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올 하반기부터 공공부문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고 민간에도 권고 의사를 밝힌 가운데 이미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고 있거나 경험이 있는 기업들 사이에서 다소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이 모든 취업 준비생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이력서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끼와 재능을 검증할 수 있는 장점은 있으나 채용 과정에서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 기업이 또 다른 검증장치를 만들어야 하는 등 비효율성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시간 자기 계발에 투자하면서 소위 ‘스펙’을 쌓아온 취업준비생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역차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블라인드 채용에 맞춘 사교육이나 전문업체가 성행하는 등 폐해도 벌써 발생하고 있다.
현장에선…
SK, 자소서로 서류심사 끝
롯데는 ‘직무 에세이’로 평가
은행권 등도 ‘스펙란’ 없애
23일 재계와 금융계에 따르면 이미 상당수 기업들은 이력서를 없애고 학력이나 학점·영어점수·사진을 기재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특정 몇몇 대학 출신으로 신입직원이 편중되는 현상 역시 개선된 편이다. 대기업들은 다만 공채 전체를 블라인드로 진행하기보다는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특정 전형이 있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SK그룹의 경우 탈스펙 채용 전형인 ‘바이킹 챌린지’를 2013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바이킹 챌린지’는 학력 등 스펙 기재가 전혀 없이 ‘자기 소개’ 자료만 업로드하면 서류 심사가 끝나는 방식이다. 오로지 오디션과 심층면접을 통해서만 신입사원을 선발한다. 롯데그룹 역시 ‘스펙태클’이라는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서류 심사는 ‘직무 관련 에세이’로만 평가한다. 이 같은 채용 방식은 학력이나 영어 진입 장벽이 없어 다양한 취업준비생들이 몰리고 조직 다양성이나 창의성 측면에서는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설명이다.
CJ그룹 역시 2012년 대졸 공채부터 서류전형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하고 있다. 2015년부터는 영어점수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 사진도 부착하지 않는다. 이름과 자기소개서만 받고 있다. 샘표도 2012년부터 서류전형에서부터 성별·나이·종교·출신학교·학점·어학점수 등 이른바 ‘스펙’을 아예 보지 않는 열린 채용을 실시하고 있다. 면접 과정에서도 인성, 직무능력이나 업무 이해력 위주로 평가한다. 은행권에서는 국민은행이 2013년부터 입사지원서에 영어성적 기재란, 해외연수 경험, 자격증 기재란을 없앴다. 출신 학교, 전공 등 기본정보는 채용 분야나 지역인재 확인용으로만 활용할 뿐 자기소개서 중심으로만 서류전형을 한다. 우리은행도 2014년부터 학력·연령 등을 묻지 않는 탈스펙 채용을 내걸고 자기소개서로만 서류 전형을 진행해왔다.
문제점은…
벌써 면접 사교육 성행 폐해
“직무 전문성·특성 감안해야”
바이오·증권선 적용 힘들어
다만 상당수 기업들은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기는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이다. 블라인드 채용은 기업 입장에서는 지원자를 선발하는 데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고 이는 채용 확대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서류전형이 블라인드 방식이 되면 결국 면접 비중을 강화해야 하는데 지원자들이 ‘면접 학원’만 따로 다니는 폐해도 이미 발생하고 있다. 실제 A항공사의 경우 완전 블라인드 방식으로 승무원을 채용하면서 자기소개 영상을 제출하도록 했는데 취업준비생들이 이를 전문업체에 외주를 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업무 특성이나 직무 전문성 때문에 아예 블라인드 채용이 어려운 곳도 적지 않다. 바이오 업계의 경우 블라인드 채용의 효용과 장점에는 공감하지만 선뜻 도입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타 산업직군에 비해 개개인의 전문성과 업무 역량을 요구하는 분야가 많아서다. 바이오 업계는 연구개발직의 경우 약대·의대·이과대 출신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며 자격증 보유 여부도 중요한 가점 요소로 평가한다. 단 영업 및 사무직은 전공과 무관하게 채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블라인드 채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증권 업계 인사 담당자들 역시 블라인드 채용만으로 직원을 선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서류전형이 아닌 면접전형에서 일부 증권사가 블라인드 형태로 심사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드물다. 이에 대해 한 증권사 관계자는 “영업직군이나 리서치센터 등 업무 특성상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며 “서류심사 과정에서 그런 점들을 어느 정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기업마다 원하는 인재 달라
“적절한 스펙검증 필요” 지적
기업들은 채용 방식은 결국 기업의 특성에 따라 기업이 선택할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각자 원하는 인재상이 다르고 채용 과정에서 기업의 효율성도 담보해야 하는 만큼 일률적으로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확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채용에서 가장 고려되는 부분이 이직률인데 블라인드 채용의 경우 이 역시 검증이 쉽지 않다”며 “적정한 수준에서 기본적인 스펙을 검증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윤홍우·박성호·이지성기자 seoulbird@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