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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31> 김두량 '월야산수도'] 한가위 보름달 차올랐건만...시린 가을밤, 정적은 더 깊어가네

달을 그리지 않고 언저리에 어둑한 테 둘러 표현

잎 떨어진 두그루 나무·안개 핀 숲은 쓸쓸함 더해

특정 장소가 아닌 마음 속에 풍경 그린 '관념산수'

명암법으로 날릴듯한 털 구사한 '흑구도'도 대표작

김두량 ‘월야산수도’ 81.8×48.8cm 종이에 그린 수묵화.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달이 익어가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휘영청 둥근 달이 차오를 터이다. 한가위 보름달 뜬 밤 풍경을 그린 조선 영조 시절의 화원화가 김두량(1696~1763)의 ‘월야산수(月夜山水)’를 꺼내볼 때가 왔다. 보름달이 떠올랐건만 무슨 까닭인지 스산한 마음이 드는 그림이다. 맨살로 밤바람을 맞는 게 서늘해진 기온 탓인지, 뒤숭숭한 세상사 탓인지 혹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아련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그림 왼쪽 위에 ‘갑자년 중추에 김두량이 그렸다(甲子中秋金斗樑寫)’고 적혀 있다. 당시 갑자년은 1744년이었고, 그해 추석 밤에 그렸다는 뜻이다. 273년 전의 보름달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그림 한 점을 사이에 두고 수백 년의 시간이 포개진다.

내려놓고 비워 버렸을 때 비로소 떠오르고 가득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림 속 둥근 보름달이 그렇다. 화가는 달을 그리기 위해 ‘달을 그리지 않는 것’을 택했다. 대신 달무리처럼 언저리에 둥그렇게 어둑한 테를 둘렀다. 그랬더니 주변 배경을 뒤로 밀어내고 동그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드리지도 칠하지도 않았건만 빛을 발하고 그 아래를 비춘다. 흰 달에 색을 더할 수 없어 달 만 남겨둔 채 나머지 부분을 채색하는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이라는 전통 화법이 쓰였다. 드러내기 위해 감추는 그림 기법은 음악 중간의 적막, 시(詩)의 함축과도 같다. 노자가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도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이를 얘기했고, 뒤이어 ‘있음(有)과 없음(無)은 같은 데서 나왔으나 이름만 달리할 뿐이니 지극한 오묘함이 이를 통해 나온다’(此兩者同出 而異名…玄之又玄 衆妙之門)며 재차 강조했다. 없음에서 존재하고 있음에서 비워진 존재가 바로 그림 속 달이요, 여백의 미도 마찬가지다. 굳이 말하지 않고도 심중을 드러내고자 한 화가의 마음이 그대로 그림이 됐다.

달이 분위기를 만들었으니 그 달빛을 받아 주연배우처럼 앞장선 것은 그림 왼쪽의 잎 떨어진 나무 두 그루다. 나무 하나는 수직으로 꼿꼿이 섰고, 나머지 하나는 쓰러질 듯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형상이다. 건너편 안개 드리운 숲이 가을의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더한다. 곧은 나무가 가슴 활짝 펴고 달빛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형상이라면 허리 숙인 노목은 자연에 순응하는 숙연함을 전한다. 온 가족이 모이는 한가위건만 어째 그림을 보는 시선은 홀로 앉은 선비의 눈이다. 그에게 나무의 모양은 중요치 않다. 말라죽은 고목이어도 가지 끝은 여전히 카랑카랑 생생하다는 게 의미있는 모양이다. 짙은 색으로 표현된 가지 끄트머리가 인상적이다. 마른 나뭇가지의 구부러진 모습을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는 해조묘(蟹爪描) 기법이 쓰였다. 나무 아래로 굽이치는 급류와 바위, 언덕의 풀까지 화가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려냈다. 그 탄탄한 자신감이 그림을 떠받치고 있으니 혼자일지라도 결코 외롭지 않다.

