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의 ‘금’ 자를 꺼내지 않아도 척하면 척입니다.”
지난 2014년 9월 호주 케언스.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현지를 방문한 최경환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한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독립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시장은 ‘실세 부총리’의 발언에 베팅했다. 실제 한은은 다음달인 10월 기준금리를 내린다.
최 전 부총리는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재정을 풀고 금리는 내렸다. 반대를 무릅쓰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풀어 부동산 경기를 띄웠다. 하지만 ‘불도저 리더십’의 결말은 초라했다. 불과 2년 만에 ‘초이노믹스’는 박근혜 정부의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낙인찍혔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가계부채만 늘렸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대한민국이 한국전쟁 이후 불과 40여년 만에 산업화를 일궈낸 배경에는 정부 주도의 일사불란한 경제개발이 있었다. 1964년 12월 독일의 아우토반을 목격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지시한 지 불과 4년 만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고 “만약 비밀이 새면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 장관의 목을 치겠다”고 김영삼 대통령이 으름장을 놓은 뒤 하룻밤 사이에 금융실명제가 실시됐다. 이른바 ‘불도저 리더십’으로 이뤄낸 성과다.
하지만 한국형 ‘하면 된다’ 리더십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해방 이후 정치·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성숙하면서 과거의 리더십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을 돌리는 데 더 이상 맞지 않는 열쇠가 됐다.
현시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짓는다고 가정할 경우 어느 지역을 경유지로 정할지 결정하는 문제에서부터 환경훼손까지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해 첫 삽도 떠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해관계의 충돌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종교 및 세대 간 갈등까지 광범위해 과거의 밀어붙이기식 리더십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얽히고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냈던 알렉산더 대왕은 사실상 출현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데 여전히 많은 리더들이 ‘영웅적 리더십’의 틀에 갇혀 있어 성숙한 사회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시민들 역시 백마 탄 리더가 등장해 모든 어려움을 해소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사회갈등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고도화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갈등지수는 0.66(2013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0.51보다 0.15포인트 높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선정 문제와 영남권 신공항 건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박용정 현대연 연구원은 “한국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약 30억달러(약 3조6,000억원)를 사회적 비용으로 낭비하고 있다”며 “사회갈등지수를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내릴 경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약 0.2% 포인트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더는 구성원들이 공감하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리더로 꼽히는 로버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2년 한 대학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달에 가기로 선택했다. 이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일 도전이고 뒤로 미루기 싫은 도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1960년대가 가기 전에 달에 가겠다”고 선언해 달 탐사 반대 여론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구소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은석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리더십은 불확실성과 리스크로 가득 찬 미래를 창조하는 비전을 추구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리더는 진실성(integrity)을 갖고 조직원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일범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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