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꿈은 없었다. 가족의 조언으로 대학 전공을 택했고, 공무원이 최고라는 부친의 권유에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넘치는 ‘끼’는 억누를 수 없었다. 부모님 몰래 동대문에서 옷을 떼다 팔던 말괄량이는 런던으로 건너가 패션 비즈니스를 접하더니 한국에 돌아와선 역직구 쇼핑몰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내로라 하는 셀럽(celebrity의 줄임말·유명인)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미국 패션 매거진 ‘나일론(NYLON)’과 패션정보 사이트 ‘후왓웨어(WhoWhatWear)’ 등에서 “미래에 자라(ZARA), 포에버21, H&M과 경쟁할 브랜드”라고 소개될 만큼 글로벌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로서 높은 잠재력을 평가 받고 있다.
제이미 정(jamie chung), 켄달 제너(Kendall Jenner), 올리비아 팔레르모(Olivia Palermo), 니콜 리치(nicole richie) 등 해외 셀럽들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착장샷을 올려 화제를 모은 역직구 쇼핑몰 ‘스토레츠(storets)’를 이끌고 있는 김보용(37·사진) 재이 대표의 이야기다. 김 대표는 아시아에서 탄생한, 아시아 최초의 패션 쇼핑몰로 도약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있다.
평범한 여대생, 옥션 파워셀러로 ‘끼’를 발휘하다
검사로 일했던 아버지를 따라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어릴 적부터 이사가 잦았던 만큼 정들었던 친구와 헤어졌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고 한다. 맏이인 오빠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아버지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서울 잠실에 정착했고, 그때부터 김 대표 역시 ‘안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어머니 말씀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타일러도 꿈쩍도 하지 않는 ‘쇠고집’으로 유명했다. 유치원 다닐 때는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옷은 입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우다 어머니한테 종종 혼이 나기도 했다.
“과목마다 호불호가 분명했어요. 국어나 외국어는 꽤 좋아했는데 수학은 정말 싫어했구요, 외우는 것도 질색해서 암기 과목 성적도 좋진 않았어요. 게다가 미술을 제외하곤 음악이나 체육은 영 젬병이라 학창 시절 저는 그냥 평범한 여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은 없었지만 고3이 되면서 대학에는 반드시 진학해야겠다고 결심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전력투구한 결과 ‘운(?) 좋게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정외과를 선택한 건 오빠의 조언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정경학부에 가면 행정이나 경제를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데다 사회적 이슈에도 관심이 많으니 재미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던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캠퍼스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명확한 목표 없이 진학한 탓에 그의 대학 생활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안정적인 직업으로는 공무원이 최고라는 부친의 조언에 서울대 법대 진학을 목표로 반수 생활을 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져 다시 신촌으로 돌아왔다.
“다시 캠퍼스로 돌아와 수업도 듣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지만 과연 내가 하고 싶은 게 뭔가에 대한 정답은 얻지 못했어요. 마음을 잡지 못하니 학점은 자연히 나쁠 수 밖에 없었고, 졸업할 때가 되어 친구들은 하나 둘씩 직장을 찾아 나서는데 저는 사회로 나가는 게 두려워서 졸업을 한 해, 두 해 미뤘지요. 학점이 좋지 않으니 고시를 보는 게 어떠냐는 아버지의 조언에 사법고시를 몇 년 준비했다가 그것도 그냥 접었지요.”
하지만 그녀의 대학 생활이 ‘무위’로 끝난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아 남다른 스타일링을 뽐내던 그녀는 동대문에서 옷을 구입해 입고 나가면 친구들이 어디서 샀냐고 물어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옥션에 여성 의류 제품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도 유치원에서 다른 친구들이 원복을 입고 있는데 혼자 공주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적지 않더라구요. 어머니가 벨벳 재질의 옷을 입히면 나이 들어 보여서 싫다고 떼를 쓰고, 결국 제가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야 학교에 다녔던 기억도 나구요. 내가 ‘패션’이란 것에 관심이 많고, 또 무척 좋아하는구나 생각을 했던 거죠.”
제일평화시장 등 동대문에서 여성 의류를 떼어다 옥션에 ‘밀크티’란 닉네임으로 팔던 그녀는 2004년 파워셀러로 등극할 정도로 남다른 눈썰미를 자랑했다. 노점상 양말부터 실크 스카프, 찢어진 청바지나 스웨터 등 그녀의 까다로운 안목을 통과한 제품은 연일 대박을 터뜨렸고, 수입도 적지 않아 대학 등록금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여느 대학생보다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영국으로 유학 떠나 패션 비즈니스를 배우다
하지만 내로라 하는 명문대를 다니는 딸내미가 옷이나 팔고 있는 게 영 못마땅했던 아버지와는 자주 다퉜다. “주문이 밀려들 때는 고객들에게 보낼 택배상자들이 제 방이 가득 쌓여 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시며 그 상자들을 집 밖으로 내다 버리셨어요. 그때 아버지에게 대들었죠.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반대하냐고 따졌고 아버지는 취직을 하든, 시집을 가든, 아니면 유학을 가든 결정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곧장 유학을 가겠다고 답했죠.”
