준점이 다른 거죠. 보통은 100 중에서 80 정도만 해도 대략 끝난 것으로 여기지만, 여기는 100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후에 혹여 부족할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해 10 혹은 20만큼 더 해야 끝냈다고 하는 거예요. 똑똑한 애들을 뽑아서 100시간씩 일 시키고, 그들이 남보다 두 배 이상 일하니 성과가 좋은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골드만삭스에서 채권을 담당했던 김 대표는 역설적이게도 글로벌 금융 위기의 덕을 톡톡히 봤다. 하이일드 채권을 주로 담당했던 만큼 수수료가 높았고, 성과급도 매년 큰 폭으로 상승했던 것. 게다가 금융위기로 인해 경쟁 은행들이 시장에서 사라졌던 덕분에 골드만삭스는 더욱 몸집을 불렸다. 골드만삭스 3년차가 됐을 때 김 대표의 연봉은 3억원에 달했고, 업무 능력도 인정 받아 어소시에이트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승진 발표날 김 대표는 사표를 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묘하게도 승진이 공식 발표된 날 사표를 내게 됐어요. 대차대조표를 갖고 돈의 흐름을 읽고, 대출을 해주는 업무 특성상 큰 문제 없이 일할 수 있었지만, 수치만 갖고 일하는 게 답답할 때도 있었지요. 업황 특성상 부침도 있기 마련인데, 이런 부분은 무시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수치로 판단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랄까. 그래서 BCG에서 했던 것처럼 컨설팅 업무를 하고 싶었어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해주고 승진까지 시켜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던 욕구가 컸던 거지요.”
맥킨지로 옮긴 때가 27살, 그는 홍콩에 자리한 아시아오피스에서 일하면서 또 다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더구나 홍콩이라는 지역적 특성 덕분에 미슐랭 스타급 레스토랑을 자주 찾아 다녔고, 다양한 와인을 맛보며 세계 각국의 음식도 접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먹는 것에 집착했던 만큼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는 먹고 싶은 것, 맛있다고 소문난 것을 찾아 다녔어요. 외할머니가 토란을 듬뿍 넣은 육개장을 자주 해주셨는데 지금도 그 음식을 가장 좋아해요. 젓갈 등 발효 음식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에 선천적으로 후각도 발달해서 치즈도 웬만한 것은 다 먹어봤을 정도로 치즈를 좋아해요.”
먹거리를 좋아했던 그녀, 먹거리에서 새 삶을 만나다
맥킨지에서 일했을 때 평생의 반려자인 정승빈 씨를 만났다. 그녀 못지 않은 미식가인 덕에 레스토랑 순례를 하면서 연애를 했을 정도. 결혼 후에는 업무 스트레스와 잦은 야근으로 편두통과 아토피가 심했던 그녀를 위해 해독 주스를 만들어 주었고, 그의 홈메이드 주스가 주변에 입소문이 나면서 주스 배달 아이템으로 창업에 나섰다. 당시 한국으로 들어와 베인앤컴퍼니에 근무하고 있었던 정 씨는 사표를 던지고 남대문 인근에 오피스텔을 얻어 직접 만든 주스를 광화문 일대에 배달했다.
남편의 사업을 지켜보면서 그녀도 창업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템인 ‘먹거리’를 선택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장 큰 난제는 바로 ‘배송’이었다. 하지만 창업가의 길이 그녀의 운명이었는지 파트너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구체화할 수 있었다. 베인앤컴퍼니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의기투합했던 박길남 이사이 함께 하기로 했고, 남편이 주스 배달업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이성일 팀장이 물류를 맡기로 했다. 이 팀장은 10년 전쯤 ‘데일리쿨’이란 물류스타트업을 창업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마켓컬리의 특화 서비스 ‘샛별배송’을 책임지고 있다.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팀과 사람인데, 그때는 마치 누가 사업을 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처럼 필요한 사람이 모이고, 돈을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나타난 거예요. 특히 아이가 없던 터라 시댁에 대한 미안함이 컸는데 남편이 시부모님을 설득하면서 사업에만 전념하라고 지지해준 게 큰 힘이 됐어요.”
‘더파머스’라는 법인명으로 설립한 게 지난해 1월 1일. 온라인 쇼핑몰인 ‘마켓컬리’는 그로부터 5달 후인 5월 21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회사는 친환경 식재료, 해외 식료품, 유명 레스토랑 음식 등 자체적으로 선별한 제품을 판매한다. 차별화 지점은 오후 11시까지만 주문하면 다음날 오전 7시 전에 제품을 내 집 앞에 도착하는 ‘샛별 배송’ 서비스다. 식재료 분실을 막기 위해 ‘샛별 박스’라는 이름으로 가정용 무인 택배함을 활용하고 있다. 현관문이나 벽면에 간편하게 부착해 사용할 수 있다. 제공받은 샛별 박스를 원하는 곳이 붙여두면 배송팀에서 주문 상품을 박스 안에 넣어둔다. 고객이 직접 비밀번호를 설정해 분실 우려 없이 신선한 제품을 받아볼 수도 있다. 택배 기사와 직접 접촉이 필요 없어 주부 외에 혼자 사는 가구 등에서도 호응도가 높다.
김 대표는 첫 제품으로 상추 등 엽채류를 선택했다. 하루만 지나도 시들해지고 배송 자체가 까다로운 제품이라는 부담은 있지만, 오히려 마켓컬리만의 경쟁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상품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희 서비스는 당일 딴 상추를 이튿날 아침 7시에 받을 수 있어요. 농부가 자신의 밥상에 상추를 올려 아침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단 시간에 ‘밭에서 밥상으로의 이동’이 이뤄지는 셈이지요. 마켓컬리의 심볼 컬러인 ‘보라색’도 어떤 식자재와도 어울릴 수 있으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고려해 선택했습니다.”
