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본래 이름보다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맑은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기 위해 주조 과정에 어린 아이를 넣었다는 설화와 함께 종이 울릴 때마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듯한 ‘에밀레’ 소리를 낸다 하여 붙은 별명이다. 이처럼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신라의 인신공양의 흔적이 유물로 처음 확인됐다. 신라의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사적 제16호)에서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월성에서 지난해 3월 이후 진행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약 1,500년 전인 5세기 전후 축조된 서쪽 성벽의 기초 층에서 제물삼아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를 발견해 16일 공개했다. 무덤이나 거주지가 아닌 성벽 유적에서 인골이 출토되기는 처음이다. 이것은 건물을 짓거나 제방을 쌓을 때 주춧돌 아래에 사람을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고 오래 안전하게 유지된다는 ‘인주(人柱) 설화’를 입증하는 첫 사례다.
‘인주설화’는 중국 상나라(기원전 1,600~기원전 1,000년경) 때 성벽 축조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썼다고 전한다. ‘고려사’ 중 충혜왕 4년 (1343년)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는 식으로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왔으나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최초다. 삼국시대 국가들 중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유독 신라에서만 이처럼 사람을 제물로 삼았다는 설화가 전한다. 발굴된 인골은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이나 인구 구조, 건강상태와 유전적 특성을 밝혀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경주 월성의 북쪽 해자에서는 머리에 터번을 두른 것이 마치 페르시아풍으로 보이는 독특한 토우(土偶·흙으로 빚은 사람 모양 인형)가 여럿 출토됐다. 눈이 깊은 이국적 인상의 이 토우는 머리에 두른 터번이 오른쪽 팔뚝까지 흘러내렸으며, 잘록한 허리를 드러내고 있다. 팔 부분 소매가 좁은 페르시아풍 셔츠 등으로 미루어 당나라 시대에 호복(胡服)이라고 불리던 소그드인의 복식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연구관은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에 살던 이란계 주민을 말한다”면서 “6세기 토우로 추정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출토된 소그드인 추정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유물은 당시 신라의 활발한 해외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월성 해자에서는 7점의 목간이 새롭게 발굴됐다. 목간은 종이가 상용되기 전 기록을 위해 사용된 유물이다. 그중 한 목간에서는 ‘병오년(丙午年)’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는데, 작성 시점은 법흥왕 13년(526) 혹은 진평왕 8년(586)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목간에서는 경주 이외 주민에게 주어진 관직인 ‘일벌(一伐)’과 ‘간지(干支)’, 노동을 뜻하는 ‘공(功)’ 자가 함께 기록된 것이 확인됐다. 박 연구관은 “당시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됐고, 이들을 지역 유력자가 감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다량의 유물을 쏟아낸 월성과 해자는 1,500년 전의 타임캡슐을 방불케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월성은 신라 5대 파사왕 22년(101) 축성을 시작해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궁성으로 쓰였다. 특히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성돼 5세기부터 500년가량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주 월성 발굴조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인 신라왕경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14년 12월 개토제를 시작해 2015년 3월 본격적인 발굴에 돌입했다. 그러나 2025년을 목표로 세운 이전 정부의 무리한 복원 계획은 문화재계 안팎의 질타를 맞았다. 9,000억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는 신라왕경복원사업 때문에 자칫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이 해제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전임 대통령의 역점 사업에 정치적 재검토와는 별개로 학술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월성 발굴조사를 무기한 진행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경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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