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에서 열린 KB금융 임시주주총회에서는 시종일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위임장을 받아 참석한 KB 노조 측에서는 “주총 성립에 이의 있습니다”라고 고성을 질렀고 이 자리에 참석한 일반 주주들은 “조용히 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1시간의 정회를 거쳐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 총수 대비 13.73%, 출석 주식 수 대비 17.73%의 찬성률로 부결됐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노동계 친화적인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금융권 노조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경영개입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과거 근로조건과 복지개선에 힘썼다면 지금은 최고경영자(CEO) 교체 같은 ‘큰 건’을 어젠다로 내걸고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해 구조조정이 시작된 일본의 은행처럼 디지털 전환 등 시대 변환 속에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겠다는 모습이라는 비판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KB노조는 지난 9월 차기 회장을 선임하는 확대지배구조위원회가 시작된 후 아직까지 윤종규 회장 연임반대를 외치고 있으며 여의도 본점 앞에 설치한 컨테이너를 철수하지 않았다.
또 임시주총에서 주주제안을 통해 대표이사를 이사회 내 6개 소위원회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정관변경 안건을 주총 안건으로 올렸다. CEO가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인데 국민연금조차 ‘반대’ 의견을 내면서 제안자인 박홍배 KB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이 주총장에서 철회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노조 추천 사외이사 제안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경영개입 시도라는 게 금융권의 분석이다. 박홍배 위원장은 “내년 주총에서 주주가치 훼손 우려를 반영해 정관 개정안을 수정 제안할 것”이라며 향후 갈등을 예고했다.
하나금융 계열사 노조는 ‘하나금융 적폐청산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해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의 3연임 반대와 퇴진을 요구한 데 이어 김 회장과 함영주 KEB하나은행장에 대해 은행법 위반 혐의로 금융감독원에 제재 요청서를 제출했다. 하나금융 노조는 내년 정기주총에서 경영진을 상대로 표 대결을 벌일 태세다.
약한 명분으로 현 회장을 거부하겠다는 이들 KB노조와 하나금융 노조 뒤에는 금융산업노동조합이 연대해 힘을 보태고 있어 퇴로마저 없는 처지다. 특히 허권 금융노조 위원장은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윤종규 KB금융 회장의 연임과 KEB하나은행 문제에 정부가 관심을 갖고 합당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노조의 경우 최근 재개된 산별교섭에서 임금 인상률 가이드라인 외에 핵심성과지표(KPI)를 포함한 인사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같이 노조에서 나서 CEO를 가리겠다는 것은 마치 낙하산 인사를 바란다거나 관치금융을 원하는 것처럼 보여 내부에서도 의아해하는 시선이 나온다. 급여와 복지보다는 경영감시권에 지나치게 매달린다는 지적이다. 조직 스스로를 적폐로 규정하는 데 대한 거부감도 크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모바일뱅킹 등 핀테크가 확산되면서 일본처럼 오프라인 기반의 은행들이 지점폐쇄와 감원 등을 피할 수 없는데 이를 막기 위한 압박 수단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이사회에 참여하게 되면 사전에 경영 결정에 개입해 구조조정을 최소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한국씨티은행 노조의 경우 전국 133개 점포 중 101개 지점을 통폐합하는 방안에 강력히 반발, 사측은 결국 폐쇄점포 수를 90개로 줄였다. 점포 폐쇄는 은행 경영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해야 하는데 제동을 걸면서 시장논리를 역행한 것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노조가 이사회 진출로 인사에 영향력을 갖고 또 이를 활용해 각종 노사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려는 것은 향후 사측과의 협상에서 압박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원기자 garde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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