서비스 오픈 직후 첫 달은 매출이 20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엽채류 등 16개 품목만 갖춰진 상태였기 때문. 김 대표는 사이트 오픈 전부터 공을 들인 ‘본앤브레드(Born & Bred)’의 한우가 6월말 론칭하면서 본격적인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마장동에서 40여년간 한우유통업을 했던 부친을 이어 받아 한우를 상품화한 유학파 정상원 대표가 숙성육으로 연 매출 100억원을 올리는 곳이다. “세 번 정도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했지요.(웃음) 정성을 다해 저희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니 그런 노력에 감동한 정 대표가 결국 저희한테 제품을 공급하기로 결정하신 거죠.”
커피리브레·오월의종 등 핫한 브랜드가 하나 둘씩 론칭하면서 마켓컬리는 입소문이 났고, 언제부터인가는 ‘강남 엄마들의 필수앱’이라는 별칭이 따라 다닐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맞벌이 부부나 전문직 여성 고객들의 요청이 쇄도하는 반찬 코너도 조만간 선보인다. 대부분의 반찬 업체가 제조업 설비나 자격증이 없어 위생 신뢰성이 떨어지는 만큼 적당한 제조 업체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다가 김 대표의 눈에 한 곳이 들어왔다. 한살림 등 유기농 식자재 업체에 납품하던 반찬 공장으로, 무항생제 콩으로 직접 만든 간장을 재료로 쓸 정도로 까다로운 재료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요리연구가 우정욱 셰프가 자신의 요리 비법과 손맛을 고스란히 담을 다양한 스페셜 메뉴도 준비 중이다.
김 대표의 가장 큰 지향점은 공급업체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사업 구상을 하면서 한국의 식자재 유통 시장을 살펴봤던 김 대표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대기업 계열 유통업체들이 엄청난 판매수수료를 챙기지만 정작 생산 농가는 충분한 가격을 보장받지 못할 뿐더러 재고 부담까지 떠안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100% 직매입을 선택했다. 생산자한테 선주문을 통해 생산량을 확정해주고, 재고 부담은 마켓컬리가 전적으로 부담한 것이다.
“모든 위험은 우리가 떠안을 테니 생산자 분들께는 제품 생산만 집중하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렇게 해서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친환경·유기농 농산물을 드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에, 내 아이의 몸에 좋은 것을 찾기 마련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먹거리니까요. 기존 판매처인 백화점 등 유통 대기업과 경쟁하려면 비주얼로 승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실에 마련된 전용 스튜디오에서 푸드 스타일리스트와 전문 사진작가가 먹음직스럽게 사진을 찍어요. 특히 정확한 소비 예측과 재고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데이터애널리스틱팀이 빅데이터 분석을 합니다. 마켓컬리 경쟁력의 한 축은 유통이, 또 한 축은 정보기술(IT)이, 나머지 한 축은 물류가 담당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켓컬리를 통해 ‘보랏빛’ 꿈을 펼치다
마켓컬리의 10월말 현재 매출은 20억원을 웃돈다. 출시 17개월 만에 100배나 성장한 것이다. 품목도 현재 1,500여개, 연말까지 2,000여개로 늘리면 올해 총 매출은 2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내년 목표는 3배 성장이다. 그래서 김 대표는 미국의 대표적인 유기농 마켓체인 홀푸드(WholeFoods)의 비즈니스 모델을 지향한다. 1980년 설립된 홀푸드는 인공 보존제나 인공 색소 등 유해 첨가물을 넣지 않은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는 미국의 슈퍼마켓 체인이다.
“유기농이나 무농약 개념이 없었던 36년 전 텍사스에서 시작한 홀푸드는 농가와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으로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어요. 미국의 에코 시스템이 홀푸드의 성장과 궤적을 같이 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20년 넘는 세월이 지나 먹거리의 에코 시스템이 정착됐지만 소비자 피드백이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우리나라에서는 5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한국의 홀푸드’로 우뚝 서기 위한 마켓컬리의 구체적인 액션 플랜은 무엇일까. 그는 ▲소비자에게 좋은 음식 ▲소비자의 가치 있는 삶 ▲고객 경험에서의 최고점 제공 ▲생산자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안정적인 유통 시스템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현재 식자재 중심의 먹거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샴푸나 비누, 로션, 수건, 침구 등 리빙 영역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소비자들이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 싶을 때 마켓컬리를 찾게 하고 싶어요. ‘마켓컬리’라는 이름만으로도 믿고 선택하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한 유통’을 정착시켜서 소비자에게 이로는 것은 물론 생산자 분들도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34살이란 나이에 3번의 이직을 거쳐 창업을 이뤄낸 그에게 후배 여성 기업인 혹은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제 또래인 30대 중반 여성은 선배 세대인 40대 여성보다 자아 실현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 같아요. 육아나 자녀 교육을 중시한 선배 세대는 직업이 자아 실현의 핵심 수단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란 특성이 강했다면, 저희 세대는 ‘어떻게’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나를 실현할 것인가, 나의 흥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방점을 찍은 거죠. ‘어떻게’를 고민하다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면, 우선은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인생의 파트너든, 사업적 파트너든 제 역량의 절반 이상은 파트너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거든요. 여성들이 남성보다는 자기 주장을 덜 펼치는 경향이 있는데, 치열한 토론의 과정을 거쳐야 정답에 가까운 솔루션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요구하고, 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해서는 끈질지게 설득해 관철시켜야 합니다. 또 하나는 창업을 실행하기 전에 충분한 직장 생활을 경험하십시오. 저는 제 직장 생활이 창업을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생각해요. 창업에 필요한 조직적 스킬은 물론 적당한 인맥도 직장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니까요.”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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