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22일 창립 80주년 행사를 조용히 치렀다. 사내 게시판을 통한 온라인 사진전(80개 스틸 사진)과 7분간의 사내방송이 전부였다. 재계에서는 지난 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최대한 몸을 낮추려는 내부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면서도 “안타깝다”는 평가가 많았다. 한 경제 단체의 고위 관계자는 “삼성전자 1개 기업이 우리나라 전체 연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20%가 넘는다”며 “삼성이 투자와 고용 측면에서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시점인데 사회 여건이 우호적이지 못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외견상 삼성의 위축된 모습과는 달리 ‘다이내믹 삼성 80, 새로운 미래를 열다’는 제목의 사내 방송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겼다. ‘도전의 길(이병철 창업주)→초일류의 길(이건희 회장)→미래의 길’로 나눠 삼성의 성장 과정을 복기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한 정미소 삼성상회에서 반도체 사업까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경영철학으로 삼성의 초석을 다진 호암 창업주,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제2 창업 선언(1988년)과 신경영 선언(1993년) 등으로 삼성을 초일류로 도약시킨 이 회장 스토리가 다시 한 번 소개됐다. 그 과정에서 메모리 반도체 25년 연속 세계 1위, 스마트폰 세계 1위, TV 12년 연속 세계 1위 등의 성과도 언급됐다. 마지막 ‘미래의 길’에서는 ‘100년 삼성을 준비한다’는 주제로 각계각층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특히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은 “변화를 위해 우리 임직원들의 마인드셋과 일하는 방법, 이런 것들을 지금 다시 한 번 변신해야 할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분발을 촉구했다.
세상을 완전히 바꾸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을 맞아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타룬 카나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실리콘 밸리나 다른 기업의 방향성을 단순히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는 협력적 경쟁이라는 새 경영모델로 대전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이 부회장의 메시지는 따로 없었다. ‘제3 창업’ 선언은 아니어도 새 방향성을 제시하는 차원의 화두를 던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일각의 관측이 있었지만 달랐다. 이날 행사에선 이 부회장의 사진 한 장 없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고 여러 일로 어수선한 상황이라 당분간 잠행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임원은 “경영 공백의 후유증을 추스르고 바닥까지 추락한 경영인으로서 신뢰를 되찾는 방안부터 미래 먹거리를 포함한 사업 재편 방안 마련까지 살필 일이 많다”면서도 “공개 활동을 하기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지배구조 개편 논의가 물밑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순환 출자 해소와 관련해 삼성SDI의 삼성물산 지분(404만여주) 매각 △금융계열사 통합 감독 도입 및 보험업법 개정과 연관된 삼성생명·화재의 전자 지분 정리 △삼성중공업의 유상증자 △생명 공익재단과 문화 재단의 이사장 직위 변화 여부 등 이슈가 많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투명 경영 제고 방안과 관련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 이 부회장 고민이 클 것”이라며 “한편으로는 전장부품업체 하만 인수, 배터리 발화로 촉발됐던 갤럭시 노트7 사태의 조기 수습에서 보듯 이 부회장이 과감한 결단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