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삼동에 홀로 거주하는 직장인 정보미(33·가명)씨는 이틀에 한 번 아침 7시 현관 밖을 두리번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어릴 적 잠도 깨지 않은 채 아버지의 등쌀에 신문이나 우유를 찾던 주머니에 정씨를 위한 건강식 재료가 담겨 있다. 언제 왔는지 발아래는 2인분 정도의 따뜻한 미역국도 놓여 있다. 내일까지 정씨의 배를 채워줄 아침 식사다. 주 1회가량은 또 다른 배달 업체에서 신선식품을 현관 앞에 가져다준다. 아보카도나 아스파라거스 등 대형마트를 가야 살 수 있는 고급 식자재가 대부분이다.
정씨의 배달에 대한 애착은 바쁜 평일 아침뿐 아니라 주말에도 이어진다. 주말 저녁에는 홀로 호텔 레스토랑 출신 셰프가 직접 조리한 고급 음식을 배달해 만찬을 즐긴다. 서울 강남·경리단길 등 사람이 붐비는 지역에서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겨우 입장할 수 있는 맛집 음식을 거실에 펼쳐두고 ‘넷플릭스’로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며 여유를 즐긴다. 아침 식사와 주말 저녁을 해결하는 동안 정씨가 굳이 누군가를 만날 필요는 없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배달받을 시간을 지정하고 비용을 지불하면 해당 업체 직원이 소비자와 접촉하지 않고 음식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가기 때문이다.
정씨는 자신을 ‘정신적 코스파’라고 칭한다. ‘코스트 퍼포먼스(Cost-Performance)’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코스파족은 가격 대비 성능, 즉 가성비를 중시하지만 이처럼 매 끼니를 배달로 해결하는 생활은 가성비가 높지 않다. 정씨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말에까지 식사 한 끼를 하기 위해 약속 시간을 정하고 메뉴를 고르는 일이 피로해졌다”며 “배달로 매번 끼니를 해결하는 게 비용 면에서는 비합리적이지만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 소모를 줄여주기 때문에 가성비가 높다”고 말했다.
‘정신적 코스파’는 먹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정씨는 월 1회 책 배송 서비스를 통해 ‘취향’을 배달받는다. 배송 업체가 나이, 성별, 결혼 유무, 직업 등에 맞춰 필요한 책을 추천하고 추천 도서를 월 1회 배송해준다. 정씨는 “과거 동호회를 할 정도로 독서를 좋아했지만 최근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며 “서비스 제공 업체에서 나에게 맞는 책을 추천해주기 때문에 혼자서도 동호회 회원과 서로 책을 추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타인과 관계 맺기에 지친 ‘정신적 코스파’를 위한 배달 서비스는 무한대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사회 초년생 김한성(29·가명)씨는 혼자 사는 자취방으로 취미를 주문한다. 김씨가 이용하는 서비스는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DIY 배달 서비스다. 업체는 초콜릿 만들기, 블록 조립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구성품을 포장해 집으로 배송한다. 김씨 역시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유에 대해 “취미생활을 위해 일부러 학원을 가거나 동호회를 찾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취미생활을 하려고 동호회에 가입했을 때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굳이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과도 억지로 맞춰야 하는 게 힘들었다”며 “집으로 취미를 배송해주는 서비스가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지만 불필요한 인간관계의 피로감을 줄여줄 수 있어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경제신문이 만난 젊은 20~30대는 대체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유에 대해 ‘인간관계의 피로감’을 꼽았다. 50대 이상이 주로 혼자 있는 시간에 끼니를 때우거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과 달리 20~30대는 홀로 보내는 시간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연소득 1,200만원 이상 40대 이하 1인 가구 1,500명을 대상으로 올해 초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혼자 살기 시작한 주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63.7%의 응답자가 ‘혼자 사는 것이 편해서’라고 답했다. 경제적 이유로 1인 가구가 증가한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인생을 보다 즐겁게 살기 위해 혼자를 택한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취미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 주문
스트레스 뚝…나는 정신적 코스파”
‘사회기피 문화’ 탓에 시장 더 커져
배달 서비스의 진화는 젊은 1인 가구의 이 같은 ‘혼자에 대한 동경’과 연결된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인간관계로 받은 스트레스를 홀로 있는 시간에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과거 요식업에 그쳤던 배달 서비스는 취미·취향을 배송해주며 소비자의 생활습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매달 생리대를 소분해 정기배송하거나 셔츠를 세탁·다림질해 집 앞에 가져다주는 서비스가 등장하는가 하면 화장품이나 면도기 등을 사용량에 맞게 정기적으로 배송해주는 업체도 나타났다. 대부분 직접 매장을 방문해 타인과 만나 물건을 고르고 선택하는 피로감을 덜어주는 서비스다. 주 2회 꽃을 정기적으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정나연(31·가명)씨는 “격주로 꽃을 집으로 배달해주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이 주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며 “꽃뿐 아니라 다양한 정기 배송 서비스를 두루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와 같은 ‘배달의 민족’ 덕분에 스마트폰을 이용한 국내 배달 앱 시장은 최근 6~7년간 크게 성장했다. 대표적인 배달 앱 ‘배달의민족’을 서비스하는 ‘우아한 형제들’은 지난 해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지난 2013년 이후 3년 만이다. 중계 거래액 규모는 연간 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기배송 서비스는 20~30대 젊은 1인 가구를 중심으로 충성도가 높다”며 “이들은 먹거리뿐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배달 서비스를 활용한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이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가 대중화하면서 젊은 세대가 일상생활을 배달로 해결하는 모습은 일견 자연스럽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젊은이들이 관계 자체를 회피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많다. 직장·사회 등 각종 인간관계에서 거절을 경험한 젊은 세대가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1인 가구가 돼 홀로 의사결정을 하는 데 만족한다는 설명이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직업이나 성향에 따라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면서도 “일상생활에서 타인과의 만남 자체를 회피하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20~30대는 일자리·결혼제도 등 각종 인생의 과정에서 거절을 경험하고 이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고 있다”며 “거절로 인한 상처를 피하기 위해 먼저 인간관계를 철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인간관계가 피로해 혼자 해결하고 갈등을 피하는 젊은이가 늘어나는 것은 사회 발전 과정에서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서지혜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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