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간) 개막한 ‘제88회 제네바 국제모터쇼’에 출품된 콘셉트카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차량이 있었다. 오디오 전장 전문기업인 하만 부스에 전시된 자율주행 콘셉트카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는 우선 외장 디자인부터 독특하다. 차체의 80%가량이 유리로 구성돼 차 안이 훤히 보인다. 실내는 더 특이하다. 자율주행차인 만큼 스티어링휠과 콕핏(운전석)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로로 1m가 넘는 디스플레이로 구성된 대시보드가 기존 차량과 확연히 다르다. 디스플레이 화면에는 탑승자의 스케줄과 통화내역 등이 떴다. 뒷좌석에는 작은 테이블이 설치돼 음료를 마시면서 업무를 볼 수 있다. 오아시스는 증강현실(AR) 컨시어지 솔루션을 탑재해 가상 비서의 도움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각종 회의를 할 수 있다. 아직 콘셉트카 수준이지만 내비게이션과 커넥티비티 등 분야에서 5,600개가 넘는 특허를 보유한 하만이 미래 스마트카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할 것임을 기대하게 했다.
인공지능(AI)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관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글로벌 업체 간 인수합병(M&A)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구글·애플·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MS)·인텔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뿐 아니라 포드 같은 자동차 업체도 AI 기업을 앞다퉈 사들이고 있다.
15일 KOTRA에 따르면 지난해에만도 미국에서 40건의 AI 관련 스타트업에 대한 M&A가 이뤄졌다. 글로벌 IT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면서도 스타트업을 M&A하는 방식으로 개발과 상용화 기간을 단축하는 전략을 쓴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를 인수한 구글이 대표적이다. 구글은 현재까지 11개의 인공지능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애플도 호주와 인도의 머신러닝 업체 투리와 터플점프를 사들였다.
앞서 너바나 시스템을 인수해 딥러닝 처리 속도를 높이는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관련 기술을 확보한 인텔은 최근 자율주행차 핵심기술을 보유한 모빌아이를 153억달러(약 17조5,700억원)에 사들여 반도체는 물론 자동차 업계까지 긴장시켰다. 모빌아이는 자율주행차의 눈에 해당하는 핵심부품을 만든다. 모빌아이 인수로 머신러닝에 기반을 둔 자율주행 알고리즘과 디지털매핑 기술, 센서 기술 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인텔은 반도체 공급을 넘어 데이터를 수집하는 클라우드와 운전을 결정하는 인공지능(인텔고) 등을 묶어 자동차 업체에 자율주행차 운영체제(OS)를 제공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미래 성장 확보를 위한 M&A에 소극적이라는 평가였지만 삼성이 지난해 9조원을 들여 하만을 인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하만 인수는 삼성전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M&A다. 하만의 전장 기술과 삼성전자의 반도체·디스플레이·모바일기기를 결합해 자율주행·커넥티드카 등 스마트카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이다.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 삼성의 하만 인수 외에 국내 기업이 AI 분야에서 대규모 M&A를 단행한 사례는 많지 않다. 현대자동차·LG전자·SK텔레콤·KT·네이버 등 AI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국내 기업들은 M&A보다 자체 기술 개발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이는 국내에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수조원의 투자가 요구되는 해외 기업 M&A에 따르는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AI 분야에서 ‘빠른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벤처생태계를 활성화하는 한편 글로벌 M&A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인지과학산업협회장인 장병탁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는 대기업들은 뚜렷한 기술을 확보한 업체가 적다고 푸념하는 반면 스타트업들에는 대기업들이 기술만 빼가려 한다는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면서 “대기업들이 국내 스타트업을 지원·육성해서 연구개발(R&D) 성과를 공유하는 한편 기술력을 가진 해외 업체도 적극적으로 인수해 ‘퍼스트무버’ 전략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성행경기자 sain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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