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논란으로 기업들의 퇴직연금 부채 부담이 커지고 있지만 사용자와 근로자·정부 모두 손을 놓고 있다. 사용자는 기업도산이 아닌 이상 당장 퇴직자의 퇴직연금 지급에 문제가 없다는 안일한 판단에 빠져 있고 근로자는 통상임금 인정으로 퇴직연금 자체가 높아진다는 기대감에만 부풀어 있다. 퇴직연금의 사외적립비율을 감독해야 하는 정부도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런 가운데 유가증권시장 상장 200대 기업 가운데 확정급여형(DB형)을 선택한 기업의 절반가량이 최소적립비율(80%)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서울경제신문이 코스피200기업의 퇴직연금 사외적립비율을 전수조사한 결과 지난 2016년 말 기준 DB형을 채택한 135개 기업 가운데 최소적립비율을 채운 기업은 62곳(45.9%)에 불과했다. 나머지 73곳(54.1%)은 최소적립금을 확보하지 못한 채 운영되고 있다. 근로자가 직접 운용지시를 내려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확정기여형(DC형)과 달리 DB형은 기업이 확정급여채무 부담을 모두 지고 있어 임금수준이 높아지면 그만큼의 부담을 기업이 지게 된다. DC형을 채택하거나 DB형과 DC형을 병행운용하는 기업의 경우는 그나마 운영성적에 따라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DB형으로만 운용하는 기업은 확정급여채무 충당금 부담으로 적립비율을 높이지도 못하고 있다.
기업의 충당금 부담을 줄이고 사외적립비율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DC형 전환을 추진하지만 노조의 반대에 가로막힌다. 증권사 퇴직연금사업부 관계자는 “근로자들이 기존 퇴직금과 같이 원금을 그대로 보존 받길 원해 DC형 전환을 꺼린다”며 “기업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DC형 전환을 제안하지만 노조에서 반대하는 사례가 많아 DC형 전환이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2005년에 퇴직연금이 도입된 후 시장은 150조원으로 급성장했지만 근로자가 수익을 책임지는 DC형은 34조원에 그치고 있다.
노조의 반대에 DB형이 커지고 있지만 관리와 운용이 나아지고 있지도 않다. 기업은 최소적립금을 채우지 못할 경우 재정안정화계획서를 작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퇴직연금사업자인 은행·증권·보험사는 근로자 대표에게 이를 통보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최소적립률을 지키지 못했음에도 기업이나 사업자는 모두 쉬쉬하며 감추기에 급급하다. 지난 4월 감사원 감사 결과 조사대상 기업 4만5,145곳 가운데 2,303개(5.1%)가 근로자 대표에게 최소적립금 비율 미준수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고 42개 퇴직연금사업자 가운데 7곳이 1,217곳의 기업 근로자에게 알리지 않았다. 김동겸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의 퇴직연금 지급능력을 높이고 근로자의 관심을 환기 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80% 수준인 최소적립비율을 100%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선임연구원은 “의무사항을 지키지 않을 때 제재 조치가 강화돼야 기업은 경각심을 갖고 근로자도 적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감독원이 감사원 감사 이후 기업과 퇴직연금사용자에게 시정조치를 취했지만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도 이런 배경 탓이 크다. 금감원 관계자는 “12월 결산이 끝나면 재정안정화계획서를 정기적으로 내도록 조치했다”면서도 “이를 준수하지 않았을 경우 제재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최소적립비율을 100%까지 끌어올리는 단계적 상향조정 계획조차도 2014년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 차원에서 언급됐을 뿐 3년이 지나도록 입법 과정을 거치고 있지 않다.
지난해 8월 발표된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역시 지연되고 있다. 같은 해 10월 입법예고가 종료됐지만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재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기업이 사외에 독립된 퇴직연금 신탁기관(비영리법인)을 설립한 후 신탁기관 내 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영위원회를 통해 운영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높고 근로자의 의견도 반영될 수 있다. 그동안 퇴직연금사업자가 기업과 주거래 은행, 증권, 보험으로 한정돼 운용 관리가 안일하다는 점에서 검토됐다. 운용사 관계자는 “기득권을 지닌 일부 대형 금융사가 기금형 도입이 되면 수탁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통상임금 갈등뿐만 아니라 최저임금 이슈 등 퇴직연금 부채 부담은 갈수록 커질 것”이라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정부와 기업·근로자 모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종호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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