98학번인 그가 졸업장을 받아든 것은 꼭 7년 만인 2005년 2월, 영락없이 늦깎이 졸업이다. 하지만 영국 런던칼리지오브패션에 입학허가증을 받아 놓은 터라 마음은 여유로웠다. 옥션에서 파워셀러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패션 유통의 전반을 알기 위해선 패션 매니지먼트를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한가하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이도 적지 않고, 대학 전공을 살릴 수도 없는 만큼 런던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다부지게 결심했다. 운 좋게도 런던칼리지오브패션이 영국 패션계에선 꽤 알아주는 학교다 보니 인턴 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2년간 옥션 파워셀러에 올랐던 경험은 그녀를 인턴으로 채용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매력 요인이었다.
그를 선택한 곳은 영국의 명품 백화점인 하비스니콜 본사 바이어팀으로, 이곳에서 그는 7개월간 인턴 생활을 했다. 점포에서 판매하는 일을 하는 아시아인은 많았지만, 본사에서 직접 바이어로 일한 아시아 출신은 그녀가 유일했다고 한다. 그가 평상시 입고 다니는 ‘동대문표’ 옷들도 종종 히트를 쳤다. ‘끌로에’나 ‘마르니’ 등 명품 브랜드를 판매하는 바이어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상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가 동대문에서 샀다는 말을 듣고 놀라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메이드 인 코리아’ 동대문 상품이 브랜드 인지도에서는 밀리지만 디자인이나 제품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영국에서 직업을 구할 작정이었던 그녀는 돌연 귀국을 결심하게 됐다.
“인턴으로 일하면서 학점으로 인정되는 프로그램을 알아봤는데, 지도 교수가 ‘너 같은 아시아인이 좋은 인턴 자리를 차지하면 정작 영국 아이들은 (좋은 자리를 얻을) 기회를 잃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너무 분해서 학장한테 이메일을 보냈는데 학장조차 아무런 답신을 하지 않더군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과연 이런 사람들 속에서 일한 만큼 제대로 대우를 받을지 확신이 안 서더군요. 더구나 이런 곳에서 커리어를 쌓느니 한국에 돌아가 다른 걸 해도 낫지 않겠냐는 반발심도 생겼구요.”
의류업체 현장 경험이 창업의 자양분 되다
깊은 상실감과 회의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2007년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영국에서 패션 매니지먼트 공부까지 했던 터라 귀국 후 일자리는 어렵지 않게 들어와 의류벤더업체 세신어패럴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의류 유통의 기초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제조 라인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처음엔 영업부에서 바이어와 ‘딜(deal) 코디네이터’ 업무를 맡다가 의류 별로 컬러를 선정해주는 컬러리스트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에는 의류 샘플링을 만드는 샘플러(Sampler) 업무도 맡았다. 하지만 업무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작업체의 특성상 바이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창의성의 한계였다. 컬러리스트나 샘플러 업무 역시 그것만 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신에서 의류 제작 과정 전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것을 그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다.
“패션은 제조부터 유통 단계 전반을 장악하는 게 매우 중요한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의류 제조 과정을 접할 수 있었던 게 매우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제가 흥미를 느끼지 못해 여러 부서를 전전했던 것도 지금 와서 보면 의류 제조 파트의 다양한 업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니까요. 회사 규모가 크니까 각 개인의 의견 개진이 잘 되지 않는 게 안타까웠지만, 반대로 제가 회사를 꾸리면서는 제가 조직원으로 아쉬웠던 점을 기억하고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하니 그것도 그 곳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죠.”(웃음)
세신에서 얻은 것은 또 하나 있다. 바로 3살 연상인 임대현 씨와 만나 사랑을 키워 백년가약을 맺은 것. 임 씨는 현재 재이의 성장 과정에도 함께 하고 있다. 한편 세신을 나와 명품 수입 부띠크 회사로 옮겼던 그는 다양한 해외 컬렉션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글로벌 SPA(제조·유통일괄) 브랜드인 자라나 H&M이 국내에 공식 유통되기 전이라 해외에서 구매해 국내에 파는 업종이 붐을 일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자신의 눈으로는 ‘동대문 표’ 옷보다 나을 것이 없는 의류 브랜드에 열광하는 한국 소비자들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동대문시장에서 만든 옷이 디자인도 멋스럽고 가격도 합리적인데, 소비자들이 그걸 모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해외 SPA 브랜드가 인기를 얻을수록 역으로 우리 옷을 해외에 내다 팔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던 거죠. ‘우리 옷이 어디가 어때서?’라는 묘한 도전 의식도 생기구요.”
