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으로 2차 오일쇼크가 닥쳤다. 경제 재건을 위한 산업화에 본격 시동을 건 당시로서는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이때 강경식 경제기획원 차관보가 전면에 나섰다.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는 통치자에게조차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1979년 4월 ‘4·17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발표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정부 통제 경제정책을 ‘시장자유화’라는 큰 틀로 재편한 정책이다. 당장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도 심했다. 하지만 지금 4·17시책은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파급력이 큰 정책으로 꼽힌다. 강경식 전 차관보를 상관으로 모셨던 맹정주 전 강남구청장은 “강 전 차관보는 일단 어떤 경제정책을 마련하면 위로는 대통령이 고집해도 설득해 신임을 얻어내고 아래로는 실무 공무원들을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의 오일쇼크는 왜 관료들이 중심을 잡고 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오일쇼크뿐만이 아니다. 1945년 광복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숱한 위기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의 오일쇼크, 1980년대의 민주화 바람, 1990년대의 외환위기(IMF), 2000년대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가장 큰 고비로 꼽힌다. 그때마다 위기의 최전선에는 공무원들이 있었다.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국익만을 바라보면서 소신껏 일처리를 해온 게 관료들이었다.
두 번째 큰 위기였던 1980년에는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함께 찾아왔다. 또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극에 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오일쇼크 후유증과 세계 경기 불황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물가는 급등했고 저축률은 떨어졌다. 내수시장도 얼어붙었고 기업 경쟁력도 바닥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주의자 김재익 경제기획원 국장을 경제수석으로 발탁했다. 당시 김 수석은 전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 속에 경제정책을 펼쳤다. 김 전 수석은 “기득권층이 어떤 저항을 하더라도 제 말을 믿고 정책을 끌고 가 달라”고 했을 정도다. 이후 1987년 6월항쟁과 개헌 물결 속에서도 뒤에서 묵묵히 나라 경제를 떠받친 것은 관료들이었다.
1997년 후반 외환위기는 대한민국 경제뿐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기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국가 부도 사태로 대다수 국민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 정권은 최우선 목표가 경제 극복, 그래서 선택한 것이 ‘소신의 리더십’이다. 고인이 된 당시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이 외환위기 해결사로 나섰다. 논란이 많았던 재계서열 2위인 대우그룹의 해체를 첫 카드로 뽑았다. 정치권과 재계가 심하게 반대했고 국민들의 우려도 높았다. 하지만 강 전 장관은 온갖 반대를 극복하고 4년 만에 IMF 조기 졸업을 선언했다. IMF는 한국을 가장 훌륭한 졸업생이라고 평가한다. 강봉균 경제수석 시절 같이 일했던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강 전 수석께서는 대통령을 직접 설득하고 외부의 정치적 압력을 차단하며 소신껏 일을 추진하신 분”이라고 기억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한국 경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이 때문에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 시장을 하루속히 안정시킨 관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를 위해 거론되는 모델이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다. 이 전 부총리는 2004년 3월 12일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부터 가계·기업·정부 등 경제 주체들과 직접 소통했다. 당일 오전11시55분 국회의 탄핵안 가결 직후 이 전 부총리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3시간 뒤인 오후2시30분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이 전 부총리는 “경제 문제만큼은 내가 책임지겠다. 경제주체들은 믿고 따라 달라”며 시장부터 안심시켰다.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위기 때마다 대한민국호를 지켜온 것은 관료들”이라며 “국민과 사회가 관료들이 중심을 잡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이현호·이태규 기자 h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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