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땅이 언제 녹을지, 빈 땅에 언제 싹이 틀지를 땅 위에 사는 사람은 알기 어렵다. 우수에 얼음이 녹고 경칩에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것 정도를 선조들의 경험 어린 절기 상식을 통해 가늠할 뿐이다. 하지만 춘분에도 함박눈이 내려 설중매(雪中梅)를 보듬기 일쑤니 이치에 합당한 때는 자연만이 알 뿐이다.
말 한마디 않고도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 윤형근(1928~2007)의 그림이다. 봄을 맞아 차가운 땅에 스멀스멀 돌기 시작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아련하게 번져 나온 색의 움직임이 봄날의 아찔함을 부르는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천의 올 틈새로 파고든 물감 끝에서 새로 움튼 싹들이 고개를 내밀곤 한다. 태동하는 생명력과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과묵한 화가의 숨소리와 뒤섞여 들린다.
종이를 태운 것 같은 암갈색의 엄버(umber)는 흙색을 닮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토양에서 유래한 물감 이름이다. 떨어진 낙엽이 세월을 머금어 흙이 되는 그 순간, 새 생명을 품고 있는 그 색을 작가는 유독 즐겨 사용했다. 누르스름한 갈색 엄버와 군청색에 가까운 짙은 블루의 두 가지 색을 섞어 화면을 채웠다. 푸른 기운 머금은 옅은 갈색이 꼭 잘 숙성된 차 색과 비슷하다고 여겼던지 ‘청다색(靑茶色)’이라고 제목 붙이곤 했다. ‘엄버-블루’라고도 불렀다.
그에게 갈색 엄버는 땅이고 푸른 블루는 하늘이었다. 땅 위에 하늘을 겹쳤더니 그 틈에서 새로운 문이 열린 격이라 작가는 “내 그림은 천지문(天地門)이다”고 했다.
작가는 안료에 직접 제작한 기름을 섞어 물감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반복적으로 선을 그렸다.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고 스스로 “추사체의 절제된 추상적 회화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 윤형근이니 선을 그린다기 보다는 획을 그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획은 웅혼한 기둥이 되고 선에서 우러난 번짐이 마포 천으로 만든 바탕 생지에 스몄다. 기름을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색은 옅기도 하고 더 짙게 강렬해지기도 한다.
칠하지 않은 중앙 부분의 여백은 작가의 말처럼 문이 된다. 열린 문틈이 좁을라치면 그 안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온다. 때로는 색칠한 기둥의 간격이 널찍해 큰 문을 이루면서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은 외부로 나아가는 문인 동시에 바깥의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다는 양 품이 넓다.
“무의식 속에서 자아가 더욱 확실히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의식이란 의식할수록 자아를 소심하게 한다.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목적도 없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을, 언제까지나 물리지 않는 그 무엇을 그리고 싶을 뿐이다.”
의도는 없었을 뿐 더러 의도한 대로 되는 일도 아닌 것. 그게 인생이요, 그림이다. 윤형근은 ‘작품은 곧 인품’이라는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 중 하나로 말과 그림과 삶이 일치했다.
충북 청주 출신의 그는 개화기 지식인이었던 외할아버지와 서예, 사군자를 즐긴 아버지의 영향을 혈통으로 내려받았다. 유교적 분위기가 강한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데에는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윤형근은 상과에 진학했고 은행원이 됐다. 시키는 대로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 고역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마주앉아 그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사이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의 누님댁으로 향했다. 처음 든 반기가 거장의 첫걸음이 됐다. 그러나 길은 험했다.
서울대 미대 시험을 보는 날, 평소 않던 늦잠을 잤다. 게다가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 시험장에 도착하니 옷깃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이래서 어찌 시험을 보겠나” 물었던 시험감독이 바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수화 김환기(1913~1974)였다. 자신 있게 “괜찮다”며 실기시험을 본 윤형근은 서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 등 반정부 운동에 가담한 후 학교를 떠나게 됐다. 6·25전쟁이 끝나고 지속적으로 복학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홍익대로 편입하는데, 공교롭게도 서울대에서 홍익대 교수로 옮겨간 김환기가 또 한 번 도움을 준다. 이후 윤형근은 종종 스승 댁에 드나들었고 새해 인사 올리는 그의 절하는 모습에 반한 이가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 여사다. 둘은 나란히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결혼했다. 우연이 인연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영겁의 끈으로 묶인 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고학으로 어렵게 대학을 다닌 윤형근은 박수근이 그랬듯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었다. 학비도 벌고 동생들까지 공부시키느라 본격적으로 자기 그림에 전념한 것은 거의 마흔이 돼서부터다.