이 한 폭의 풍경화는 특정한 장소를 그렸다기 보다는 우리네 마음 속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라 하겠다. 화가 또한 어디서 무엇을 보고 그렸는지는 생략하고 날짜만 적었다. 300년 된 그림이 전하는 감동도 그 마음의 울림 때문일 게다. 무엇이 그토록 그리웠으며, 소리 내지 못한 채 목구멍으로 삼켜버린 말은 무슨 얘기였단 말인가.

김두량 ‘흑구도’ 23×26.3㎝ 종이에수묵./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대대로 명성 날리던 화원 가문에서 태어난 김두량은 공재 윤두서(1668~1715)에게 그림을 배웠다. 강렬한 눈빛, 턱 아래 수염 한 올까지 살아있는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가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김두량의 또 다른 대표작 ‘흑구도’로 확인할 수 있다. 검은 개는 옆구리가 가려운지 뒷다리를 들어 긁는 중이다. 난처한 가려움으로 불편하게 찌그러진 눈은 여전하지만 기다란 입매 끝을 보니 좀 시원해지는 모양이다. 옛말에 개가 제 몸을 긁으면 집에 복을 가져온다고 했다. 개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는 나무 수(樹) 자가 지킬 수(守) 자와 음이 비슷하니 도둑을 막고 집을 지킨다는 뜻이 된다. 싱거워 보이지만 기원을 담은 길상화다. 조선의 개 그림으로는 왕실 종손 출신 화가 이암(1499~?)의 ‘모견도’와 김홍도(1745~?)의 ‘모구양자도’ 등이 있는데 적지 않은 이들이 그중에서도 김두량의 개를 으뜸으로 꼽는다. 막 날릴 듯한 털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중국을 거쳐 받아들인 서양식 명암법을 남보다 앞서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림 애호가였던 영조는 김두량이 그린 개 그림 뒤에 충성을 치하하는 글을 직접 써줬고 ‘남리(南里)’라는 호와 함께 종신 녹봉을 내려줬다. 당대 최고 실력이었으니 영조 어진을 그린 것은 당연했다. ‘월야산수’를 그린 그해 51세의 영조 어진을 그려 봉안했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조선 말기인 1900년에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이 원본을 보고 모사한 영조 어진이 남았고 이는 보물 제932호로 지정돼 국립고궁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다.

김두량 ‘전원행렵도’ 7.3x182.7cm 두루마리 그림 중 일부인 벼 수확과 새참 내 가는 장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유현(幽玄)한 표현력과 정교한 묘사력을 갖춘 김두량은 서양식 명암법과 원근법을 일찍이 받아들인 것뿐 아니라 풍속화풍을 앞서 개척해 김홍도·김득신 등이 활약할 토양을 닦았다. 공교롭게도 ‘월야산수’나 ‘영조 어진’을 그린 1744년 그해 봄, 김두량은 폭 8㎝ 안팎에 총 길이 각 180㎝ 이상인 두 폭짜리 ‘사계절산수’를 완성한다. 복사꽃과 오얏꽃이 핀 정원에서 봄을 만끽하고 정자에 앉아 장기를 두거나 냇가에서 술잔과 여흥을 나누며 여름을 즐기는 선비를 ‘춘하도리원흥경’에 담았고, 벼를 수확해 타작하는 농부의 가을과 사냥으로 한가로이 겨울을 보내는 선비를 ‘전원행렵도’에 담았다. 그림 한쪽에 갑자년 정월에 자신이 그리고 아들인 화원 화가 김덕하(1722~1772)가 색을 칠했다고 적어뒀다. 등장 인물들의 옷차림은 중국식이라 좀 낯설지만 간략한 필치로 특징을 간파한 풍속 장면은 친근함을 전한다. 새참 내 가는 아낙의 그득한 음식바구니를 보며 꼬리 치는 강아지가 무심한 척 벼 베는 농부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엄마 손에 매달린 아기도 정겹고, 술상 차려 따라 나온 여인 또한 반갑다. 두런두런 둘러앉을 추석이 기다려진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김두량 ‘전원행렵도’ 7.3x182.7cm 두루마리 그림 중 일부인 벼 타작 장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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