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몰아치며 체감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17일 오후2시. 청와대를 눈앞에 둔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이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민 건강권 수호’라고 적힌 붉은 머리띠와 ‘편의점약 확대 반대’가 선명히 새겨진 검정 목도리를 착용한 채 일사불란하게 각종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약사들. 휴일에도 불구하고 1,100명(주최 측 추산)의 약사들이 대한약사회가 주최한 ‘편의점 판매약 품목 확대 저지를 위한 전국 임원 궐기대회’에 참석했다. 대한약사회 측은 “당초 약사회 임원 위주로 700여명 정도가 모이리라고 전망했지만 일반 회원들의 참여율이 생각보다 더 높았다”며 “그만큼 편의점 상비약 확대에 대한 약사들의 우려와 걱정이 깊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의사·약사·변호사 등 전문직들의 거리 투쟁이 갈수록 빈번해지고 있다. 저마다 국민의 권리와 편의가 침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투쟁이라고 강변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전문직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냐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날 대한약사회의 거리투쟁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응급의약품(안전상비의약품)이 늘어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이뤄졌다. 조찬휘 대한약사회장은 “편의점 판매 약들의 오남용과 부작용 사례가 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부는 더 철저한 복약지도가 필요한 제산제(겔포스)나 지사제(스멕타)까지 편의점 판매 약에 포함하려 한다”며 “심야 공공약국이나 약국 당번제와 같이 합리적인 방안을 고려하지 않은 채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약품 개수를 늘리겠다는 발상은 국민의 건강권을 무시하는 조치”라고 강조했다.
정부 정책에 반발하기 위해 거리투쟁에 나선 전문직군은 약사뿐이 아니다. 지난 10일에는 대한의사협회 소속 의사 3만여명이 서울 대한문 앞에 모였다. 의사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대선공약이었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인 ‘문재인 케어’에 반대하기 위해 가운을 벗어던졌다. 의협의 반발에 당황한 복지부는 13일 권덕철 차관이 직접 나서 의협 비상대책위원회와 실무 협상을 하는 등 조정에 나섰지만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전국 변호사들의 모임인 대한변호사협회도 오는 22일 서울 서초동 법원 인근에서 세무사법 개정안 폐기를 위한 총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8일 국회 본회의에서 변호사의 세무사 자격 자동부여 제도 폐지를 담은 세무사법 개정안이 가결되자 집행부 차원의 삭발식을 가진 데 이어 거리투쟁까지 예고한 것이다. 변협은 이번 세무사 자격 자동부여 제도 폐지가 노무사·변리사 등 현재 변호사 업계와 충돌을 빚고 있는 유사 직역 간의 갈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폐기를 위해서는 강경 투쟁도 불사할 방침이다.
거리로 나온 전문직들은 표면적으로는 ‘국민’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건다. 의사는 문재인 케어 시행으로 건강보험료가 인상돼 결국 국민 부담이 가중된다는 입장이고 변호사들도 세무사 자격이 박탈되면 다른 전문직보다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업무영역을 갖고 있는 변호사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돼 결국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시민단체를 비롯한 국민 여론은 싸늘하다. 사실상 전문직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한 ‘직종 이기주의’ 아니냐는 비판이다. 예컨대 편의점 약 반대 투쟁에 나선 약사들은 결국 편의점 판매 일반의약품이 늘어남에 따라 약국 매출이 줄어드는 걱정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다. 의사들 역시 비급여 항목이 급여화할 때 의사들이 받는 보상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고 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수렴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대규모 집회를 위시해 세력 과시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것도 국민 반발을 부르는 요인이다.
김준현 건강세상네트워크 상임대표는 “국민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 시행되는 제도가 전문가 집단의 반발에 가로막혀 애초 취지에서 수정되거나 퇴보한다면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을 수밖에 없다”며 “무엇보다 기득권 세력의 집단 이기주의에 매번 정부가 물러서 왔던 관행을 이번에는 뿌리 뽑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경미·이지성·김민정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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