그의 초창기 그림은 상당히 고왔다. 사는 게 바빠 제대로 펼치지 못한 작품들이 스케치북에 드로잉으로 남았고 이들은 오는 8월 개막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윤형근 전(展)’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이 전시를 준비 중인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의 초기작은 푸른색, 보라색, 연두색 등의 색감이 너무나 아름답다”면서 “크고 담대한 남성적인 면과 섬세하고 예민한 여성적인 면을 넘나든 작가”라고 평가했다. 김 학예사는 “1963년 김환기가 브라질 상파울루를 거쳐 뉴욕으로 간 뒤 윤형근과 주고받은 편지 뭉치에는 김환기가 점 하나하나에 담았다고 한 그리움의 정체가 모두 담겨있다”고 귀띔했다.
윤형근에게 김환기는 스승이자 장인이고 넘어서야 할 선배이기도 했다. 김환기의 1970년작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묵화(墨畵)에서나 보던 먹의 깊은 빛깔과 번짐 효과를 유화물감과 캔버스를 통해 구현하기 위해 도전한 것이 이때부터였다는 게 작가의 고백이다.
그렇게 윤형근은 청출어람을 이뤘다. 생전에 그가 “김환기의 그림은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닌다”고 말한 적 있다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찍고 테 두른 김환기의 점들에는 구구절절 그리운 사연이 흐른다. 하늘을 닮은 특유의 푸른 색조는 이상적인 것이 천상의 분위기를 이룬다. 반면 윤형근의 그림은 땅에 발을 딛고 흙에서 솟아오른 검은 빛이다. 그리고 묵묵하다. 현실적이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빨아들였기에 엄숙하고 평온하다.
원색적이고 화사하던 그의 색감이 돌아선 데에는 큰 사건이 있었다.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73년에 부정입학 비리 사건을 폭로했다가 고초를 겪는다. 어느 새벽, 그는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끌려갔다. 그가 쓰고 다니던 모자가 러시아 레닌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윤형근은 사진 속 뉴욕의 김환기가 쓴 모자가 좋아 보인다며 안 입는 청바지를 뜯어 프랑스 농부의 모자처럼 만들어 썼을 뿐이었다. 쓰고는 흡족해 외아들에게도 똑같이 만들어 씌운 그 모자가 ‘반공법 위반’이라는 건 억지였다. 이 일은 ‘Y교사의 억울한 사건’으로 동아일보 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형무소에서 나와서 이제껏 그렸던 그림들을 전부 부숴버리고 독기를 내뿜었습니다. 1973년부터 그림이 확 달라진 계기는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처음에는 원색인데 그 위에 덧그리니까 까맣게 되고 아예 검게 만들어버리고 싶어 울트라마린(ultramarine)과 번트 엄버(burnt umber)를 섞어 먹빛으로 그렸지요.”
그렇게 이룬 자신만의 화풍이 문학잡지 ‘현대문학’의 표지로 실리자 윤형근은 이를 김환기에게 보냈고 “이건 잡지 표지가 아니라 작품이다”라는 인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듬해 단체전에서 윤형근의 작품을 본 미술평론가 조셉 러브가 “덧없음에 대한 시각적 명상을 이끌어내는 장(場)”이라 극찬하며 일본 전시를 주선해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 하나의 전환점은 자연이었다. 1976년에 상원사, 월정사를 찾아 떠난 강원도 오대산 숲길에서 쓰러진 거목을 발견했다. 눕고도 한참이 지난 나무의 뿌리가 시커멓게 바스러져 흙으로 변하고 대지로 환원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고는 오래된 시간성과 죽음을 생명의 순환으로 연결하고자 애썼다. 자연을 추앙한다고 하여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 6월 마당에 펼쳐놓고 그린 그림에서는 특유의 굵은 세로 기둥이 비스듬히 쓰러졌고 피 흘리듯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난다. 1980년 광주 민주항쟁 이후의 고통을 담아 그림 뒤에는 이례적으로 제작 연월을 분명히 적었다.
단순함과 간결함으로 절제된 미학을 추구한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작가 도널드 저드(1928~1994)가 오로지 작품만 보고 윤형근에게 반해 함께 전시하자고 청했다. 찾아온 저드가 “미술이 뭘까” 묻자 윤형근이 “심심한 거요”라고 답했다. 그 한마디를 설명하기 위해 제사음식의 ‘심심한 맛’부터 목가구의 간결한 미학 등 오감이 총동원 돼 통역에만 몇 십분 걸린 일화가 전한다. 이후 윤형근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첫 전시에 참여하며 국제적 입지를 세웠고 최근에는 ‘단색화’ 열풍을 이끌며 더욱 주목받고 있다.
윤형근의 그림이 과묵하기는 하나 그저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성찰과 자연의 순리를 이야기한다. 다만 그 깨달음이 너무나 커 그림 앞에 선 사람의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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