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작은 거라도 일단 걸리면 관세 폭탄이에요.”
미국 상무부의 한국산 변압기에 대한 연례재심 판결이 임박한 지난달. 현대중공업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미 상무부가 국내 다른 업체의 변압기에도 또다시 초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미 현대중공업그룹(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판정에서 60.8%의 관세를 맞은 상태였다. 그는 “효성이나 일진전기가 지난해 판정에서 한자릿수의 관세를 맞으며 선방했지만 아마 이번에는 힘들 것”이라며 “아마 우리와 똑같은 수준의 제재가 나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수주 뒤인 지난 13일 상무부는 효성과 일진이 수출하는 고압변압기에 60.8%의 관세를 매긴다는 연례재심 결과를 발표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상무부가 부과할 수 있는 사실상 최고치를 매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무부의 전략은 한결같았다. 먼저 현미경식 조사에 나서거나 기업 내부 기밀을 요구하는 등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았다. 상무부는 현대일렉트릭에 대형변압기 부속 부품에 대한 원가 공개를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인지는 지정하지 않았다. 효성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면서 협력업체와의 거래 내역을 충분히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업계 관계자는 “거래 세부내용을 외부에 공개하는 업체와 누가 믿고 거래를 하겠느냐”며 “답변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을 요구하면서 트집을 잡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일단 빌미를 잡으면 미리 장착해둔 관세 폭탄을 투하했다. 이때 동원된 게 불리한 가용정보(AFA) 조항. 조사 대상이 성실하게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때 상무부가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한 조항이다. 문제는 AFA를 손에 쥔 미국이 뚜렷한 설명 없이 번번이 사실상 최고 수준의 관세를 부과했다는 점이다.
자국 업체 편을 들어주기로 작심한 미국이 ‘요술방망이’인 AFA를 들 때마다 업계 피해가 속출한 이유다. 화학 업계도 미국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7월 합성고무의 일종인 에멀전스티렌부타디엔고무(ESBR)를 수출하는 한국 기업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하기로 최종 판정했다. 이 판결로 금호석유화학 등이 44.30%의 관세를 부과받았다.
대미 철강 수출길은 초토화됐다. 미국은 2016년 AFA를 활용해 포스코산 열연강판에 61%의 보복관세를 매기며 포문을 열었다. 이후 열연강판을 소재로 한 유정용 강관 등 가공제품들에도 번번이 고율의 관세가 부과됐다. 미국의 보복관세가 본격화한 후 2015년 기준 420만톤이던 대미 수출량은 373만톤까지 떨어졌다.
업계가 이번 판결을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미경식 조사 이후 보복관세를 맞는 것 자체는 여전히 피하기 어렵겠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최고 수준의 관세가 부과되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다. 번번이 자국에 불리한 판정만 내린다며 세계무역기구(WTO)의 권위마저 부인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아래서 특히 반길 만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동맹국의 호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트럼프 행정부지만 구속력 있는 자국 법원의 판결마저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역법원(CIT)가 사건을 접수한 후 판결을 내리기까지 통상 2년 가까이 걸리지만 개별 업체가 상무부 판정 직후 제소해둔 덕분에 판결이 바로잡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보다 짧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포스코는 열연강판에 부과된 보복관세에 대해서도 2016년 판정이 나자마자 제소했고 지난해 현대중공업그룹과 금호석유화학도 뒤를 이었다. 통상 업계 관계자는 “이미 제소해둔 상무부 조치들이 뒤집힐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상무부가 앞으로 제재에 나설 때도 무턱대고 고율의 관세를 매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