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한 얘기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국내 금융산업 경쟁력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후배들에게 멍에처럼 물려줘야 할 수 있습니다.”
한 전직 금융당국 수장은 정부나 정치권 등 금융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이 워낙 커 ‘뭘 해 보겠다’는 얘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한 사례로 인터넷전문은행 육성을 위해서는 은산분리 규제 완화가 필요하지만 여당에서 20년 전의 프레임인 “대기업의 사금고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금융당국도 의기소침해 적극적인 완화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 금융당국의 운신의 폭이 더 좁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청와대 운동권 참모진의 목소리에 금융당국이 코드를 맞춰 가산금리 규제나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 등 시장에 개입하며 논란을 키우고 있다. 이렇다 보니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금융철학이 보이지 않고 독자적인 콘텐츠를 읽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 위원장의 한 측근은 “최 위원장은 지극히 친시장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며 “정부 초반이다 보니 청와대 보이스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오히려 불협화음만 불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 위원장은 과거 노무현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1년 정도 지나면 관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최 위원장도 그때 본격적인 목소리나 행보에 보일 것”이라며 “지금은 최 위원장이 발톱을 숨기고 있을 때”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의 정부 코드 맞추기 행보를 이해해달라는 취지지만 당국이 청와대 운동권 참모진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최 위원장과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은 전직 금융당국 수장들과 비교되기 일쑤다. 전직 금융수장들은 자신만의 캐릭터로 금융산업 육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왔는데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 원장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가격의 ‘거품’이 붕괴할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겠다고 했다가 “송구스럽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금융당국 고위당국자가 “최 위원장이 전직 수장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뼈아프다”고 할 정도로 금융당국 내부에서도 최 위원장의 평판 리스크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과거 ‘대책반장’으로 불린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투자은행(IB)에 대한 싸늘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직접 국회를 설득하면서 한국형 IB의 토대를 만들었다. 또 저축은행 사태 당시 김 전 위원장은 강한 발언과 행동으로 시장에 분명한 신호를 줘 불안 심리를 줄이고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자구 노력이 미흡한 저축은행 대주주에게 “가지고 가든지, 포기하고 가든지 대주주가 판단하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은 대표적인 일화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 2015년 이후 대우조선해양·한진해운·현대상선 등 굵직한 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며 총대를 멨다. 그는 한진해운 법정관리에 따른 물류대란 책임, 대우조선 혈세 투입 논란을 짊어지면서도 ‘이해당사자들의 고통분담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구조조정을 추진했다’는 일관된 입장을 설파했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도 정책금융기관 개편, 금융소비자 권익 강화, 우리금융 민영화 진전 등으로 금융위기 이후 안정적인 금융시장 회복을 이끌었다. 당시 신 전 위원장은 “기업이 망하면 금융 잘못이고, 금융이 지원했다가 망하면 금융이 더 큰 잘못이고, 만약 금융이 지원했다 살아나면 그것은 기업이 잘해서 그런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면서 “그게 ‘금융의 숙명’”이라고 말하며 금융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하지만 현재는 이 같은 당국 수장의 위엄이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금융지주사 최고경영자(CEO)와 지배구조 이슈에 대해서는 너무나 서투른 모습만 보였다. 최 위원장과 최 원장이 돌아가며 KB금융과 하나금융의 지배구조를 지적했으나 오히려 인사개입이라는 역풍만 부각됐다. 한 전직관료는 “사외이사 제도나 모범규준은 우리나라 환경에서 역사가 길지 않은데 금융당국은 시장 안에서 많은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제도적 프레임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직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도 “시장이 과열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면 금융당국이 관치를 하는 게 당연하기는 하나 세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전직관료는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금융이 자기네 입맛에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기 때문에 시장경제 문화에서 후진적”이라며 “시장에서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프레임을 가져가도록 감독하는 당국이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권의 손발이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산업 및 기업 구조조정에 관한 대원칙과 큰 틀도 금융위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산업통상자원부가 주도하는 모양새가 됐다. ‘일자리 유지’와 ‘구조조정’이라는 상충된 가치 속에 금융권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묻히게 됐다는 평가다. 금융권의 한 전직임원은 “아무도 구조조정의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원칙도 제시하지 않아 현 정부 들어 ‘금융홀대론’만 강해졌다”고 비판했다. 금융사를 압박하는 규제만 쏟아질 뿐 금융산업 발전을 위한 정부 차원의 청사진은 찾기 힘들다는 의미다.
익명의 한 전직관료는 “5년 단임제하에서 금융은 권력 변화 이후에 이상하게 영향을 받는 섹터 중 하나가 됐다”며 “시장에 맡기도록 하는 문화의 변화가 제일 중요한데 신뢰만 점차 바닥이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최근 급락해 ‘개미’들의 피해가 커진 가상화폐에 대해서도 금융당국 책임론이 불거진다. 가상화폐는 지난해 11월 말 이낙연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가상화폐로 인한 사회병리 현상에 대한 우려를 내비쳤으나 금융당국은 책임론을 피하기 위해 법적 정의에만 매달렸고 12월에서 1월 중순 사이 급등하며 너도나도 뛰어들도록 방치했다. 실제 금융위를 중심으로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가 시작된 게 7월이고 9월에는 가상화폐를 활용한 기업공개(IPO)를 금지하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익명의 한 관계자는 “관계부처의 대응이 한 달만 빨랐어도 가상화폐와 블록체인이 뭔지도 모르고 뛰어든 투자자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책임에 대한 부담으로 금융위가 선제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황정원·조권형기자 garde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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