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는 세계 유전체학 산업의 중심지’
미국 샌디에이고 경제협의회(EDC)는 지난 19일(현지시간)부터 나흘간 열린 ‘2017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에 발맞춰 이러한 취지의 보고서를 펴냈다. 유전체학이란 인간의 30억 DNA 염기쌍을 분석, 관련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총칭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샌디에이고에서 활약하는 유전체학 연구소나 기업들이 2014년부터 3년간 출원한 관련 특허는 총 371건에 달했고, 지난 한 해에만 2억 9,200만 달러(약 3,324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EDC 측은 “성장률이나 정부 지원 등 전체적인 순위로 따지면 보스턴에 이은 2위지만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의 긴 역사나 성숙한 인프라와 비교할 때 샌디에이고가 이룬 가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샌디에이고는 수백 년 역사의 다국적 제약사와 하버드대·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등을 갖추고 시작한 보스턴과 비교하면 출발선은 ‘흙수저’나 다름 없었다. 수십 년 역사의 샌디에이고가 보스턴을 위협하는 바이오 클러스터로 도약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샌디에이고 클러스터의 성공 요인으로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치밀하게 짜인 산·학·연 협력체다. 전문가들은 샌디에이고에 자리 잡은 수많은 연구소·기업·인재·투자자들이 상호 교류함으로써 혁신을 일궈내고 상생을 도모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바이오 사업 중에서도 혁신적인 분야로 평가되는 유전체 산업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다. 빌 볼드 EDC 컨설턴트는 “이곳은 유전체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끝에서 끝까지(end to end)’ 제공할 수 있는 곳”이라며 “솔크·스크립스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기초과학연구소가 성과를 수시로 공유하고, 이를 상업화하려는 야심찬 기업들이 산재하며, 이들을 돕는 비영리단체·투자자까지 어우러지면서 상승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급 인력이 풍부하다는 점도 매력 요인이다. 유전체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질병 유무를 판단하는 유전체학 관련 산업은 생물학(BT)와 정보처리기술(IT)가 결합한 대표적인 융합 분야로, 인재 확보가 필수적이다. EDC에 따르면 샌디에이고는 유전체학 관련 학위자를 연 평균 1,968명씩 배출하며 최고의 인재풀을 확보하고 있다.
첨단 과학과 인재 육성을 위한 시 정부의 강력한 의지도 빼놓을 수 없다. 군수산업에 의존해 왔던 샌디에이고는 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경기가 침체하자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첨단 과학’을 택했다. 시 정부는 1960년대 토지 기부 등을 통해 솔크 연구소 등 우수 연구소를 잇따라 유치했고,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캠퍼스(UCSD)의 문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을 모았다.
이 같은 투자가 결실 맺기 시작한 것은 약 20년 뒤다. 1978년 번도프 UCSD 교수가 창업한 하이브리테크가 1986년 대형 제약사 일라이 릴리에 4억 8,000만 달러에 인수된 것. UCSD는 벤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비영리기구 ‘커넥트(CONNECT)’를 설립해 연구·기술의 상업화에 나섰고, 시 당국은 첨단 기업과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 1998년까지 지방세를 80%까지 줄이는 혁신적인 안을 내놓았다. 이 같은 조치는 지역 내 창업을 촉진, 2005년부터 10년간 약 3,700개의 생명과학 관련 스타트업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미국 내 바이오 클러스터 중에서도 후발 주자에 속하는 샌디에이고의 성공은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샌디에이고에는 전통적 대기업이나 뛰어난 임상 성과를 자랑하는 병원도 없었지만 고급 인재 양성과 창업 지원에 집중한 끝에 바이오 산업의 메카로 떠올랐고, 더 나아가 최첨단 바이오 분야인 ‘유전체학’에서도 주도권을 잡게 됐다는 분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도 각 지자체가 바이오 클러스터를 육성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뚜렷한 방향성 없이 우후죽순 난립해 있는 수준”이라며 “바이오 클러스터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경쟁력 있는 지역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원하는 투자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샌디에이고=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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