카드빚 500만원으로 창업에 뛰어들다
한번 꽂히면 거칠 것 없이 달려드는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에 나섰다. 모아둔 돈이 없어 카드빚으로 자본금 500만원을 마련한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스토레츠’ 사이트 오픈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가 2011년.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옥션에서 파워셀러로 활동했을 때와는 사업 환경이 확연히 달라진 것. 옥션이라는 거대 장터에서 장사를 하다가 이름도 낯선 브랜드로 사업을 하니 알아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사람도 없는 사막 같은 허허벌판에서 가게 하나 차려놓고 기다리는 격이었죠. 무척 막막했지만,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브랜드 ‘스토레츠(storets)’는 전문가가 엄선해 큐레이팅한 느낌을 주기 위해 고심한 이름이라고 한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제품이 모아진 나만의 가게(store), 개개인의 스토리(story)가 담긴 브랜드, ‘st’로 시작해 ‘ts’로 끝나는 작법을 통해 짧고 강하게 사람들의 혀에 감기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 브랜드에 정형화된 이미지나 의미를 의도적으로 없앤 것도 주력 고객층인 20대에서 30대 초중반 여성이 트렌디한 것을 추구하지만 남들과 똑같이 규정되는 것을 싫어하고 뭔가에 얽매이기보다는 다양하게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스토레츠의 1호 고객은 필리핀 분이었어요. 창업 3개월 만에 6만원짜리 하이힐을 판 셈인데, 너무 좋아서 동대문표 선물도 같이 동봉해 드렸지요. 저희 제품을 사는 분들은 한국 제품이란 사실을 알고 사는 건 아니에요. 나중에 물건을 받아 보고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것을 알고는 한국에서 이렇게 멋진 제품을 만드냐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한류에 편승해서 한국 옷이니까 사 입으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좋아할 만한 옷이 있어. 이거 한 번 볼래? 어때? 한국 옷이라고 하니까 놀랍지?’라고 접근하고 싶은 거죠. 저희 타깃 고객은 자라나 H&M보다는 좋은 퀄러티를 원하고, 명품을 갖고는 있지만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싶어하는 분들입니다. 좋은 소재로 만든,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고객은 전세계 어디에나 공통적으로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 브랜드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객에게 외면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이 우리나라 고객들로, 해외 셀럽들이 입는 것을 보고 쇼핑몰에 들어와 주문했다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반품이나 결제 취소 요청을 하는 것이다. 해외 시장에선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는 데 반해 한국 브랜드라는 이유로 우리나라 고객들에게 외면 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김 대표는 각오를 다진다.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입을 수 있게 만들겠다는 다부진 결심이다.
해외 셀럽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우뚝 서다
현재 스토레츠의 고객은 미국 40%, 중동 15%, 유럽 20%, 아시아 10%로 분포돼 있다. 사업 초창기에는 중국 매출이 40%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스템 오류로 사이트가 다운돼 중국 매출이 반 이상 줄었고 아직까지도 정상 회복이 안 된 상태다. 하지만 김 대표는 조바심을 내기 보다는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길은 열린다는 믿음을 갖고 계속 중국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고객 주문이 급속하게 생산 시스템은 3각 체제를 택하고 있다. 본사에서 디자인 기획이 끝나면 동대문 시장에서 주문 생산을 하거나 자체 공장에서 생산한다. 또 국내 공장에서 100% 소화하기 어려운 대량 주문은 중국에서 소화해 리스크를 줄이고 있다.스토레츠는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가장 핫한 SNS 채널인 인스타그램을 적극 활용하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해 공식 계정을 오픈했지만 팔로워 숫자만 18만명에 육박하고, 이들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더구나 톱모델 켄달 제너(Kendall Jenner), 패셔니스타 올리비아 팔레르모(Olivia Palermo), 할리우드 스타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 등 유명 셀럽들이 스토레츠 의상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포착되거나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더욱 탄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설립 이후 지난해 말까지 누적 매출이 35억원 수준이었던 이 회사는 올해 총 매출이 이를 넘어설 전망이다. 주요 라인이 날개 돋힌 듯 팔리면서 분기별로 50%씩 성장하고 있는 덕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진 않는다. 아시아에서 태어난, 아시아의 ‘넘버 원’ 패션그룹이 되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스토레츠’라는 브랜드가 재이의 중심에 있지만, 현재 연령별·취향별·지역별 타깃을 테스트하고 있는 만큼 시장의 니즈에 맞춰 다양한 브랜드를 키울 생각이다.
특히 ‘재이’이라는 법인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있다.
“5살짜리 딸아이의 이름이에요. 아이 이름을 걸면서까지 사업을 시작했으면, 내 아이가 자랑스러워할 정도의 회사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들은 혹시 딸한테 물려주려고 하나 그런 생각도 하시는데, 그건 전혀 아니구요.(웃음) 내 아이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정직하고 바르게 정성을 다해 키워가겠다는 모성이 반영됐다고나 할까요. 물론 회사 규모가 커가면 다른 경영진도 들어오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우리 ‘재이’가 건강하고 행복하며 멋진 회사로 성장하는 거죠.”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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